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주검들 밟고 갔지만 변한 것은 없다
  • 태국 방콕=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3.08.0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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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과 노란색의 끝없는 갈등…‘빈부 격차’ ‘멸시’가 만든 태국의 모순

“이곳은 올 때마다 새로움이 가득한 도시다.” 자신을 앰버라고 소개한 네덜란드 여행객은 이번이 세 번째 방콕 방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태국의 수도인 방콕은 미소의 도시다. 태국인들의 온화한 미소를 말하는 여행객들은 이곳을 여행자들의 천국으로 꼽는다. 그래서인지 방콕에서 만난 여행객 중 꽤 많은 사람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배낭여행자의 거리인 ‘카오산 로드’는 전 세계 여행자 집결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카오산 로드에서 동쪽으로 쭉 뻗은 랏차담넌 도로를 따라 500m 정도 걸어가면 원형 로터리가 보인다. 그 가운데 우뚝 선 구조물이 있다. 태국어로 ‘아눗싸와리 쁘라차티빠타이’라고 불리는 이 구조물은 ‘민주기념탑’이다. 

2010년 3월22일 깊게 패인 주름을 가진 레드셔츠 시위대 참가자가 방콕 도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 EPA 연합
전 세계가 2011년의 ‘아랍의 봄’에 주목했지만, 그보다 1년 앞선 2010년 태국에서 거대한 시위가 휘몰아쳤다. 붉은 옷의 탁신 지지자들은 민주주의연합전선(UDD)이라고 불렸다. 노란 셔츠를 입고 나선 국민민주주의연대(PAD)는 탁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붉은색과 노란색의 대결, 그리고 진압 부대의 진격. 피를 부른 태국의 2010년, 국민들은 탁신이라는 한 정치인을 두고 엇갈린 입장을 취했지만 ‘민주주의’를 외쳤다는 점만은 같았다.

갈등의 절정은 2010년 4월10일이었다. 당시 민주기념탑 앞으로 빨간색 군중이 밀려들어와 로터리를 메웠다. 빨간 물결은 군인과 경찰로 이뤄진 진압 부대를 조금씩 밀어냈다. 더는 밀릴 수 없었던 진압 부대는 최루탄과 소총을 사용하며 무력행사에 나섰다. 폭발물 터지는 소리가 도처에서 들렸고 불길과 연기 속에서 사람들은 혼비백산 흩어졌다. 흘러내린 붉은 피는 아스팔트 표면에 엉겨 붙었다. 이날 충돌로 25명이 죽고 9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시위대가 민주기념탑에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방콕 도심은 이들의 해방터였다. 시위대는 우리네 서울의 명동, 혹은 여의도라고 할 수 있는 라차프라송 일대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 지역에는 씨암파라곤과 마분콩(MBK) 등 방콕의 주요 쇼핑몰이 위치해 있고 각종 글로벌 기업과 은행 본사가 몰려 있다. 상류층의 여가 장소이며 태국 엘리트들의 집합소다. 2010년 태국 중·상류층의 터전인 이곳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들은 UDD, 이른바 레드셔츠였다. UDD는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사람들 집단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난한 이들의 부자 지역 장악은 5월에도 계속됐다. 3월부터 시작한 시위대의 싸움은 최종 진압당한 5월19일까지 이어졌다. 라차프라송 거리를 포함해 방콕에서 펼쳐진 시위로 사망한 사람이 200명에 달했다. 부상자는 그 10배가 넘었다.

태국인들은 지금도 2010년의 아픔에 대해 입을 떼는 것을 꺼린다. 한두 다리만 건너면 상처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만난 한 노인은 자신의 딸 이야기를 꺼냈다. 숫타 완나프록의 딸 사라는 2010년 구급차를 타고 시위 현장을 오가던 간호사였다.

