전재국은 어떻게 1000억 부자 됐나
  • 정락인·안성모 기자 ()
  • 승인 2013.06.1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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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 사옥, 아버지 전두환이 증여 외환위기 때 거액 투입해 회사 키워

전두환 전 대통령(82)은 슬하에 아들 삼형제와 딸 하나를 두고 있다. 아들은 재국(54)·재용(49)·재만(43) 씨며, 딸은 효선씨(51)다. 이들은 수천억 원대의 재산을 보유한 자산가들이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 밑에 고용돼 일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 보니 재산 밑천이 ‘아버지의 비자금’일 것이라는 의혹이 계속 제기됐다. 이들의 재산 형성 과정을 보면 누군가 거액의 뒷돈을 대주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그게 바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전씨는 자신의 수중에 “29만원밖에 없다”고 큰소리쳤지만, 여전히 호사스럽게 살고 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시공사 전경. ⓒ 시사저널 이상민
<시사저널>은 2010년과 2012년 ‘전두환 일가’ 재산을 취재해 공개했다. 지난해 5월에는 전씨 일가가 소유한 재산을 샅샅이 뒤져 전체 규모를 ‘2000억원대’로 추산했다. 이후 정치권 등에서는 <시사저널> 보도를 인용해 전씨 일가의 재산 규모를 특정하고 있다. 당시 재산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평가해 계산한 것이다. 그렇다 보니 실제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치보다는 낮게 평가된 측면이 있다. 재국씨의 재산(부인과 딸 포함)은 현재 드러난 것만으로도 1000억원대에 이른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재국씨는 1990년 8월에 시공사를 설립하기 전까지 다른 곳에서 일한 적이 없다. 이런 그가 짧은 기간에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다. 겉으로만 보면 ‘출판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릴 만하다. 과연 그의 성공 밑천은 ‘뛰어난 사업 능력’일까, 아니면 뒤를 받쳐주는 막강한 후원자가 있었던 것일까. <시사저널>은 시공사 설립 때부터 재국씨의 재산 형성 과정을 심층 추적했다.

전재국 ⓒ 우먼센스
아버지 전두환이 사업 밑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신군부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인 1980년에 권좌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49세였다. 당시 장남 재국씨는 21세로 연세대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1983년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원에 진학해 경제학 석사(MBA)와 행정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1988년 2월 전두환 전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났다. 친구이자 쿠데타 동지인 노태우가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친인척 비리와 부정 축재 등의 혐의로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같은 해 11월23일 서울 연희동 사저에서 방송사 카메라를 앞에 두고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다. 당시 기록을 보면 전 전 대통령은 “재산 모두를 국가에 관리를 맡기고 연희동을 떠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는 그날 백담사로 유배 길을 떠났다.

전 전 대통령이 ‘국가 헌납’을 약속한 땅 중에는 지금의 시공사 건물이 들어서 있는 서울시 서초동 1628-1번지(349.1㎡, 105평)와 1628-2번지(330.9㎡, 100평)의 토지와 건물이 포함됐다. 현재 이곳에는 지하 1층, 지상 3층의 시공사 본관 건물이 들어서 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재국씨는 1989년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부모가 머무르고 있던 백담사로 들어가 잠시 함께 있었다. 같은 해 서울로 와 오디오 전문 잡지 <스테레오사운드>를 인수하면서 출판계에 뛰어들었다. 이듬해인 1990년 8월17일 지금의 시공(시간과 공간이라는 뜻)사를 설립한다.

국가 헌납 약속 어기고 몰래 증여

그런데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서초동 토지와 건물을 몰래 장남 재국씨와 차남 재용씨에게 각각 50%씩 증여했다. 전 전 대통령이 1988년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후 약 3년 후에 있었던 일이다. 노태우 정부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이 땅에 대해 국고 환수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런 것을 보면 노태우 정권이 사실상 ‘증여’를 방조했거나 묵인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증여가 되지 않았다면 국고에 귀속되거나 비자금 추징 대상이 될 땅이었다.

