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의 비밀’ 그만 좀 써먹지
  • 정덕현│문화평론가 ()
  • 승인 2013.06.12 14:4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막장 비난에도 드라마들이 병적으로 집착하는 이유

SBS 주말극 <출생의 비밀>을 연출하는 김종혁 PD는 “제목을 <출생의 비밀>로 지은 것에 부담을 느낀다”고 했다. 본래 제목은 <안아주세요>

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게 심의에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조금 도발적인 제목 <출생의 비밀>을 붙였다고 한다.

이처럼 과감한 제목을 붙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요즘 너무 많은 드라마가 출생의 비밀 코드를 쓰고 있다. 막장 드라마들은 출생의 비밀을 내세워 쉽게 가족을 파괴하는 이야기를 자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드라마들에 반기를 들고 싶었다.” 제목이 <출생의 비밀>이지만 흔히 출생의 비밀 코드를 활용하는 드라마들과는 전혀 다른 드라마를 보여줌으로써 그런 막장 드라마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고 싶었다는 얘기다.

김종혁 PD의 말대로 ‘출생의 비밀’이라는 코드 자체가 이른바 막장 드라마의 공식은 아니다. 실제로 출생의 비밀이 들어 있는 신화나 고전은 흔하디흔하다. <오이디푸스왕>이 제 눈을 찌르는 이유는 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은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고전 중의 고전이라 불리는 성서 속의 무수한 이야기들 속에도 출생의 비밀은 빠지지 않는다. 우리네 설화나 전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청률 1, 2위를 다투는 드라마 과 (작은 사진). ⓒ MBC·KBS 제공
시청률 올리기 위해 자극적 설정

유리왕이 아버지 동명성왕을 찾아가는 이야기, 이것도 출생의 비밀이다. 즉, 출생의 비밀은 스토리에 담긴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다. 마치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곳을 향해 거꾸로 강물을 거슬러 오르듯, 우리는 우리네 출생에 숨겨진 어떤 비밀에 본능적으로 마음을 빼앗긴다. 그것이 한 인간의 운명을 한순간에 뒤바꾸는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최근에 드라마에서 거의 공식처럼 사용되는 ‘출생의 비밀’ 코드는 이런 인간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라고 보기 어렵다. 시청률에 목매는 자극적인 설정으로서의 출생의 비밀은 그래서 막장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제빵왕 김탁구>에서 사용된 출생의 비밀이 후에 <신들의 만찬>을 거쳐 <백년의 유산>으로 넘어오는 과정은 같은 코드가 막장 코드로 변질되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2010년 무려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제빵왕 김탁구>는 여러 면에서 이후의 드라마에 영향을 미쳤다.

MBC 주말극으로 방영됐던 <신들의 만찬>은 <제빵왕 김탁구>의 성공 방정식을 그대로 도입했다. 출생의 비밀을 바탕에 깔았고 최고의 요리사로 성장하는 주인공과 라이벌의 대결을 이야기의 주 소재로 다뤘다. 소재나 진행 방식에서도 거의 유사했고 심지어 출연 배우들마저 비슷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백년의 유산>은 이 공식의 국숫집 버전처럼 그려진다. 음식과 명장이 등장하고 성장 드라마와 출생의 비밀이 있다는 점에서 이들 드라마는 이란성 쌍둥이처럼 보인다. 똑같은 출생의 비밀 코드를 사용했지만 <제빵왕 김탁구>가 막장의 오명을 쓰지 않은 반면, <신들의 만찬>과 <백년의 유산>이 막장 논란을 일으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막장 드라마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았다는 SBS 새 주말극 . ⓒ SBS 제공
공식처럼 상투적으로 쓰는 것이 문제

<제빵왕 김탁구>가 만들어낸 창의적인 방식을 이들 두 드라마는 그저 시청률을 위해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생의 비밀’ 코드가 비난받는 이유는 재해석이나 재창조 없이 바로 이런 상투성과 자극성에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최근 드라마들이 출생의 비밀 코드를 사용하는 방식을 보면 그것이 지나치게 퇴행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KBS 주말극 <최고다 이순신>은 자기 딸인지도 모르고 핍박하는 엄마의 이야기로 거의 드라마 전반부를 이끌어왔다. 이 전형적인 출생의 비밀 코드를 빼면 이 드라마는 실상 알맹이를 거의 발견하기가 어렵다. 이런 드라마에서 메시지나 주제 의식은 하나의 변명일 뿐, 목적은 시청률이란 얘기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자극적 전개 자체를 별 부끄러움 없이 내놓고 사용하는 드라마들이 버젓이 방영되고 또한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막장의 대명사 격이 되어버린 임성한 작가의 <오로라공주>는 저녁 시간대에 편성된 일일 드라마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불륜과 비상식적인 상황 전개에 출생의 비밀 코드까지, 자극이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끼워 넣는 과감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MBC 주말극은 아예 그 시간대를 대중들에게 자극적인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대로 인식시켜버렸다. 이렇게 되면 그 영향이 타 방송사에도 고스란히 미칠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좋은 드라마를 지향해도 시청률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드라마는 자칫 경쟁적으로 퇴행할 수 있다.

신적인 위치에서 인간의 운명을 내려다보는 권력의 시점을 제공하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소재는 본래 이를 통해 관객들이 좀 더 겸손하고 긍휼한 마음을 갖게 하는 장치였다. 하지만 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진지한 탐색을 보여줬던 출생의 비밀은 어느새 드라마의 맛을 자극하는 조미료로 전락해버렸다.

이른바 막장 드라마들은 가족이 어떻게 갈기갈기 찢겨나가는가를 심지어 가학적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물론 그런 드라마들도 마지막에 가서는 급하게 가족을 봉합하며 가족애를 그리려 했다는 식으로 변명하곤 한다. 하지만 드라마에선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더 중요하다. 99%를 파탄으로 그리고 1%를 봉합한다고 해서 이런 드라마들이 갖는 막장의 행태가 용서되는 건 아니다.

실로 파편화돼가는 가족은 이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풍경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족의 가치와 의미를 묻는 드라마는 더더욱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출생의 비밀 코드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다. 하지만 이를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자극적으로 이용하고,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행태는 일종의 ‘공해’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드라마라는 그릇에, 그것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족이라는 소재를 끌어와, 자극적인 조미료로써 출생의 비밀을 남용하는 것은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대중 정서를 해치는 죄악이다. 지금 거의 모든 드라마 속에 출생의 비밀이 들어 있다는 이 불편한 진실은 우리네 대중이 얼마나 자극에 노출되어 있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