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보도로 부패 권력에 펜을 꽂다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3.10.23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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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독일·프랑스 시사주간지…탄탄한 콘텐츠로 독자 신뢰 얻어

미국처럼 잡지 저널리즘이 발달한 곳으로 손꼽히는 지역이 서유럽이다. 유럽의 매체 환경은 영미권과 다르다. 영미권의 뉴스 소비는 전통적으로 신문 위주였다. 잡지는 이를 보완하는 매체라는 인식이 강했다. 아무리 대중에게 사랑받는 시사 잡지라도 판매 부수 등을 고려할 때 주요 일간지의 영향력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반면 독일·프랑스 등 서유럽에서는 시사주간지가 여론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 매체로 군림해왔다.

유럽 각국을 대표하는 시사주간지의 판매 부수는 주요 일간지와 비슷하거나 이를 넘어선다. 2000년대 초반 한국언론진흥재단 프랑스 통신원으로 활동했던 박진우 건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기본적으로 뉴스를 소비하는 문화가 다르다. 유럽 시민은 시간을 두고 볼 수 있는 매체를 선호한다. 잡지가 여타 매체에 비해 우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2010년 위키리크스 문건을 탐사보도한 독일 이 가판대에 놓여 있다. ⓒ AP 연합
탐사 저널리즘으로 독자 지키는 <슈피겔>

사실 심층보도·기획보도 등 시사주간지의 강점이라 할 만한 콘텐츠 형식이 탄생한 데는 <타임> <뉴스위크> 같은 미국의 ‘원조’ 시사주간지가 큰 역할을 했다. 자유롭고 분석적인 문체로 특정 사안을 해부하고 설명하는 시사주간지의 보도 방식은 신문의 기사 스타일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특히 매카시즘 열풍, 쿠바 미사일 위기, 베트남 전쟁 등 미국 사회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시사주간지의 특집 기사는 미국 국민의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시사주간지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유럽의 시사주간지는 점차 각 매체 고유의 특성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각 나라를 대표하는 일간지와 비슷한 수준, 또는 그 이상으로 시사주간지의 명성이 높아졌다. 미국 대표 시사주간지들의 위상이 예전만 못한 것과 달리, 유럽을 대표하는 시사주간지들은 각 나라 국민으로부터 폭넓게 사랑받고 있다.

인쇄 매체의 전반적인 침체 기조는 유럽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문이든 잡지든 과거에 비해 판매 부수가 적게는 수만, 많게는 수십만씩 줄어드는 상황이다. 박 교수는 “지금 유럽에서도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디지털 드라이브’가 상당하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사회 영향력 면에서 시사주간지의 위상은 꺾이지 않는다. 주간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차별화된 콘텐츠로 여전히 독자를 사로잡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올린 신뢰감도 한몫한다. 독일과 프랑스의 시사주간지는 신문·방송 같은 여타 매체와 차별화된 콘텐츠를 제공함으로써 대중에게 확실히 존재감을 각인시켜왔다. 잡지 저널리즘은 유럽 미디어 환경의 전통으로 뿌리내렸다. 디지털 혁명이라는 ‘외풍’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이유다. 든든한 독자층의 지원을 바탕으로 콘텐츠의 질을 끌어올리는 선순환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을 대표하는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치열한 탐사보도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국가와 사회조직의 권력 남용과 은폐된 비리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으로 정평이 났다. 읽기 쉬운 대중 친화적 연성 기사보다 심도 깊은 경성 기사에 비중을 둔다. 그럼에도 80만 가까운 독자가 여전히 <슈피겔>을 읽는다. ‘<슈피겔> 독자는 더 많이 안다’는 말이 있듯, 깊이 있고 무게감 있는 폭로 저널리즘이 독자에게 확고한 믿음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슈피겔>의 탐사보도 전통이 주목을 끄는 이유가 있다. 전문가들은 탐사보도야말로 시사주간지의 콘텐츠가 신문이나 방송과 차별화될 수 있는 가장 큰 강점이라고 말한다.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시사 잡지는 취재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다는 점에서, 일간 신문이 다루기 어려운 심층 취재와 기획물에 강점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인터넷 미디어의 등장으로 속보 경쟁이 갈수록 무의미해지는 상황에서, 탐사보도에 기반을 둔 주간지의 심층성이 오히려 독자에게 각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12년 올랑드 대통령 당선 당시 프랑스 시사주간지 광고판. ⓒ AP 연합
한국 저널리즘의 ‘질적 향상’ 이끌어야

그러나 심층성은 더 이상 시사주간지의 전유물이 아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다루는 아이템도 점차 ‘잡지화’하고 있다. 정보의 단순 전달 기능을 인터넷 미디어가 대폭 담당하면서 생긴 변화다. 일간지 지면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취재한 심층 기획 기사를 보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주말판’ 등 잡지 형식으로 제작하는 지면도 늘어나고 있다. 주간지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본연의 제작 환경이 가진 강점을 살려 훌륭한 탐사보도 기사를 자주 선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슈피겔>은 탄탄한 제작 환경으로 유명하다. 취재와 편집에만 200여 명이 투입된다. 제작 인력 외에도 기록물 관리 담당, 기사 검증 전문가가 각각 수십 명씩 근무한다. 웬만한 한국 종합일간지 수준의 인력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아이템을 취재하고, 그 결과물을 정밀 검증할 수 있는 여건을 갖췄다. 고정 독자층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얻기에 가능한 일이다.

<슈피겔>만이 아니다. <슈피겔>과 함께 독일의 3대 시사주간지로 꼽히는 <슈테른> <포쿠스>도 취재·편집 인력이 150명 안팎이다. 두 잡지는 탐사보도보다는 현안의 충실한 전달에 치중한다. 시장이 다변화돼 있다는 뜻이다. 독일의 독자들은 전략과 장점이 서로 다른 시사주간지 중 입맛에 맞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셈이다.

프랑스의 대표 시사주간지 역시 독자 충성도가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렉스프레스>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르 푸앙> <마리안> 등은 여전히 30만부 안팎의 판매 부수를 자랑한다. 박진우 교수는 그에 대해 지적인 자극을 줄 수 있는 고급화된 콘텐츠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각 매체가 명망이 높은 저널리스트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점, 정치적 지향성이 명확하다는 점, 지면의 고급화·전문화 전략 등이 충성도 높은 ‘고급 독자’를 확보한 요인으로 꼽힌다.

물론 잡지 저널리즘이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온 유럽권의 사례를 곧바로 한국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뉴스 소비문화, 각 사회의 지적 풍토 등 미디어 수용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영세성, 재정적 불안에 시달리는 한국 시사주간지의 현실은 유럽 매체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는 시사주간지의 ‘미래’를 위해서는 유럽을 참고해 잡지 저널리즘의 본질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박상건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는 “유독 인쇄 매체 위기, 영세성만 강조하지 말고 잡지 본연의 기능과 콘텐츠 강화에 힘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좋은 콘텐츠를 바탕으로 독자의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켜 ‘신뢰’를 얻는 데 시사주간지의 활로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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