이 땅은 시가로 얼마나 될까. 올해 5월31일 공시된 공시지가를 보면 1628-1번지와 1628-2번지를 합친 가격이 56억원(1㎡당 832만원, 평당 약 2600만원)이다. 부동산업계는 평당 실거래가를 이보다 2배 정도 높게 보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땅값만 112억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건물까지 합치면 150억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전씨가 시공사를 설립해 출판 재벌로 성장한 배경에 아버지의 지원이 있었다.

시공사의 초기 자본금 출처도 의문이다. 초기에 얼마를 투자했는지는 정확한 자료가 없다. 단, 법인 설립 시 자본금이 최소 5000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그 이상의 금액이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시공사는 설립 3년 후인 1993년 자본 총액이 8억원으로 늘어났다. 초기 자본금이 적지 않았거나, 그 뒤에 거액이 시공사로 유입됐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시공사의 초기 자본금이 5000만원이라고 해도 결코 적지 않은 돈이다. 1990년 1월을 기준으로 서울 영등포 당산동의 19평 아파트가 5200만원이었고, 강남구 도곡동의 22평 아파트는 7800만원이었다. 이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은 이상 전두환 전 대통령 주머니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전씨는 최근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이 드러나자 돈의 출처에 대해 “1989년 미국 유학 생활을 일시 중지하고 귀국할 당시 가지고 있던 학비, 생활비 등을 관련 은행의 권유에 따라 싱가포르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전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유령회사를 만들어 관리할 정도로 유학 생활 중에 갖고 있던 돈이 많았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또 이 돈이 국내로 유입되지 않았다면 그가 사실상 빈털터리 신세였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도 전씨는 시공사를 설립했다. 누군가 회사 설립 자본금을 건네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시공사는 설립 이후 거침없이 사업 규모를 키웠다. 대형 서점을 인수하고 신규 사업에 진출하는 등 사업 다각화를 꾀하며 덩치를 키웠고, 서울과 경기도 일대 부동산을 사들였다. 출판계의 극심한 불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년 흑자를 내는 등 걸림돌이 없었다.

시공사는 설립 초기 외국 유명 작가의 저작권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존 그리셤의 <펠리컨 브리프>(1992년)와 <의뢰인>(1993년), 로버트 제임스 윌러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1993년)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야구로 치면 연타석 장외 홈런을 쳤다.

특히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경우 국내 최단기 100만부 판매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는 저작권 국제 조약인 ‘베른 협약’에 가입하기 전이었다. 시공사는 우리나라가 협약에 가입한 1996년 이전에 집중적으로 저작권을 사들였던 것이다. 당시 저작권을 사들인 자금 출처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외환위기 때 사업 늘리며 문어발 확장

대형 출판사의 해외기획실 직원과 출판저작권 중개업체 등에 따르면 베른 협약 이전과 이후 해외 작가의 저작권 가격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미국에서 1500만부 이상 팔린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작가 스티브 코비의 경우 1만 달러 정도에 형성돼 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비싼 가격이 아니다.

최근 가장 잘나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판권 가격은 미공개이지만 판권을 가져오기 위해 지불하는 선인세 가격이 16억원이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을 정도다. 따라서 시공사는 해외 유명 작가들의 저작권을 가져오기 위해 최소 5000만원 이상을 지불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부터 2001년 8월까지 3년 4개월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에 들어가면서 외환위기를 겪었다. 기업들의 매출은 반 토막 났고, 현금 유동성 위기에 몰려 도산하는 업체가 줄을 이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쳤다. 잘나가던 기업들도 투자 규모를 대폭 줄이며 생존하는 데 급급했다. 그런데 시공사의 경영은 외환위기를 거꾸로 갔다. 오히려 건물을 증축하고, 부동산을 매입했으며, 신규 사업 확장을 통해 몸집을 불렸다.

재국씨는 1998년 4월과 2000년 5월 시공사 본관 주변의 땅을 매입했다. 서초동 1628-3번지(329.2㎡, 100평)의 토지와 2층 건물, 인근 1628-10번지(382.9㎡, 115평)의 토지와 3층 건물을 이때 사들였다. 현재 두 지번을 합치면 공시지가로 32억원 정도 된다. 건물을 포함한 실제 매매가는 최소 두 배 이상 될 것이라고 주변 중개업소에서는 말한다. 역시 외환위기 때인 1999년에는 본관 건물을 2층에서 3층으로 증축했다.

