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L 대화록 실종’ 돌발 변수에 야권 대결집
  • 엄민우 기자·양정대 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13.07.23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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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참나, 이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노무현 전 대통령 지시에 의해 폐기됐다는 여권 일각의 주장에 대해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좀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친노’ 등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중도 성향의 인물이었다.

국가기록원이 7월18일 “대화록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히면서 정국은 다시 한번 격랑에 휩쓸리고 있다. 이른바 ‘대화록 실종’ 정국이 도래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지금 민주당 등 야권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국정원 국정조사특위와 장외투쟁 문제 등을 둘러싸고 ‘비노’ 중심의 신주류와 ‘친노’ 중심의 구주류가 강하게 대립하다가 지금은 피아 구분 없이 똘똘 뭉치고 있다. 이로써 야권의 재편, 나아가서 정계 개편설까지 나돌던 정국은 당분간 여야 간 초강경 대립 국면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 연합뉴스
안철수 의원에게 도움 요청 주문

NLL은 원래 ‘노무현 이슈’였다. 해당 이슈를 강경하게 주도했던 것도 문재인 의원을 비롯한 ‘친노’ 그룹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의 위기의식은 김한길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신주류라고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하다. 섣불리 대응했다가는 자칫 여권의 공세에 완전히 말려들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저격수로서의 모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으며 투쟁보다는 타협 쪽에 비중을 뒀던 전병헌 원내대표가 7월18일 열린 고위정책회의에서 “기록물이 없는 것이 확인된다면 민간인 사찰을 은폐해온 점이나 국정원 댓글의 폐기와 조작의 경험에 비춰볼 때 전과가 있는 이명박 정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도 높은 발언을 하고 나선 것도 이런 분위기를 대변한다. 민주당이 비상 상황을 맞아 통일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기자가 접촉한 복수의 민주당 의원들은 모두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근태계’로 분류되는 ‘민평련’ 소속의 한 의원은 “노 대통령 입장에서는 이것(NLL 대화록)을 은폐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여당측에서 대화록을 없앨 요인이 크다. 얼마나 원본 공개가 두려웠으면 그랬겠느냐”고 분노했다. 기존에 친노측과는 다소 불편한 관계로 알려진 ‘손학규계’의 한 중진 의원도 “NLL 대화록을 노 전 대통령이 없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고 여기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최근 김한길 대표 등 당권파를 중심으로 한 신주류와 문재인 의원 등 구주류측은 다소 엇박자를 연출했던 게 사실이다. 김 대표가 “국정조사 후 NLL 대화록에 대한 공개를 검토하자”고 밝혔을 때도 문 의원은 “대화록까지 함께 공개하자”고 발언하는 등 서로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민주당의 한 고위 관계자는 “둘 사이의 갈등 구도가 부각되고 있는데, 사실 김 대표와 문 의원은 전당대회 전후에 따로 만나기도 하는 등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문 의원의 적극 행보는 안철수 의원에 대한 견제 등 여러 가지 고려가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고 전했다.

7월17일 여야 위원들이 관련 자료를 열람하기 위해 국가기록원을 방문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친노 “정치생명이 아니라 삶 자체를 걸었다”

지금 민주당에서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안철수 무소속 의원을 거론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지금과 같은 여야 강경 대치 국면에서는 야권의 두 세력이 대립 구도를 이루기보다 함께 가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다. 민주당의 한 중진급 의원은 “새누리당과 민주당 중간 정도의 지지자들이 안 의원의 잠재적 지지층인데, 이런 가파른 정국에서는 중도 여권 성향 지지자들은 모두 다 여권 쪽으로 결집한다. 공멸의 위기 속에서 안 의원이 ‘기회입네’ 하며 민주당에 대해 경쟁 구도로 가면 몰살당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친노 진영은 위기감을 넘어 생존 문제로 인식하는 분위기다. 그만큼 절박하다. “이번에는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이건 노 전 대통령의 삶을 지켜내는 일이고, 노 전 대통령과 동고동락해온 우리 자신의 삶을 지키는 일이다. 도대체 뭣 때문에 ‘노무현’ 이름 석 자를 더럽히지 못해 저리 안달하는지 모르겠다. 절대로 대충 타협하거나 물러서지 않겠다.” 7월18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 내내 분을 삭이지 못하는 한 친노 의원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다. 그는 “차라리 잘됐다”며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자들과 웃으며 악수를 나눈다는 사실이 괴롭고 때로는 죄스럽기까지 했다. 이젠 그런 생각 다 떨쳐버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향후 정국이 파행과 대결로 치달을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임상경 전 청와대 기록관리비서관이 7월18일 국회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2007년 제정된 대통령기록물관리법에 의해 그해 말 5년 임기의 대통령기록관 초대 관장을 맡았지만, 이듬해 이명박 정부 출범 6개월 만에 보직 해임되면서 물러난 바 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정상회담 회의록 관리 과정에 정치적 목적이 개입됐다”고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이명박 정부가 현행법을 어기면서까지 노무현 정부 인사를 쫓아냈고, 이에 따라 그 이후에는 기록물이 어떻게 관리됐는지 알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에 의한 대통령기록물의 훼손 방지, 수백만 건에 달하는 기록물의 분류와 정리, 전직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지정기록물 해제 작업 등을 위해 대통령기록관장을 직전 대통령이 추천·임명토록 하고 5년의 임기를 보장하도록 법에 명시했으나 이명박 정부가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친노 진영에서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노 전 대통령이 폐기했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치생명이 아니라 삶 자체를 걸겠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그만큼 확신하는 모습이다. 노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생산된 각종 기록물들을 이전 정부 때와는 달리 국가기록원에 모두 이관시켰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고 있다. 실제 국가기록원을 방문해 대화록 예비열람에 참여한 한 새누리당 의원조차 “정상회담 전후 준비나 이행과 관련한 수많은 기록물이 꼼꼼하게 정리돼 있더라”며 “솔직히 정상회담 회의록만 없다는데, 이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 6월 NLL 이슈가 한창 불거지고 있을 즈음 대통령기록관의 한 관계자는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보관돼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비밀 기록물부터는 목록 자체가 비밀이기 때문에 알려줄 수 없지만, 대통령기록물 생산 기관에서 작성한 문서는 다 왔다”고 답했다. 당시 정상회담 대화록은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이 녹음해 온 파일과 기록 메모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정상적인 절차를 거쳤다면 해당 자료는 대통령기록관에 보관돼 있어야 맞다.

