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정치재판? 불륜·치정만 난무했다
  • 모종혁│중국 전문 자유기고가 ()
  • 승인 2013.09.0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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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보시라이 전 충칭 당서기…여자 관계만 부각

8월22일 이른 아침, 중국 산둥(山東)성 지난(濟南) 시 중급인민법원 주변은 평소와 달리 삼엄한 경계 속에 소란스러웠다. 법원 정문에는 정·사복 경찰이 대거 배치돼 세계에서 몰려든 취재진 수백  명의 접근을 막았다. 법원 주변 곳곳에 포진한 공안 병력을 뚫고 중국 각지에서 온 수십 명의 시민은 구호를 외치며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오전 8시, 무장 경찰 차량의 호위 속에 차량 10여 대가 법원 청사로 들어갔다. 차량 행렬 가운데는 은색 벤츠 승합차도 있었는데 여기에 이날의 주인공이 타고 있었다. 지난해 2월 자신의 수하였던 공안국장 왕리쥔(王立軍)이 돌연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시의 미국 총영사관으로 피신해 망명을 기도하면서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던 ‘비운의 풍운아’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 시 당서기였다.

22일부터 5일간 법원 내 5호 법정에서는 피고인을 단죄하려는 검찰과 보시라이 측 사이에 치열한 심리전이 벌어졌다. 흰 와이셔츠와 정장 바지를 입은 보시라이는 다소 핼쑥했지만 변론을 할 때 쏟아내는 목소리에는 기운이 넘쳤다. 지난 인민법원은 10여 분의 시차를 두고 재판의 전 과정을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에 공개했다. 재판장과 보시라이 사이의 일문일답, 검찰의 공소장 내용, 검찰과 보시라이 사이의 질의·답변 등이 모두 외부로 퍼져나갔다.

심리 과정에서 보시라이는 폭탄 발언을 잇따라 터뜨렸다. 보시라이는 첫날 재판에서 검찰이 제출한 아내 구카이라이(谷開來)의 서면 증언을 부인하며 “웃기고 가소롭다” “미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4일 재판에서는 “바람을 피워 정부(情婦)를 두는 바람에 2000년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홧김에 해외로 떠나 2007년까지 같이 못 있었다”고 진술해 자신의 외도를 인정했다. 26일 마지막 변론에서는 “왕리쥔이 아내에게 연정을 품다 들켜 미국 총영사관으로 도망쳤다”고 주장했다.

8월22일 다소 핼쑥한 모습으로 법정에 출두한 보시라이 전 충칭 당서기. ⓒ AP 연합
공소 사실은 부인하고 불륜 문제 들고 나와

고대하던 세기의 정치재판에서 불륜과 치정에 관한 고백이 쏟아지자, 법원 밖에 진을 치고 있던 외신 기자들은 허탈해했다. 이들이 기대한 것은 ‘충칭 모델’의 설계자이자 중국 좌파의 우상인 보시라이가 현 5세대 최고 지도부를 향해 쏟아내는 울분의 육성이었다. 무대에서 사라지는 권력자가 대중 앞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자리였기에 그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 컸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축출된 ‘4인방(四人幇)’의 재판이 대표적이다. 1976년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4인방은 반당(反黨) 집단으로 몰려 체포됐다. 1980년 11월 베이징에서 열린 공개 재판은 TV를 통해 중국 전역에 생중계됐다. 마오의 아내였던 장칭(江靑)은 “나는 마오 주석의 개였을 뿐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역사를 거스른 혁명의 배반자다”라며 분노를 터뜨렸다. 장춘차오(張春橋)도 구두 진술, 문서 열람, 자필 서명 등을 거부하고 철저히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재판의 부당성을 알렸다.

이와 달리 왕훙원(王洪文)과 야오원위안(姚文元)은 재판정에서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했다. 그 결과 장칭과 장춘차오에게는 사형에 형 집행 유예 2년이 선고됐고, 왕과 야오는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사형 유예는 사형을 선고하지만 2년간 집행을 유예한 뒤 무기징역이나 유기징역으로 감형하는 제도다. 자신의 죄를 인정할 경우 죄를 감면해주는 중국 형법의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이와 반대로 보시라이는 재판 시작과 함께 검찰의 공소 사실을 모두 부인하고 불륜과 치정 문제를 들고 나와 중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중국 정부가 재판 과정을 웨이보를 통해 문자 중계하고 사진을 공개한 것은 재판의 투명성을 높여 잡음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보시라이가 여러 범죄 행위로 인해 피고인석에 섰다는 점을 낱낱이 알려 동정 여론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지지자들의 반발을 제압하려고 했다.

