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
  • 일본 가고시마=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3.11.05 13:2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에서 15대째 조선 도자 혼 잇는 심수관 일가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 현은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다. 메이지유신과 정한론(征韓論), 일본의 산업혁명, 19세기 유럽을 제패한 사쓰마 도자기가 이곳에서 싹텄다. 사쓰마 도자기가 가능했던 것은 정유재란 때 끌려간 우리 도공이 가고시마에 정착하면서 만들어낸 조선 도자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고시마 미야마에 정착한 심수관 일가는 15대에 걸쳐서 한국 이름 ‘심수관’을 지키며 가업을 잇고 있다.

젊은 시절 가업 잇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15대 심수관(55)은 지금 공방에서 작업에 바쁘다. 지난 10월27일 일본 현지에서 기자와 만난 그에게 미술학자 유홍준 교수의 베스트셀러 시리즈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 편 1 ‘빛은 한반도로부터’에서 다뤄진 심수관가(家)의 이야기를 보여주자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가고시마의 조선 도공은 심수관만이 아니다. 1597년 남원성 전투에서 포로가 돼 왜군에 끌려간 조선의 도공은 심당길(심수관의 선조)과 박평의 등 17성(姓) 80여 명이라고 전해진다. 이 중 가고시마에 살아서 도착한 이는 43명.

심당길과 박평의는 가고시마에 정착한 조선 도공의 대표 주자다. 심당길은 이름을 지키며 대대로 도공으로 살았고, 박평의의 12대 후손 박수승은 도고(東鄕)라는 일본 성씨를 사서 일본 사회에 완전히 편입되는 길을 걸었다. 박수승의 아들 박무덕이 바로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외무대신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다.

ⓒ 시사저널 김진령
심평길 12대손 심수관부터 습명(襲名)

심수관이라는 이름은 심평길의 12대 손인 심수관부터 이어받고 있는 이름(습명; 襲名)이다. 왜 12대부터 습명이 이뤄졌을까. 바로 그때부터 개인 가마를 열고 장인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심수관가는 일본에 끌려온 이래 가고시마 지역을 통치하던 시마즈 번주의 후원을 받아 직영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웠다. 조선 도공은 시마즈 가문의 영광을 과시하는 왕관의 보석이었다. 하지만 메이지유신으로 중앙집권제가 실시되면서 1871년 번이 없어졌다. 사족 대접을 받던 조선 도공은 평민으로 전락했다.

조선 도공은 이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12대 심수관은 개인 가마를 열고 도공의 길을 택했고, 박평의의 12대 후손인 박수승은 도고라는 족보를 사들인 후 1885년 박평의 기념비를 세우며 조상에게 고한 뒤 일본인의 길을 갔다.

15대 심수관도 박평의가와의 인연을 기억하고 있었다. “12대 심수관과 박수승이 함께 활동했다. 13대 심수관도 교토 대학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도공 이외에) 한국 이름으로는 일본에서 활동하기 힘들었다”고 전했다. 박평의 13대 후손인 박무덕이 도고 시게노리라는 이름으로 도쿄 대학에 진학하고 일본국의 외교관이 됐지만 13대 심수관은 대학 졸업 후 도공의 길을 걸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15대까지 이어져온 지금 박평의가의 후예는 일본의 외교 명문가가 됐고 심수관가는 도자기 명문가로서 한일 양국에서 이름이 높다.

사실 심수관가도 14대 때 완전히 일본에 귀화했다. 일본 성씨로 개명한 것. 15대 심수관의 법적인 이름은 오사쿠 카즈테루(大迫一輝)다. 하지만 그는 “오사쿠란 이름은 서류상에만 있는 이름이다. 면허증이나 여권에 있는 이름일 뿐이다. 실제 생활에는 쓰지 않는다. 전시회를 하거나 작품 발표, 실생활에서는 심수관(진주칸)이란 이름을 쓴다”고 말했다.