파주에 있는 토지도 이때 매입했다. 전씨는 1998년 8월 파주시 문발동 521-1번지(1515.4㎡, 450평) 토지를 매입한 후 2007년 5월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을 완공했다. 현재 이곳에는 파주출판단지가 들어서 있다. 공시지가는 1㎡당 64만원으로, 땅값은 9억7000만원이다. 실거래가는 이보다 1.5배가량 높은 90만원 정도라고 한다. 땅값이 최소 13억6000만원가량인데 건물까지 포함하면 30억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1998년 10월에는 자본금 2억5000만원으로 출판물 도소매업체인 북플러스를 설립했다. 현재 자본금은 20억원이며 임직원 수는 144명이다. 이 회사도 재국씨 소유라고 할 수 있다. 전체 지분의 64.5%를 사내이사로 있는 재국씨가 갖고 있다. 시공사도 7.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액은 502억원이며, 자산 총계는 352억원이다. 재국씨 몫으로만 계산하면 240억원에 이른다. 대표는 그의 대학 동창인 김경수씨가 맡고 있다. 2000년 4월에는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월간 <까사리빙>을 창간하기도 했다.

의문 더해가는 자금 출처

도대체 이런 돈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에 대해 한 금융계 인사는 “외환위기 때는 출판 시장도 최악의 상황에 내몰렸던 시기다. 회사가 출판 사업으로 돈을 벌어서 이 모든 투자금을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액의 뭉칫돈이 들어오지 않은 이상 설명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시공사의 재무제표를 보면 외환위기 때 놀라운 성장을 기록한다. 1999년과 2000년 주식 발행 수를 16만주에서 60만주까지 늘려 자본금이 30억원으로 불어났다. 현재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 시스템을 통해 확인이 가능한 시공사의 재무제표는 2000년부터다. 2000년 감사보고서를 살펴보면 우선 1999년과 비교해 자산이 급증한 것이 눈에 띈다. 유동 자산이 120억원에서 156억원, 고정 자산이 9억6000만원에서 25억1000만원으로 불어났다. 자산 총계는 130억원에서 181억원으로 급증했다.

매출액은 이보다 상승 폭이 크다. 1999년 147억원이던 매출액은 2000년 238억원으로 90억원 넘게 증가했다. 이후 시공사는 꾸준히 성장했다. 지난해 매출액은 442억7700만원, 영업이익은 30억900만원에 달한다. 임직원 수는 162명이다. 이처럼 재국씨는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짧은 순간에 출판계 재벌로 부상했다.

시공사는 사실상 재국씨 개인 회사나 다름없다. 2001년 이후 그의 지분이 50% 아래로 떨어진 적이 있지만, 2009년부터 50.53%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나머지 지분도 대부분 가족들이 갖고 있다. 부인 정도경씨를 비롯해 동생 재용·효선·재만 씨가 각각 5.32%씩을 보유하고 있다. 임원 구성도 마찬가지다. 재국씨가 대표이사, 부인 정도경씨가 사내이사를 맡고 있다.

출판업계 선두를 달리는 시공사의 기업 가치는 상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절반이 재국씨 소유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자산 총계를 놓고 보더라도 시공사를 통해 그가 보유한 재산은 150억원에 이른다.

시공사는 이 외에도 다양한 관계사를 두고 있다. 대형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리브로, 시공사의 파주 사옥에 입주해 있는 뫼비우스와 케어플러스 등도 관계사로 꼽힌다. 뫼비우스는 유아·초등 교육 전문 기업이며, 케어플러스는 노인 복지 용품을 판매하고 있다.

이밖에 음악 전문 출판사인 음악세계도 파주 사옥에 입주해 있다.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명빌딩 2층에 입주해 있는 파프리카미디어와 지식채널 등도 시공사 관계사다.  


허브빌리지 ⓒ 시사저널 전영기
전재국씨는 부동산 재벌이다. 서울 서초동과 파주 사옥이 있는 파주출판단지 외에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한국미술연구소 건물도 그의 소유다. 그는 2002년 6월에서 8월 사이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458-8번지(621㎡, 187평)와 458-14번지(324㎡, 98평) 토지를 연이어 매입한 후 이듬해인 2003년 3월 지하 2층, 지상 2층 규모로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휴게 음식점과 전시장이 들어서 있다.