문재인 의원 등 친노 세력이 이 문제에 올인하는 정치적 이유는 분명하다. 정상회담 회의록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안보 문제와 직결된 NLL 논란을 해소할 수 있는 사실상의 유일한 열쇠란 점에서다. 한 친노 성향 의원은 “NLL 포기 의혹을 벗어나지 않는 한 친노 진영은 ‘우리 영토를 북한에 넘기려 했다’(새누리당 정문헌 의원)는 여권의 왜곡 주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경우라도 ‘대화록에는 분명한 NLL 수호 의지가 담겨 있다’(김만복 전 국정원장)는 점을 국민에게 인정받아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친노에 대한 평가는 결국 어떤 식으로든 노 전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 해석에서 시작된다”며 “NLL 포기 논란에 대해 친노 진영이 여러 부담을 무릅쓰고 전면에 나섰고 문재인 의원이 대화록 전면 공개를 주장한 건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2009년 데자뷔? 이번엔 ‘친문’의 세력화

정치권에서는 친노 그룹이 이번에도 승부수를 던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와 현재가 큰 맥락에서 보자면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가까운 한 당권파 재선 의원은 “친노 진영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옭아매는 족쇄는 위기 때 강하다는 점”이라며 “NLL이나 대화록 문제를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부산 출신의 한 새누리당 친박계 중진 의원도 “노 전 대통령 서거를 정치적으로 가장 잘 활용한 집단이 친노가 아니냐”며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실 친노 진영은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 참패 후 스스로 폐족(廢族)임을 자처했지만,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서거 이후 정치적 재기를 모색해 성공한 적이 있다. 그해 말 당권을 장악하고 이듬해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뒤 여세를 몰아 민주통합당 당권까지 거머쥐었고 지난해 총선과 대선을 전면에서 이끌었다. ‘주군(主君)’이 없는 위기 상황을 극복하면서 오히려 가장 화려한 시절을 보낸 것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2013년의 현실을 두고도 비슷한 추론이 가능하다. 친노 진영 전체가 똘똘 뭉쳐 있다는 점에서다. 지금의 김한길 지도부가 내년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지 못하면 ‘안철수 변수’ 때문에 조기 전당대회 요구가 빗발칠 게 틀림없다.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앞둔 터라 2015년 상·하반기 재보선 결과도 언제든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친노 그룹이 어느 정치 세력보다 끈끈하고 집요하다는 평가를 받는 만큼 다시 한번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충분히 나올 법하다.

하지만 2009년과 2013년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해선 안 된다는 반론도 있다. 당장 친노 진영 내부에서 이런 데자뷔에 동의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한 비례대표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의 유지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 하나의 길만 정해져 있는 게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충청권의 한 의원도 “NLL 논란과 대화록 문제는 아마도 친노의 이름으로 벌이는 마지막 싸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신율 교수는 “문재인 의원이나 안희정 충남도지사 같은 차기 주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친노 그룹은 자연스럽게 분화하고 재결집하게 될 것”이라며 “특히 현실 정치의 최전선에 있는 문 의원의 경우 NLL과 대화록 논란을 거치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친문’ 그룹을 형성하게 될 것이고, 이는 친노 그룹이 2009년과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손학규계·김근태계 모임 ‘활발’ 


민주당 내에는 신주류와 구주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교적 중립지대에 속하는 모임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한 집안 여러 살림’이라고 비판하지만 ‘다양한 목소리를 담는 민주 정당 특성상 당연한 일’이라는 평가를 내놓는 이도 있다. 당내 다양한 계파들은 신주류와 구주류가 엇박자를 보이는 현재 무엇을 하고 있고, 지금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까. ‘김근태계’로 불리는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 소속 한 의원은 “지도부가 온건한 건 맞다. 강경과 온건의 병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평련은 최근 촛불 집회에 나서자는 데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촛불 집회는 구주류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독자적 판단에 의한 결정”이라고 선을 그었다. 민평련 소속 의원들은 지금도 매주 화요일 아침 7시 반에 모임을 갖고 있다. 손학규계 의원들도 단결력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정세균계 의원들은 최근 특별히 모임을 갖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를 두고 민주당 내 한 고위 인사는 “손학규 고문은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인물이고, 정세균 의원은 아니지 않느냐. 그 차이에서 오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손학규계의 움직임이 주목할 만하다. 손학규계의 한 인사에 따르면 일부 계파 의원들이 손학규 고문의 10월 재보선 수원 출마를 적극 종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정작 본인보다 주변에서 더 권하고 있다. 손 고문이 일단 국회로 들어오기만 하면 20명 이상은 모이지 않겠느냐”고 전했다. 한때 탈계파 모임으로 만들어진 ‘주춧돌’도 최근엔 잘 모이지 않는다. 주춧돌 소속의 한 의원은 “친노계는 어떻게 보면 NLL 이슈의 당사자인데 당사자가 직접 나서는 건 전략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이라며 “그러한 움직임을 보고만 있는 지도부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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