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띠만 두르면 뭐든 못할 게 없다
  • 조유빈 인턴기자 ()
  • 승인 2013.09.11 13:5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수 성향 정치 집회에 어김없이 등장…제재할 마땅한 법안 없어

‘반(半)군인 정치’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별 16개가 박근혜 대통령 주변에 포진하고 있어서다. 4성 장군 출신인 청와대 경호실장·국가안보실장, 국정원장, 국방부장관 등 4인을 가리킨다. 여기에 또 한 명의 4성 장군을 더해 별 20개가 박 대통령 곁에 있다는 말도 나온다. 재향군인회(향군)를 이끌고 있는 박세환 회장을 일컫는다. ‘안보’를 표방하며 보수의 대변자를 자임하는 군 출신 모임 향군의 정치 개입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향군은 200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촛불 시위 반대 집회’ ‘남북정상회담 반대 국민대회’ ‘종북 세력 규탄대회’ 등을 열었다. 최근에는 ‘NLL 포기한 국가 반역 세력 규탄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의 대화록 공개를 구국의 결단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지난 7월에는 다른 보수단체들과 함께 ‘반역자인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인정할 수 없다’며 시위를 벌였다. 8월 말에는 통합진보당(통진당) 당사 앞에서 향군 회원이 통진당의 당기를 입으로 물어뜯는 사진이 공개되기도 했다.

2007년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NLL 발언 규탄대회’에서 재향군인회 회원들이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역하면 자동으로 향군 회원 돼

향군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치 개입’이 아닌 ‘안보 수호’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보수 성향 정치 집회에 꾸준히 참가하는 등 그들의 행보가 정치적 색채를 띤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향군의 박세환 회장은 부회장 때인 2006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재협상을 공약하는 대선 후보를 지지한다고 발표해 향군법 위반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2008년에는 서울시교육감 후보 단일화 기자회견에 참가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질타를 받기도 했다. 올해 초에도 향군은 김병관 국방부장관 내정자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각 시·도 향군도 마찬가지다. 천안시 향군은 NLL과 관련해 종북 세력을 척결하자는 집회를 열었다. 5월24일 경기 수원의 ‘노무현 추모비’ 건립에 대해 경기도 향군이 강력히 반대한 일도 있다. 자살한 대통령의 비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대해 향군을 감독하는 주무 부처인 보훈처의 입장은 애매하다. 향군법을 볼 때 특정 정당을 확실하게 지지 또는 반대하는 내용이 아니라면 정치적 색채가 있더라도 제재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향군은 본디 전역한 군인들의 친목과 권익, 국가 발전과 사회 공익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정치 활동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한 향군법 제3조가 이를 뒷받침한다. 향군의 각급 회의 임원은 정당법에 따른 정당의 대표자·간부 및 회계 책임자가 될 수 없으며, 각급 회의 임원이 이를 위반할 경우 해임된다. 하지만 정치 활동의 의미가 명확하게 규정돼 있지 않을뿐더러, 정치 활동을 했을 때 제재할 구체적 조항이 없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특정 정파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도 정치 활동이 아니라 안보 활동이라 주장하면 그만이다.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향군의 정치적 중립 문제가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예비역·보충역·제2국민역은 향군법 제5조에 따라 자동으로 향군 회원이 된다. 회비를 납입하면 정회원이 된다. 제대한 군인들은 자기 의사에 관계없이 향군의 회원이 되고 탈퇴는 할 수 없다. 향군 지도부가 보수 성향의 각종 집회나 정치 사안에 대한 성명서에 850만 회원들을 대표한다는 표현을 쓰면서도 주요 의사 발표나 집회 참여 시 회원들의 의견을 구하는 절차가 전혀 없다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공군 병장으로 전역한 조 아무개씨(26)는 자신이 향군 회원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전역 군인들의 복지와 친목 도모를 위해 만들어진 단체가 모든 회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수적 활동을 하는 것은 잘못됐다”며 “이렇게 할 바에는 따로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비판했다.

한국전쟁 61주년 참전 유공자 위로연 행사장에 참석한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박세환 재향군인회장(오른쪽),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왼쪽)이 입장하고 있다. ⓒ 뉴스뱅크 이미지
미국은 의회가 승인한 향군 단체만 32개

2005년 ‘평화재향군인회’를 설립한 표명렬 전 대표는 친목과 애국, 전역 군인의 복지 등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단체로서의 향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과거 독재 정권 시절 군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향군이 그 태생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정권의 행동 대원 역할을 하고 있다”며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는 어떨까. 미국은 의회가 승인한 향군 단체가 32개나 된다. 향군성(우리나라의 국가보훈처)이 인정한 단체도 12개에 이른다. 의회 및 향군성의 정책 결정에 필요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보훈 관련 업무를 대행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70여 개의 소규모 향군 친목 단체들이 있다. 주로 전역 군인의 복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며 정치적 발언은 거의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훈처가 인정하는 재향군인회는 ‘향군’ 하나뿐이다. 평화재향군인회와 민주군인회가 설립됐지만 법적인 공식 단체로 인정받지 못했다. 2005년 재향군인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던 임종인 변호사는 “향군은 극히 소수의 회원이 활동하면서 자기들끼리만 이익을 누리고, 일부 극우파의 정치적 의사가 전체의 의사인 것처럼 호도한다”며 “모든 단체는 회원들의 의사를 반영해야 한다. 헌법상 집회·결사의 자유에 걸맞게 재향군인회 역시 여러 단체가 공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재향군인회’란 이름을 쓰는 평화재향군인회는 공식적인 성명서를 낼 때마다 ‘가칭’이라는 말을 넣지 않으면 안 되고, 초기에는 향군으로부터 소송을 당하는 등 견제를 심하게 받았다. 현재도 평화재향군인회 홈페이지는 해킹 등을 이유로 닫혀 있는 상태다.

향군 집행부 선거 방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김병관 전 국방부장관 후보자는 얼마 전 향군 회장 선거에서 낙선한 뒤 자신의 블로그에 ‘금권 선거 등 현실의 벽을 결국 뚫지 못했다’고 썼다가 청문회에서 질타를 받은 바 있다. 향군 시회장을 맡았던 김 아무개씨는 한국의 향군 회장을 장성 출신들이 독점하는 것은 선거 참여자의 비민주적인 선정 과정이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향군 중앙회장을 선출하는 총회는 회장, 부회장, 사무총장, 이사, 시·도 회장, 지회장 및 대의원으로 구성된다. 대의원은 회장이 이사회의 동의를 얻어 선출한다. 회장이 임명한 대의원들이 선거의 비중을 크게 차지하기 때문에 윗선의 입김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김 아무개씨는 “읍·면·동 등 작은 단위의 회장에게도 선거권을 준다든지, 회원들에게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 850만명의 대표자를 뽑는 일을 지분을 가진 몇몇 특정 인물이 주도하는 게 향군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