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마피아’의 뿌리 캔다
  • 조해수 기자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3.08.0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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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건설, 참여정부 때 급속 성장…실세들과 커넥션 의혹

원전 비리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8월2일 현재까지 구속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전·현직 간부만도 6명이고, 또 다른 직원 2명에게도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비리 백화점’ ‘비리 화수분’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그러나 아직까지 원전 비리로 구속된 정·관계 인사는 없다. 원전 비리의 ‘뿌리’까지는 수사가 미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와 관련해 <시사저널>은 ‘이명박·노무현 정권 둘 다 친다’(제1239호·2013년 7월16~23일)는 기사를 통해 이전 정권의 비리 의혹을 제기했다. 검찰이 최근 원전 비리의 또 다른 고리로 지목한 H건설 역시 전 정권과의 커넥션 의혹을 짙게 풍기고 있다.

부산 기장군 장안읍 고리원자력발전소. ⓒ 시사저널 포토
부산지검 동부지청 원전비리수사단(단장 김기동 지청장)은 부산에 본사를 둔 원전 설비 업체 H건설을 압수수색하고, 이 회사 대표 송 아무개씨를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송씨가 수억 원의 회사 돈을 빼돌렸으며, 이 중 상당액을 김종신 전 한수원 사장에게 제공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H건설은 5년 전 부도 처리된 후 2년여 전 사업을 재개했는데, 이때 송씨가 김 전 사장을 비롯한 한수원 고위 간부에게 로비 자금을 건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은 현재 드러난 H건설의 로비 혐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H건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참여정부 시절 정·관계 로비까지 파헤쳐야 한다는 것이다.

H건설은 2003년 자본금 3억원으로 출발한 신생 업체이지만 참여정부 5년 만에 연간 수주액이 수백억 원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했다. H건설의 매출액 추이를 보면 2003년 1억7000만원, 2004년 16억8000만원, 2005년 41억3500만원, 2006년 44억7200만원이었다가 2008년에는 700억원대로 수직 상승했다.

H건설의 눈부신 성장은 고리원전 공사를 비롯해 부산 지역의 관급 공사를 싹쓸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원전의 경우 한수원은 자체적으로 업체를 선정하는 ‘지명 공사’를 통해 H건설을 밀어줬다. H건설은 고리원전에서 1·2호기 격납 건물 냉방 설비 공사, 심야 전기 설비 공사 등 모두 10여 건을 수주했고, 월성원전의 경우 배관·배수 공사를 담당했다. 원전 설비라는 중요한 건설 사업을 경험이 없는 신생 업체에 맡긴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H건설은 기장군청, 부산교육청, 부산교통공사, 군부대 등의 공사도 여럿 따냈다. 기장군의 경우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17건의 공사를 H건설에 맡겼는데, 2006년의 경우 한 해에만 10건의 공사를 준 것으로 나타났다.

승승장구하다 돌연 부도

말 그대로 ‘신화’를 써내려가던 H건설은 정권이 교체된 직후인 2008년 돌연 100억원대 부도를 맞았다. 전해에 700억원대 공사를 수주한 기업이, 그것도 현금 유동성에 문제가 없는 관급 공사를 주로 맡았던 기업이 갑자기 무너진 것이다. 더구나 이 회사 대표 송씨는 부인과 지인의 명의로 만든 자회사를 통해 공사 대금 대부분을 받은 후 부도가 나자 잠적해버렸다. H건설에 목을 매고 있던 하청업체들로서는 덩달아 연쇄 부도 위기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고의 부도’ 의혹이 제기됐다. 고의로 부도를 내는 것은 정권 교체기에 전 정권으로부터 특혜를 받았던 기업들이 비리 수사를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특히 폐업 후 재설립이 쉬운 건설사는 종종 이 방법을 활용한다. 한 예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게 로비한 혐의를 받고 있는 황보건설은 이명박 정부 시절 6배 이상의 매출 급성장을 보였지만 정권 교체기를 앞두고 유동성 부족을 이유로 돌연 부도를 냈다. 이명박 정권에서 4대강 사업, 경인 아라뱃길 사업 등 5170억원가량의 관급 공사를 수주한 태아건설 역시 올해 3월 갑자기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H건설, 황보건설, 태아건설은 특정 정권 아래서 급성장한 후 정권 교체기에 부도를 맞았다는 점에서 쌍둥이처럼 닮았다.

H건설의 고의 부도설에 대해서는 당시 경찰과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기도 했다. 검·경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송씨와 참여정부 실세들 간의 유착 관계를 의심할 만한 정황들이 속속 드러났다.

원전 비리 수사단이 정·관계 커넥션을 얼마나 밝혀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연합뉴스
참여정부 실세 소개로 원전 설비 공사 도맡아

송씨는 20여 년 전 국회의원 밑에서 일을 하면서 정치권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지역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참여정부가 출범한 직후다. 송씨는 2007년 민주평화통일기장군협의회 회장으로 부임했다. 이를 인정받아 2008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기도 했다. 당시 지역에서는 부산 기장군에 특별한 기반이 없는 송씨가 기장군협의회 회장을 맡는 것 자체가 정치적 연줄 덕이었다는 말이 돌았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전 정권 실세 중 한 명이던 ㄱ씨다. ㄱ씨와 송씨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H건설이 고리원전 심야 전기 설비 공사를 수주할 수 있었던 것도 ㄱ씨의 힘이라고 한다. 이후 H건설은 고리·월성 원전의 각종 설비 공사를 도맡아 수주했다.

송씨는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ㄴ씨와도 돈독한 사이를 유지했다. ㄴ씨는 이 사건과 별도로 부산 지역의 한 건설업체에 특혜를 줬다는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 이때 등장하는 건설업체 역시 H건설과 마찬가지로 사업 실적이 전무한 소규모 신규 업체였다. 송씨는 ㄴ씨가 부산 지역 관리에 활용한 산악회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부산 지역의 한 중견 건설업체 관계자는 “송씨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척과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업계에서는 송씨가 참여정부 실세와 긴밀한 사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귀띔했다.

원전 비리 수사는 지난 5월28일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신고리 원전 제어 케이블 시험 성적서가 위조됐다며 검찰에 관련자 3명을 고소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두 달여가 지나는 동안 원전의 구조적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 전국 7개의 검찰청에 사건이 배당됐다. 검찰은 일단 8월 말까지 수사를 완료해 9월 초에는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원전 비리는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암세포와 같다. 뿌리를 뽑지 않으면 언제 또 재발할지 모른다. 원전 비리를 키운 것은 결국 정권 실세들이라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검찰이 원전 비리의 핵심을 얼마나 파헤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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