“16대 심수관은 도자기 공부 중인 큰아들”

심수관 공방이 자리 잡은 미야마의 도자 마을은 사실상 조선 도공 후예들의 마을이기도 하다. 심수관은 “120년 전 이곳으로 옮겼는데 여긴 분지라 물도 없어서 우물을 파 쓰고 흙도 한 시간 반 떨어진 곳에서 가져온다. 그때는 이동의 자유가 없었다”며 과거 조선인 도공이 모여 살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설명했다.

대대로 가업을 잇는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떠할까. 와세다 대학 역사학과를 나온 그는 청년 시절 가업을 잇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누구든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특히 젊었을 때는….”

하지만 그는 결국 도공의 길을 선택했다. 이탈리아와 한국의 여주에서 도자 일을 배웠다. 그는 외국 유학에 대해 “기술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없다”며 자신이 사쓰마 도자기 전통 속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다만 “외국에서 생활했다는 것 자체가 아이디어를 얻고 흐름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아버지에게 혼나면서 배웠느냐’는 물음에 “일본에서는 남의 밥솥 밥을 먹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남한테 배우라는 말이다. 부모 형제는 사제지간이 되기 힘들다”고 밝혔다. 그의 부친인 14대 심수관(88)은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를 나와 도공이 됐다. 14대 심수관은 현업에서 은퇴했지만 수시로 공방에 나와 아들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 특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시대는 많이 변했지만 전통적인 것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현재의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하고 싶다. 한국은 고려청자, 조선백자 식으로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그것은 과거의 부정이기도 하고 미래의 상상이기도 하다. 일본은 그런 게 안 된다. 일본인은 만들고 버리지를 못한다. ‘(이 작업은 완성했으니까) 이제 끝이야’ 하는 그런 게 안 된다. 대신 일본은 지역에 따라 도자기가 변한다. 내가 원하고 갈구하는 것은 사쓰마 도자기다. 현재의 로컬 문화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지키고 보존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있다.”

일본의 도자기 명문가는 대개 400년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모두 한국에서 끌려온 도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심수관가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400년 넘는 기간 동안 한 번도 아들이 끊긴 적이 없다. 15대 심수관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고 있다. 큰아들은 22세, 둘째는 20세인데 둘 다 교토에서 도자기를 공부하고 있다. 16대 심수관은 누가 하게 되는 것일까. 그는 “아무래도 큰아들이…”라며 웃었다.

400년 넘게 한국 땅을 떠나 살면서도 조상을 기리고 가업을 잇는 심수관가는 이제 16대를 준비하고 있다. 그들은 행정 절차상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항상 ‘심수관’이다.


센강에서 바라본 사쿠라지마 분화 장면. ⓒ 시사저널 김진령
한일 양국의 국민은 서로 신기해한다. 일본에서는 북한 미사일 위기가 터질 때, 한국에서는 일본 열도의 지진이나 화산 분화 뉴스가 나올 때, 서로 “저런 데서 어떻게 저리 태평하게 사느냐”고 입을 모은다.

가고시마는 올 초에도 사쿠라지마(櫻島) 화산의 분화로 인해 국내에서 큰 뉴스가 됐다. ‘일본 열도 침몰하나’라는 부제와 함께. 하지만 가고시마에서 연기를 내뿜는 사쿠라지마는 일종의 관광 랜드마크다. 하루에 평균 세 번 이상 터지는 사쿠라지마 화산이 잘 보이는 바닷가 벤치에서 분화를 기다리는 관광객이나 분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일본인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가고시마에서 서울까지는 대략 700km, 도쿄까지는 900km. 고구마나 보리로 만든 소주가 유명하고 골퍼들에겐 한국과 비슷한 비용으로 겨울에 골프를 즐길 수 있는 골프 천국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찾는 사람이 늘어나 대한항공은 최근 주 3회 취항에서 매일 직항으로 운항 편수를 늘렸다. (가고시마 관광 정보 www.jroute.or.kr)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