“5월14일, 사라를 비롯한 구급대원은 여느 때처럼 시위 현장으로 향했지. 오후 4시쯤 시위 현장 인근의 피나클 호텔 주차장에 구급차를 세웠다고 하더군. 그때 근처에서 총성이 울렸고 어디선가 튀어나온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혼비백산해 호텔과 근처 건물로 도망을 쳤대. 조금 뒤 군인 7~8명이 와서 구급차를 총으로 툭툭 치며 딸과 동료들을 구급차에서 내리라고 했어.”

방콕 시내 우뚝 솟은 빌딩 아래 보이는 황무지가 태국의 현실을 보여준다. ⓒ 시사저널 김회권
“누가 우리에게 신경이나 쓰겠는가”

내리고 난 뒤 사라는 결국 총을 맞았다. 군인이 쏜 총알은 오른팔을 관통했다. 당시 군인은 사라와 동료들에게 “누구냐”고 물었고 이들은 “구급대원”이라고 답했다. 시위 현장에서 군인들도 수없이 간호했기 때문에 진압군과 마주쳤을 때도 설마 자신들을 해코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상으로 입원한 사라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뒤편 모서리에 자리 잡은 군인이 우리를 조준하는데 내 친구를 진심으로 쏠 것 같았어. 그래서 팔을 내밀어 친구 머리를 숙이게 했는데 동시에 총성이 울렸어.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내 팔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으면 친구 머리에 맞았을 거야.”

피 흘리는 아픔은 UDD, 레드셔츠 시위대에 집중됐다. 그들은 시위의 주동자였고 진압의 대상이었다. 동북부 농카이 출신의 솜삿쿠 씨(38)는 시위에서 형을 잃었다. 그의 형은 출신 지역인 동북부의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격차를 줄여달라’고 요구하기 위해 붉은 옷을 입었다. 4월10일 시위대와 군이 충돌했고 이때 형은 총을 맞았다. 솜삿쿠는 “비록 죽었지만 형의 행동은 옳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고향 마을에는 일자리가 없다. 태국은 가난한 사람들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멸시받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솜삿쿠와 형은 방콕으로 와 택시기사 일을 했다. 월수입은 각자 약 1만 바트(36만원) 정도였는데 그중 절반을 고향에 보냈다. 솜삿쿠는 택시를 운전하며 본 방콕의 모습에서 “농촌과 도시의 격차에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 농촌에 탁신은 보조금으로 연간 1만 바트를 지원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돈으로 산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그는 “탁신이 없었다면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방콕에서 빈민층 구제 활동을 하고 있는 솜 암납 씨는 “탁신의 공과는 반드시 나누어 얘기해야 한다. 실책도 많지만 저렴한 의료 제도와 촌락 기금, 농민들의 부채 감축 등 빈곤층을 위해 펼쳤던 정책, 그리고 군이나 경찰이 개입하고 있던 마약과의 전쟁은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태국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데 탁신을 빼고는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2006년 의회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해 안정된 정치 기반을 갖춘 탁신 정권은 군사 쿠데타로 붕괴했고, 탁신 총리는 국외로 추방됐다. 하지만 다음 선거에서도 탁신파가 승리하며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았다. 탁신 대신 총리에 취임한 사막 순다라벳 총리는 총선 전부터 진행했던 텔레비전 요리 쇼 때문에 총리의 겸직 규정 위반을 이유로 물러났다. 탁신의 매제로 그 뒤를 이은 솜차이 정권은 선거법 위반 판결 등 장애물을 만나 법원의 해산 명령을 받고 무너졌다. 반(反)탁신파인 아피싯 정권이 이때 세워졌는데 여기에는 옐로셔츠의 후방 지원이 있었다. 옐로셔츠는 2008년 8월 3개월 넘도록 정부청사를 점거해 농성을 벌였고, 11월에는 수완나품 국제공항과 돈므앙 공항을 점거했다. 자신들이 선거로 세운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본 레드셔츠가 이때부터 거리에 등장했다. 이들의 시위는 탁신파에 지원 사격 구실을 했다. 탁신의 의도였든 그렇지 않든 가난한 붉은 옷의 시위대는 ‘정치의식’을 머릿속에 품었다.

