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올해의 인물] 평양 움직이는 주석궁 안주인들
  • 이영종│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3.12.2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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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설주·김여정 ‘톡톡’ 튀는 행보…김정일 마지막 여자는 김옥

장성택 처형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북한은 12월17일 김정일 2주기 추모대회를 계기로 분위기 탈피를 시도하고 있지만, 충격파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자신의 최대 후견인으로 아버지 김정일이 낙점해준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한 김정은 북한 조선로동당 제1비서의 행보는 갈피를 잡기 어렵다. 사형 집행 이틀 만에 강원도 마식령 스키장을 방문한 그는 파안대소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하지만 17일 추모대회에 참석한 그는 굳을 대로 굳은 표정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부인 리설주와 함께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미라 형태로 보관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았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북한 조선중앙TV가 공개한 참배 당시 영상에서는 리설주가 김정은의 팔짱을 끼고 행사장에 들어선다.

그런 가운데 눈길을 끄는 건 고모 김경희의 행사 불참이다. 남편을 죽음까지 이르게 한 어린 조카 김정은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기 위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장성택은 김정일 집권 시기에도 몇 차례 혁명화 교육이란 이름으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정치 생명이 완전히 끊기거나 생명을 위협당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장성택은 ‘김일성 수령의 사위’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는 인물로 당 간부와 주민들에게 인식됐다. 이런 장성택을 어린 조카가 하루아침에 불귀의 객이 되도록 한 일을 김경희가 수용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다.

북한 김정은 조선로동당 제1비서와 부인 리설주가 12월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주기를 맞아 평양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 ⓒ 평양조선중앙통신
고영희·김옥 등 김정일 여인들 베일에 가려

젊은 시절 두 사람은 불꽃같은 러브스토리를 남겼다. 동갑내기에 같은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 장성택에게 반한 김경희는 결혼을 원했지만 김일성의 반대에 부닥쳤다. 김경희는 원산경제대 교수로 쫓겨난 장성택을 만나기 위해 벤츠 승용차를 몰고 달려가는 일이 잦았다. 결국 김일성은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혼을 허락했다. 하지만 장성택의 바람기와 술 때문에 김경희는 괴로워했고, 마약과 알코올 중독 등에 시달렸다. 별거설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2006년에는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딸 장금송이 자살하는 비운도 겪었다. 장금송만 살아 있었어도 김경희가 장성택의 죽음을 목숨을 걸고 막았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사실 평양 주석궁 로열패밀리 여인들은 오랜 기간 은둔을 강요받고 공개 석상에 나서지 못했다. 김경희도 그랬다. 1987년 당 경공업부장을 맡았지만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정일의 결혼 관계나 여성 편력은 서방 정보 당국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정혼했다고 하는 김영숙이란 인물은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다. 김정일의 첫 여자로 장남 김정남의 생모인 성혜림도 시아버지 김일성에게 인정받지 못하면서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못했다.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는 28년간 김정일과 살았다. 북송 재일교포 출신 무용수이던 열 살 연하의 그녀를 김정일은 말년까지 챙겼다. 유선암 치료를 위해 프랑스에 머무르던 그녀가 숨지자 특별기를 보내 운구했고 평양 대성산에 안장했다. 그런데도 아들 김정은이 최고 지도자로 등극한 이후에야 세상에 모습이 알려졌다. 그것도 당 간부들에게 제한적으로 공개된 기록영화를 통해서다.

김정일의 마지막 여인은 기술서기(비서) 출신 김옥이다. 김정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은이 3년 전 공식 후계자로 등장하면서 김옥과의 관계가 단연 주목받았다. 그녀 또한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녀에 대한 김정일의 각별한 사랑과 신뢰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접견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김정일은 2009년 8월16일 방북한 현 회장과 딸 정지이 현대U&I 전무를 묘향산 특각(별장)에서 만나 오찬을 함께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 40대 여성을 동반했다. 와인을 곁들인 점심을 함께한 김정일은 정 전무가 서울에서 챙겨 간 잠옷 선물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밴드 들어오라 그러라우”라고 지시한 후 동반 여성과 모두 11곡의 노래를 불렀다. 여기에는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 등 남한 노래 3곡도 포함됐다. 말하지 않았지만 현 회장은 김정일의 부인 역할을 한 이가 김옥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옥은 1990년대 초반 김정일의 눈에 들었다. 그의 여자가 된 이후 그녀의 모습은 북한 화보 등에서 지워졌다. 김정일은 마지막 중국행이 된 2011년 5월 베이징 방문 때 김옥과 동행했다. 전용 메르세데스벤츠의 퍼스트레이디가 앉는 자리에 김옥을 자리하도록 했다. 해외 언론의 관심은 그녀에게 집중됐다. 이를 두고, 몇 달 뒤 숨지게 될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김정일이 김옥에게 이런 기회를 줌으로써 평생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게 했던 미안함을 전한 것이란 얘기가 나왔다.

북한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말을 타는 모습. ⓒ 연합뉴스
김여정과 김설송의 향후 역할에 주목

이런 평양 주석궁의 오랜 금기가 깨진 건 김정은 집권 이후 부인 리설주의 등장을 통해서다. 그녀는 ‘평양판 신데렐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지난해 7월 김정은과 함께 놀이공원 개장식에 나온 그를 북한 매체들은 ‘부인 리설주 동지’로 호칭했다. 그 후로도 파격은 이어졌다. 함께 미키마우스가 등장하는 등 자본주의적 성격이 물씬 풍기는 공연을 관람했다. 김정은의 팔을 부여잡은 채 팝콘을 먹는 리설주는 이전의 북한 퍼스트레이디들과 달랐다. 샤넬풍 패션에 크리스챤 디올 클러치 백을 든 평양 안방 권력의 새 사모님을 두고 ‘청담동 며느리 패션’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은 지금 평양에서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가장 당당한 인물이다. 공개 석상에 잘 등장하지 않지만 정보 당국은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 그녀는 고모 김경희를 비롯한 로동당과 군부 간부들이 도열해 김정은을 맞이하는 상황에서도 거침없이 행사장을 누비고 다녔다. 김정은이 꽃다발을 받고 거수경례로 인사를 하는 대목에서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북한 TV에 포착되기도 했다. 그녀가 로동당의 과장급 직책을 맡아 김정은의 이미지 메이킹과 선전·선동 분야를 책임지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지난해 11월에는 김정은과 함께 말을 타는 장면이 공개됨으로써 같은 혈통임을 과시했다. 이 때문에 과거 김경희가 김정일을 챙겼듯이 김여정이 오빠 김정은을 지근거리에서 챙기는 최고 실세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김정일과 김영숙 사이에서 태어난 김설송의 역할도 주목된다. 김정일이 유언으로 장녀 김설송에게 힘을 실어주는 얘기를 했다거나, 장성택 처형 과정에서도 모종의 역할을 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로열패밀리에서 그녀의 역할이 제한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김정은과 이복 관계라는 점에서 견제의 대상일 뿐이란 얘기다.

장성택 처형 사태로 김정은 체제의 북한은 중대한 기로에 섰다. 공포 정치를 통해 권력 기반이 강화되느냐, 아니면 파워엘리트들의 반발과 민심 이반으로 균열이 촉발되느냐 하는 양 갈래 길이다. 위태롭게 권력의 칼자루를 거머쥔 최고 지도자 김정은의 곁에는 주석궁 로열패밀리의 여인들이 자리하고 있다. 요동치는 권력의 향배 속에서 그녀들이 어떤 운명을 맞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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