한국미술연구소는 재국씨의 외할아버지인 고 이규동 이사장이 설립한 성강문화재단 부설 기관이다. 1985년에 설립된 성강문화재단은 현재 재국씨의 외삼촌인 이창석씨가 대표로 있는데, 재국씨도 이사를 맡고 있다. 사무실은 서초동 빌딩에 있으며, 자산 총액은 29억3000만원이다. 평창동 전시관은 공시지가가 1㎡당 328만원으로 땅값만 31억원에 이른다. 시세는 이보다 훨씬 더 나간다. 매입 당시 시세가 1㎡당 155만원 정도로 알려졌는데, 현재는 600만원을 웃돌아 전체 가격은 6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북삼리 임진강 자락에 위치한 허브빌리지는 재국씨 가족이 공을 들여온 곳이다. 대지만 해도 5만7000㎡(1만7000평)에 이르는 국내 최대 허브 농장이다. 재국씨 가족은 2004년 5월 주소지를 아예 북삼리 222번지로 옮겼다. 당시 18세이던 딸 수현씨 명의로 9019㎡(2728평)를 매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땅을 사들였다. 

현재 공시지가는 1㎡당 11만원이지만 실제 거래가는 이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재국씨 가족이 처음 매입할 당시에는 1㎡당 1만5000원에 불과하던 땅값이 33만원까지 치솟았다는 것이다. 가든·펜션·식당·찜질방·공연장 등 내부 시설까지 포함하면 허브빌리지의 가치는 적게 잡아도 200억원을 웃돌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가끔 이곳에 들러 가족들과 파티를 즐긴다고 한다.


 
 

전재국 페이퍼컴퍼니 실체 드러날까 


최근 독립 언론인 뉴스타파가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를 설립한 명단을 공개했는데, 거기에 ‘전재국’ 이름이 들어 있다. 전씨는 2004년 7월28일 이곳에 ‘블루아도니스 코포레이션’이라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으로 드러났다.

자본금 5만 달러짜리 회사로 등록했지만 실제로는 1달러짜리 주식 1주만 발행한 것을 보면 사업 목적 회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검은돈을 숨길 목적이라는 의심이 든다. 재국씨는 또 아랍은행 싱가포르 지점에 본인의 페이퍼컴퍼니 명의로 계좌를 만들었고, 이 은행에 회계 관리와 행정 업무 등을 위탁해 특별 관리를 받은 사실도 확인됐다.

재국씨도 여기에 유령회사를 설립한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세간의 의혹은 모두 부정했다.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1989년 미국 유학 생활을 일시 중지하고 귀국할 당시 가지고 있던 학비, 생활비 등을 관련 은행의 권유에 따라 싱가포르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재국씨의 해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의 학비와 생활비가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15년이 지난 시점에서 아무 이유 없이 돈을 다른 나라로 옮기도록 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다. 그것도 정상적인 자금이라면 국외 은행이 아닌 조세 피난처에 둘 이유가 없다. 재국씨가 페이퍼컴퍼니를 만든 시점은 국내에서 전두환 비자금 수사가 한창일 때다. 그는 왜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어머니와 동생, 외삼촌까지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있을 때 몰래 유령회사를 만들어 돈을 옮겨야 했을까.

하지만 재국씨의 말을 뒤집을 만한 물증을 찾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다. 국세청과 금융감독원이 외국환거래법 위반 여부 등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고, 검찰에서는 “신발 한 짝이라도 찾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이 돈의 출처와 규모, 전두환 비자금과의 연결 고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외국 계좌에 대한 조사 권한이 없어 본인을 통한 소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재국씨가 “국내 재산을 외국으로 반출한 사실도 없고, 현재 외국에 보유 중인 금융 자산은 전혀 없다”고 말한 것을 볼 때 실제 국내에서 빠져나간 자금이라고 해도 비정상적인 루트를 거쳤을 가능성이 짙다. 이런 경우 검찰·국세청·금감원이 돈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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