실제 보시라이는 뇌물 수수, 공금 횡령, 직권 남용 등 다양한 범법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이 공개한 공소장에 따르면, 보시라이는 1996년부터 2006년까지 다롄(大連) 시장과 당서기, 랴오닝(遼寧)성 성장, 상무부 부장에 재직하면서 2679만 위안(약 49억3000만원)의 금품을 수뢰하거나 공금을 빼돌렸다. 다롄국제발전회사 탕샤오린(唐肖林) 사장과 다롄스더 그룹 쉬밍(徐明) 회장으로부터 각종 이권과 관련해 모두 2179만 위안(약 40억1000만원) 규모의 뇌물을 받았고, 정부 공사와 관련된 공금 500만 위안을 챙겼다는 것.

‘태자당’ 선두 주자로 한때 시진핑에 맞서

구카이라이는 보시라이가 금품 일부를 직접 받았고 일부는 자신과 아들 보과과(薄瓜瓜)를 통해 챙겼다고 진술했다. 챙긴 돈을 아들이 해외에서 유학하는 데 필요한 학비, 생활비, 여행 경비 등으로 썼다고 덧붙였다. 중국인들이 민감해하는 문제 중 하나인, 고위 관리의 자제인 ‘관얼다이(官二代)’의 호화로운 생활상도 드러났다. 보과과는 쉬 회장의 후원 아래 전용기를 타고 아프리카를 여행했고, 하버드 대학 케네디스쿨 교수와 같은 반 학생 40여 명을 중국에 초대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중심으로 한 5세대 지도부는 이런 보시라이의 죄상을 만천하에 공개해 보시라이를 추악한 부정부패자로 낙인찍으려 했다. 왕리쥔 망명 기도 사건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보시라이는 지난해 11월의 18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이 유력했다. 보시라이는 공산당 8대 원로 중 한 명인 보이보(薄一波) 전 부총리의 아들이다. 아내인 구카이라이도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공을 세운 구징성(谷景生) 장군의 딸이다. 또한 보시라이는 충칭을 무대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 관내 조직폭력배를 일소했고 도농(都農) 통합 발전, 국유 기업 개혁, 임대주택 보급 등 분배를 중시하는 경제 정책을 추진해 시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혁명가요 부르기와 마오쩌둥 혁명 사상 고취 캠페인을 벌여 좌파 지식인들의 성원도 얻어냈다. 이같은 충칭 모델이 성과를 거두자 보시라이는 태자당(太子黨)의 선두 주자로 부상해 시 주석에 견줄 만한 지지 세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왕리쥔의 돌출 행동은 보시라이의 운명을 뒤바꿨고 그를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게 만들었다. 보시라이는 4인방 이래 부정부패로 사법 처리되는 3번째 정치국 위원이다. 25명의 정치국 위원은 지난해 말 8512만명에 달한 전체 공산당원 중에서 최고위직이다. 1998년 천시퉁(陳希同) 전 베이징 시 당서기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에 의해, 2007년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 시 당서기는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에 의해 제거됐다.

천시퉁은 장 전 주석이 이끄는 ‘상하이방’과 경쟁한 ‘베이징방’의 대표 주자로 공개 석상에서 장 전 주석에게 대들 정도로 권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22억 달러 규모의 뇌물 수수와 공금 횡령 혐의로 기소돼 징역 16년을 선고받았다. 천과 더불어 40명 이상의 베이징 시 고위 관리들이 숙청됐고, 그 이후 베이징방은 철저히 몰락했다. 한때 ‘상하이방의 황태자’로 불렸던 천량위도 정치국 회의 석상에서 후 전 주석의 정책을 비판하며 세력을 키우다 뇌물 수수와 직권 남용 혐의로 18년 징역형을 받았다.

