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특목고지 ‘의대 입시학원’이네
  • 조수영 인턴기자 ()
  • 승인 2013.08.2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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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취지 온데간데없이 명문대 입시에 매달려

자율형 사립고(자사고)와 특수목적 고등학교(특목고)는 고교 서열화의 주범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특목고의 경우 오래전부터 설립 취지와 달리 ‘입시학원’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올해 초 영훈국제중·고, 대원국제중·고 등에서 입학 부정 사건 등이 터지면서 ‘특목고’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도 들끓었다. 

이런 배경에는 우수 학생들이 특목고나 자사고로 빠져나가면서 일반고 공동화와 학교 서열화를 초래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자사고는 이명박 정부에서 고교 다양화를 이유로 크게 늘렸지만, 도입 3년 만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우리 교육 정책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다.

하지만 특목고를 손대지 않으면서 반쪽짜리 정책이 됐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특목고의 실상을 보면 심각하다. 현행 초중등교육법시행령 제90조에는 ‘특수 분야의 전문적인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고등학교’로 규정돼 있다. 말 그대로 과학·외국어·해양·예술·체육 등 각 분야의 전문가를 조기에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다. 국제고·과학고·외국어고가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지금의 특목고는 다르다. 일부 특목고의 경우 설립 취지와는 달리 ‘좋은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학원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실제 특목고 재학생 대다수가 ‘전문 분야 진출’보다는 ‘명문대 진학’을 위해 특목고를 선택한다. 지방 특목고의 경우 외지 부유층 자녀들의 입시학원으로 전락했다는 말이 오래전부터 나왔다. 

지난 7월 특목고 교육과정 점검 결과 9개 학교에서 이과반을 운영하는 등 편법 운영 실태가 드러났다. ⓒ 연합뉴스
국제고·외국어고 ‘자연계열’ 러시

기자와 접촉한 외고 재학생이나 동문들은 “명문대 진학을 위해서 외고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민경양(가명·18)은 서울 근교에 있는 한 외국어고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이양이 외고를 선택한 것은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로 불리는 명문대 진학을 위해서다. 이양은 “우리나라는 고등학교까지 서열화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명문대 진학률이나 수능 상위 등급 학생 비율 등을 따지지 않을 수가 없다. 성적 좋은 학생을 유치해 명문대를 많이 보내야 ‘좋은 학교’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2009년에 외고를 졸업해 연세대에 재학 중인 이도현씨(가명·남)는 “학교에서 명문대 진학에 엄청 신경을 썼다. 3학년 담임선생님의 경우 진학률을 기준으로 인센티브를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수의 특목고 학생들이 발길을 돌린다는 데 있다. 몇몇 외고·국제고가 특목고 설립 취지를 망각한 교육 시스템을 운영하는 게 아니냐는 의문은 그래서 제기된다.

국제고·외고 학생들의 대학 계열별 진학 현황을 보면 더욱 실감난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정진후 진보정의당 의원 측이 제공한 ‘2010~12년 국제고·외국어고 계열별 대학 진학 현황’을 분석한 결과 외고 출신 학생들의 ‘비(非)어문계열·자연계열 러시’가 심화되고 있었다.

특히 외고 출신 학생들의 대학 진학 현황을 보면 목적 없이 표류하는 특목고의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학생들이 진출하는 분야보다 좋은 대학 보내기에 급급했던 특목고의 민낯이 통계에 그대로 반영됐다.

최근 각 시·도교육청이 주관한 ‘특목고 점검’ 결과에 따르면 특목고가 입시학원처럼 운영되고 있다는 정황이 나타난다. 외고를 중심으로 일부 특목고에서 버젓이 시행되고 있는 변칙 운영 사례들은 특목고의 입시학원화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기자는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민주당 박홍근 의원실을 통해 입시학원화된 9개 특목고 명단을 입수했다. 이들 외고·국제고에선 모두 이과 과목을 개설하거나 사실상 이과반을 편법으로 편성해 운영하고 있었다. 사설 학원에서 운영하는 커리큘럼과 다를 바 없었다.

기관경고와 시정명령 조치를 동시에 받은 부산외고는 2, 3학년에 이과반을 편성해 운영했다. 같은 지역의 부일외고는 애초 신입생 모집 요강에 의대 등 이과계열 진학 사항을 명시한 내용이 관할 교육청 점검에서 드러났다.

부일외고는 ‘생명과학Ⅱ’ ‘화학Ⅱ’ 등 의대 입시에 필요한 과목을 개설했다. 외국어 영재를 길러내자는 취지에서 한참 동떨어져 있다. 해당 학교는 현재 기관경고와 시정명령을 받은 상태다. 그 밖에 7개 학교는 교과과정에 ‘기하와 벡터’ ‘수학Ⅱ’ ‘적분과 통계’ 등 수준 높은 이과 과목을 개설해 시정명령 등의 조치를 받았다.

버젓이 운영되는 ‘외고 의대준비반’

편법 운영이 적발된 외고에서 이공계나 의약 계열로 진학한 학생들의 숫자를 보면 놀랍다. 정상적인 외고가 맞나 싶을 정도다.

고양외고와 안양외고는 사실상 ‘이공계·의대 사관학교’였다. 안양외고의 경우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매년 평균 40% 이상이 자연계로 진출했다. 같은 기간 고양외고는 대학 진학자들 가운데 평균 37%가 자연계를 택했다. ‘외고 출신 의사’는 외국어고가 지향하고자 하는 인재상이 결코 될 수 없다.

특목고의 입시학원화를 막을 열쇠는 ‘특목고 지정’을 통제할 수 있는 주무 부처가 쥐고 있다. 서남수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은 8월13일 브리핑에서 “특목고에서 이과반·의대준비반을 두는 등 교육과정을 부당하게 운영할 경우 지정을 취소하도록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교육부의 강경 드라이브는 매번 공염불에 그쳤다. 서 장관은 교육인적자원부 차관으로 재직하던 2007년에도 ‘특목고 운영 정상화 방안’을 내놓은 적이 있지만 유야무야됐다.

야권 일각에서는 “이젠 일반고 전환을 재검토할 시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국제중 이슈가 마무리되는 하반기에 특목고·자사고 등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6월 박홍근 민주당 의원은 특목고의 설치와 운영을 법률로 정하도록 하고 국제고를 폐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초중등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현재 국회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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