이렇게만 들으면 태국의 진통은 단순히 레드셔츠와 옐로셔츠의 싸움, 농촌 지역의 빈곤층 및 도시의 저소득층과 도시 중상류층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주변에서 태국에 관해 물어오면 정말 골치가 아프다”고 말하는 니브 라셀 박사는 현재 한 글로벌 기업 부설 연구소에서 태국과 관련한 보고서를 내고 있다. 투자를 위한 정세 보고서도 가끔씩 쓴다. 그는 “태국 사회가 여기까지 온 건 놀라운 일이다. 2006년 (탁신이 물러난) 쿠데타 이후 정치 불안은 거의 끝났을 것이라고 봤다. 태국의 레드셔츠와 옐로셔츠의 갈등을 단순한 계급투쟁으로 규정할 것인지는 냉정히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라셀 박사는 그러면서 PAD가 말하는 민주주의를 설명했다. PAD는 탁신에 반대하며 왕정을 수호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그는 “태국의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보통의 민주주의와 뜻이 다른 것인지 궁금하다. PAD는 탁신파의 독주로 생긴 의회민주주의의 단점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의 70%를 임명제로 하자는 제안에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그들이 반대하지 않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 UDD가 많은 표를 갖고 있으니 의회에서 이길 수 없어서다. 세력 갈등일 수도 있고 계급 갈등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옳고 그름의 문제 때문에 레드셔츠는 분노하고 있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파타나퐁 변호사와 그의 부인. 파나타퐁은 경제적 격차 해소를 우선 과제로 꼽았다. ⓒ 시사저널 김회권
탁신 사면 법안 두고 재연되는 갈등

PAD를 방콕에서 만나기란 의외로 쉽지 않았다. 스스로가 “나는 옐로셔츠다”라고 드러내는 사람은 드물었다. 7월14일 방콕의 도심 지역인 시암에 위치한 방콕예술센터(BACC) 앞에 하얀색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모인 일단의 무리들. 이들은 PAD였다. 상당수 참가자들은 국왕의 사진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300여 명의 반탁신파 ‘브이포타일랜드(V for Thailand)’ 회원들은 이날 방콕 중심에 위치한 룸피니 공원에서 반정부 집회를 가진 뒤 이곳까지 행진해왔다. 이들은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 총리 타도’ ‘탁신의 영향력 배제’ 등을 호소했다.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한 참가자에게 선거로 선출된 잉락 총리를 반대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농민들은 현명하지 못하다. 결국 돈에 매수된 것”이라고 답했다. UDD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모멸을 드러냈다.

한 대형 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는 우라피 파타나퐁은 이런 현상들이 걱정스럽다. 그로서는 자신이 경험한 이전의 태국 혼란상과 비교할 때 2006년 탁신 축출 이후의 혼란이 정확히 가늠되지 않는다. 그는 “태국의 위기가 국가 전체에 이르고 있는 것 같다. 1973년과 1976년 그리고 1992년의 시위에서도 이처럼 긴 혼란은 경험해보지 못했다. 지금의 정권이 사회 불평등을 시정하고 소득 분배도 개선해 빠른 효과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탁신파가 주도하는 태국 정부는 7월31일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치안 당국의 권한을 강화하는 국내안전보장법을 8월1~10일 국회와 총리 관저 등이 있는 두싯·프라나콘·폼 프랍 등 세 개 구에 발령했다. 8월1일 개회하는 국회에서는 탁신 전 총리에 대한 사면 법안이 심의될 예정이다. 사면 법안은 탁신파 여당의 하원의원들이 제출하고 심의는 8월7일 이루어진다. 반탁신파 단체들은 8월4일 대대적인 반대 집회를 열겠다는 계획을 밝힌 상태다. 핏빛 주검들을 밟고 지나갔건만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채 태국의 민주주의는 충돌로 점철되고 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다음 호에는 ‘왕정과 민주주의의 함수 관계’가 이어집니다.