트위터서 보시라이 칭송 분위기 고조

재판을 막장 드라마로 변질시킨 보시라이의 전략은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8월27일 타이완 ‘연합보’는 “이번 공개재판의 최대 승자는 보시라이”라며 “법정에서 기죽지 않고 항변하는 모습을 보여줘 동정 여론을 형성했고 좌파의 정신적 지도자로 거듭 자리매김했다”고 평가했다. 실제 재판이 끝난 뒤 웨이보에는 보시라이의 과거 업적을 칭송하는 글들이 쉴 새 없이 리트윗되고 있다.

하지만 재판에서 기소 혐의를 전면 부인한 것이 보시라이의 형량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다. 중국 형법을 일반화해 적용하면 징역 15~20년 정도가 예상되지만, 공소 과정에서의 자백을 뒤집고 재판에서 무죄를 주장하면 괘씸죄가 적용돼 무기징역까지 내려질 수 있다. “내게는 이제 여생밖에 남지 않았다”는 최후진술처럼 모든 치부를 다 까발린 보시라이가 명예를 지키고 좌파의 영웅으로 영원히 각인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보시라이와 그의 아내 구카이라이. ⓒ AP 연합
중국의 케네디와 재클린. 한때 서방 언론 매체가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 부부를 부르던 호칭이다. 이런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는 중국 최고의 성골 집안 출신으로, 대중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흥미롭게도 둘의 만남은 불륜으로 시작됐다. 1949년생인 보시라이는 문혁 기간 노동자로 일했는데 27세 때 군의관이던 리단위(李丹宇)와 결혼했다. 리단위는 베이징 시 당서기를 지낸 리쉐펑(李雪峰)의 딸로 보시라이의 아버지 보이보와 리쉐펑은 모두 공산혁명 1세대다.

29세에 늦깎이로 베이징 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한 보시라이는 1981년 같은 학교 법학도인 구카이라이를 만나 불륜을 저질렀다. 당시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는 사돈지간으로 리단위의 오빠 리샤오쉐(李小雪)와 구카이라이의 언니 구단(谷丹)은 부부였다. 네 살짜리 아들까지 있던 보시라이는 주위의 이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단위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리단위의 집안이 완강히 반대하자 4년간 소송을 벌여 1984년에 이혼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이혼 소송 끝에 결혼한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는 1990년대 중반까지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보시라이는 39세에 다롄 시 부시장에 임명돼 시장, 당서기, 랴오닝성 성장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구카이라이도 법률 회사를 차리고 대기업 소송을 잇달아 따내며 부와 명성을 쌓았다. 1998년 발간된 <미국에서 승소하기>는 구카이라이가 미국에서 송사에 휘말린 중국 기업들의 승소를 도운 사례를 모은 책으로 구카이라이를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 반열에 올려놓았다.

금실 좋던 부부 관계가 깨진 것은 대략 1999년부터다. 이때 보시라이와 지역 방송사 아나운서인 장웨이제(張偉傑)의 불륜설이 나돌았다. 남편의 외도에 화가 난 구카이라이는 이듬해 아들 보과과를 데리고 영국으로 떠났다. 구카이라이가 출국하기 전 장웨이제도 돌연 실종됐는데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영국으로 건너간 구카이라이도 조신하게 지냈던 것은 아니다. 다롄에 있을 때부터 비즈니스 파트너로 긴밀했던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와 내연의 관계였고 집안 집사인 장샤오쥔(張曉軍)과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보시라이의 낙마를 불러일으킨 왕리쥔의 망명 기도 사건은 지난해 11월 구카이라이가 사업 문제로 관계가 틀어진 헤이우드를 장샤오쥔의 도움을 받아 독살한 데서 비롯됐다. 이 사실을 입수한 공안국장 왕리쥔은 구카이라이의 행적을 추적해 그 전모를 보시라이에게 알렸다가 경질됐다.

구카이라이는 지난해 8월 법원에서 사형에 법 집행 2년 유예를 선고받은 후 고위층을 위한 감옥으로 알려진 베이징 교외의 친청(秦城) 감옥에서 복역 중이다. 이번 재판에서 구카이라이는 검찰 측 주요 증인으로 보시라이의 범죄 혐의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토해냈다. 이에 대해 보시라이는 “구카이라이가 미쳤다”고 비난하며 “그녀야말로 큰 금고에 아주 많은 돈을 넣어두고 물 쓰듯이 썼다”고 검찰을 압박했다. 30여 년 전 드라마처럼 이뤄진 사랑과 결혼이 악연으로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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