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파 던지는 폭로자 난감한 메르켈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3.11.20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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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든 독일 망명 추진설 미국, “정보 직접 제공하겠다”며 저지에 안간힘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지난 10여 년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도청한 사실이 드러난 후 독일은 고민에 빠졌다.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감수하고서라도 고통스러운 진실을 직면할 것인가, 아니면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 무지(無知)를 택할 것인가, 선택의 순간이 왔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는 지난 10월 말부터 미국에 꾸준히 항의했다. 도청 사실이 알려진 10월24일에는 존 B. 에머슨 미국 대사를 불러들여 강력한 외교적 항의 제스처를 취했고 지난 2주간 두 차례나 독일 안보 당국의 고위 당직자를 미국으로 보내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향후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미국 역시 요란한 사과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해야 했다. 존 캐리 미국 외무장관은 11월7일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독일은 미국의 최우방국 중 하나이며 나는 독일을 사랑한다”고 립 서비스를 했고, 이튿날인 8일에는 크리스 머피 미 상원 유럽위원장과 상원의원들이 11월 내에 메르켈 총리를 직접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사과만 할 뿐이다. 근본적인 해결은 ‘모르쇠’로 버틴다.

키스 알렉산더 NSA 국장과 존 O. 브래넌 미국 중앙정보국(CIA)장이 게르하르트 쉰들러 독일 연방정보국장과 한스-게오르크 마센 연방헌법보호청장과 만났다. 독일 측은 ‘노 스파이(No-Spy) 협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했지만, 미국 측은 거절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미국이 더 대단한 것은 ‘상대국 정상에 대한 첩보 활동 중단’ 조항을 거부한 점이다.

미국 NSA의 불법 사찰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 전 NSA 직원(왼쪽. ⓒ AP 연합)과 NSA 사찰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오른쪽. ⓒ REUTERS).
독일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첩보’라는 혜택

미국의 미온적 태도는 독일 내 반미 감정으로 연결되고 있다. 11월7일 독일 공영방송인 ARD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독일인 중 35%만이 미국을 ‘신뢰할 만한 동반자’로 여겼다. 오바마 정치에 대한 만족도는 1년 전에 비해 32%나 낮아진 43%에 그쳤다. 반대로 응답자의 60%는 NSA의 불법 사찰을 폭로한 전 NS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을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스노든의 독일 망명은 독일이 쥔 ‘꽃놀이패’다. 독일과 미국 간 파워게임의 흐름을 단번에 역전시킬 카드로 기대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실제로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 10월31일 독일 녹색당의 원로 의원인 한스-크리스티안 슈트뢰벨레가 모스크바로 날아가 스노든을 직접 만났다. 스노든이 정치인과 얼굴을 마주 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슈트뢰벨레는 회동 다음 날 기자회견을 열고 “스노든은 독일이나 독일에 상응하는 나라에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다면 (NSA의 메르켈 도청에 대해) 독일에서 진술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슈트뢰벨레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이었다. 기사의 중립성을 철칙으로 여기는 <슈피겔>은 11월4일 이례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다. “스노든은 현재 독일의 가장 용감한 동맹자”라며 “독일 정부는 스노든의 망명을 허락하라”고 촉구했다.

주변의 압박에도 도청 피해자인 독일 정부는 우군이 될 수 있는 스노든에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있다. 한스-페터 프리드리히 독일 내무장관은 미국에 사과를 요구하면서도 스노든에게 독일 망명을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표면상 이유는 미국이 범죄인 양도 신청을 해두었기 때문이다. 스노든이 독일에 올 경우 미국에 송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슈테펜 자이퍼트 총리실 대변인은 좀 더 직설적이었다. 그는 “독일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미국의 혜택을 받았으며 양국의 우호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슈테펜이 말한 ‘혜택’은 역설적이게도 첩보 활동이다.

통일 전 미국은 서독에 경제적 원조만 해준 게 아니었다. 지금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는 NSA의 첩보 활동도 포함돼 있었다. 그동안 독일 정보기관이 테러 활동을 막기 위해 NSA로부터 자료를 넘겨받아온 것이다. <슈피겔>은 독일의 한 고위 안보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독일에서는 지난 몇 년간 수차례 끔찍한 테러가 일어났을 것이다. 미국이 정보 공급을 끊을 경우 독일은 눈이 멀게 되고 만다”고 전했다.

스노든 최측근 은밀한 독일행

어이없게도 이번 도청 파문에서 드러난 것은 독일의 주권 국가로서의 약한 위상이다. 독일 정보 당국의 미국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더욱 그렇다. 이 때문에 독일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스노든과 접촉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스노든이 내건 신변 안전이 보장된 제3국행이라는 거래 조건에 맞지 않는다. 스노든이 아무 대가 없이 독일 정부와의 대화에 나설 가능성은 현재 제로에 가깝다.

그렇다면 스노든의 독일행은 이대로 ‘버린 카드’가 되는 것일까. 11월6일 저녁 내부 고발자 웹사이트인 위키릭스(Wikileaks)에 새로운 게시물이 하나 올라왔다. ‘사라 해리슨의 성명서’라는 제목이 붙은 이 글의 발신지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었다. 그녀는 지난 6월 홍콩에서 전 미국 국가안보국 직원인 에드워드 스노든과 합류한 이후 지난 5개월간 그와 동행했다. 해리슨은 성명서에서 “스노든은 (러시아의) 망명 비자가 만료될 때까지 향후 9개월간은 안전하다”며 스노든을 모스크바에 혼자 남겨두고 독일행을 결정한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스노든의 러시아 임시 비자 취득보다) 더 큰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해리슨이 말한 ‘더 큰 전투’란 스노든에게 망명처를 제공하도록 독일 정부를 설득하는 것을 뜻했다. 망명 준비 작업을 위해 해리슨이 독일행을 택한 것으로 점쳐진다.

해리슨의 독일 입국 소식이 알려진 후 독일 정부는 별다른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독일 정부와 해리슨이 별도로 접촉한 정황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슈피겔>의 짐작처럼 ‘무력한 분노’를 혼자 삭이기로 결심한 것일까.

메르켈 총리의 정치 스타일은 논쟁이 마무리될 때까지 사태를 관망하다 다수의 지지를 얻는 쪽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관망할 수만은 없는 것이, 바로 메르켈 자신이 연루된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주특기인 ‘버티기’를 구사할 수 없다는 게 독일 정가의 중론이다. 알렉산더 미국 국가안보국장은 아예 “스노든이 유출시킨 독일에 관한 정보를 직접 독일 정부에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스노든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가치를 떨어뜨려 그를 고립시키고, 독일 정부와 ‘좋은 게 좋다’ 식의 합의를 꾀하는 전략이다. 스노든은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나의 폭로가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악몽이 현실이 될지는 메르켈과 독일 의회의 결정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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