이싼에서 만난 왓차이 한타위 씨. ⓒ 시사저널 김회권
다른 태국 지역과 달리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너무 쉽게 볼 수 있는 동북부 이싼 지역. 태국 국토의 32.9%, 인구 33.9%를 차지하고 있지만 태국에서는 빈곤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UDD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이곳 이싼이다. UDD에 참가한 사람들 중 이싼 출신이 많기 때문이다. “레드셔츠에 참가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싼으로 가면 되겠네”란 대답이 돌아올 정도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탁신에 대한 지지가 강하다. 농촌 지원과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을 했다는 점에서 탁신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목소리가 많다. 탁신 스스로도 “나는 몰래 태국으로 들어가 이싼에서 죽고 싶다”고 말할 만큼 애정을 보인 곳이다.

2011년 7월 태국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다. 이싼 지역에서 친탁신계인 프어타이 당은 101석을 얻었다. 야당인 민주당은 고작 2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싼의 압도적 몰표는 탁신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이 총리에 오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싼의 젊은이들은 빈곤의 땅을 떠나 방콕 등지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는데 대다수는 주민등록을 이싼에 남겨 놓았다. 그들은 이싼으로 돌아와 한 표를 행사했다. 

7월17일 기자는 이싼 지역을 방문했다. 우돈타니에 사는 왓차이 한타위 씨(46)는 한때 ‘리야오싸이’에 몸담았던 열혈 레드셔츠였다. 리야오싸이는 UDD의 소규모 그룹으로 좀 더 급진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2006년 탁신이 축출된 이후 한타위 씨 역시 정치 활동에 열을 올렸다.

그 역시 2010년 방콕의 시위대 한복판에 뛰어들어 레드셔츠를 입었다. 고향에서도 시위가 있었지만 방콕으로 원정을 간 사람도 꽤 많았다. 한타위는 “이곳은 옐로셔츠에게는 적막한 곳이다. NGO(비정부 기구)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는 옐로셔츠들도 더러 있지만 마을에서는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내 아내도 탁신 반대파로 옐로셔츠였지만 탁신을 반대하는 것보다는 농촌의 자립과 역행하는 방식을 취한 탁신의 방식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이싼의 시위대는 진정성을 의심받았다. 500~1000바트(1만8000~3만6000원) 일당으로 이싼의 농민들이 방콕 시위에 참가한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한타위 씨는 “이싼에서 농사일 일용직 일당이 200~300바트(7200~1만800원) 정도다. 그 말대로라면 하루 종일 모내기와 벼 베기를 하는 것보다 시위 참가 일당이 더 많다. 농한기에 좋은 일거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 주위 사람들은 아니다. 다들 방콕 체류 비용을 가지고 떠났다”고 말했다.

이싼에서도 시위가 점점 격화되자 우려가 있었다. 그는 “우린들 폭력 시위가 좋겠나”라고 말했다. 시위가 과열되고 방콕이 불타오르면서 장기화되자 이싼에서도 “시위대가 너무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한타위 씨는 “당시에 시위가 길어지자 피곤하다는 말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옷을 선택할 때 빨간색과 노란색은 일단 피했다”고 전했다. 한타위 씨의 이웃도 레드셔츠를 입고 방콕으로 시위를 하러 떠난 아들을 잃었다. 총탄이 청년의 왼쪽 어깨 쇄골 아래를 뚫어 오른팔 부근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아들이 보내주는 월 3000바트의 돈은 매우 귀했다. 내 이웃은 그 시위로 아들도 잃고 생활도 잃었다”고 말했다. 사망자의 장례식에는 3000명이 넘는 조문객이 찾아왔다. 마을의 인구보다 많은 숫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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