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블랙홀’ 틀어막았으나 국회에선 ‘응답하라 1987’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4.01.22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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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 최대 화두 떠오른 ‘개헌론’…다시 논쟁에 그치고 마나

올해 정계의 최대 화두는 개헌(改憲)이다. 6월 실시되는 전국 단위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그 강도와 진폭이 달라지겠으나 개헌 불씨는 간단없이 타오를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월6일 “개헌이란 것은 워낙 큰 이슈이기 때문에 한번 시작하면 블랙홀같이 다 빠져든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천명했지만, 여의도에서는 여전히 개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야당뿐 아니라 여당 내에서도 활발하게 거론된다.

‘개헌 전도사’를 자처하는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차치하고라도 ‘친박계’ 원로인 강창희 국회의장의 개헌 관련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강 의장은 대통령의 개헌 불가론이 나온 바로 다음 날인 7일 개헌 논의의 본격화를 공언했다. 강 의장은 “임기 내 헌법개정자문위원회를 구성해 국회의장으로 이상적인 안을 하나쯤 만들어 여야 합의하에 운영될 개헌특위에서 참고했으면 좋겠다”고 피력했다. 강 의장의 임기는 19대 국회 하반기 원 구성이 시작되는 오는 6월 초순까지다. 따라서 5월 말까지 의장 명의의 개헌안을 마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친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1월6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개헌 불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청와대 제공
친박 강창희 국회의장, 강력한 개헌 의지 비쳐

강 의장은 지난해 7월 제헌절 경축사에서 “개헌은 내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공론화해서 19대 국회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 옳다”고 단언한 바 있다. 박 대통령의 “개헌이 워낙 큰 이슈이기 때문에 블랙홀같이 빠져든다”는 발언에 대해서도 강 의장은 “그렇게까지 되겠느냐”고 반문하며 “다른 정치적 문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의 주장에 오히려 공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어디 이뿐인가. 국회에는 새누리당 56명, 민주당 59명, 정의당 1명 등 116명의 의원이 참여한 ‘개헌 추진 국회의원 모임’이 있고, 새누리당 중진 남경필 의원이 주도하는 ‘대한민국 국가모델 연구모임’은 개헌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개헌 논의는 이미 활성화돼 있다.

어쨌든 개헌은 한국 정치판의 주요 변수로 들어앉았다. 이를 잠재울 요인이라면 북한의 도발이나 북한 내 ‘급변 사태’ 정도일 것이다. 박 대통령이 ‘블랙홀’ 논리를 내세워 개헌 논의 불가를 역설하지만 좀 더 현실적인 이유는 레임덕 우려라고 보는 게 적확할 듯싶다. ‘차기(次期)’라는 말 그 자체가 현재의 권력을 희석시킬 것은 당연한 노릇이고, 때문에 대통령으로서는 양보하기 힘든 대상이다.

개헌은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헌법의 근본 규범을 파괴하지 않고 조항을 수정·삭제 또는 증보해 헌법의 내용을 변경하는 것이다. 시대와 상황의 산물인 헌법이기에 달라진 의식까지를 포함한 국가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개헌은 당연하다. 나라의 근간이기에 섣불리 손대는 것은 극구 경계할 일이지만 무작정 고수만도 능사는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특히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권력 구조’와 관련해 문제가 많다는 데 대다수가 공감한다. 당시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열망과 장기 집권에 대한 염증 치유에 골몰한 정치적 타협의 결과가 이른바 ‘1987년 체제’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다소 황당할 법한 ‘대통령 5년 단임제’도 그래서였다.

개헌에서 수정·삭제·증보 대상이 권력 구조 관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개헌 논의의 핵심이 권력 구조 개편임은 공지의 사실이고, 만약 논의가 본격화된다면 ‘4년 중임제’나 ‘이원집정부제’ 등이 집중 논의될 전망이다. 결국 문제는 개헌 논의에서 가장 결정적인 키를 쥐고 있는 현직 대통령이 난색을 표시하는 데 있다. 아무리 정치권과 국민의 개헌 공감대가 확산되더라도 대통령이 버틴다면 별 도리가 없는 셈이다. 물론 현직 대통령의 저항을 뿌리치고 개헌을 성사시킨 경험이 아예 없지는 않다. 이른바 ‘1987년 체제’가 그 증거물이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4·3 호헌’ 조치를 발동하며 ‘대통령 간선제’를 지키려 발버둥을 쳤으나 ‘6·10 항쟁’으로 대표되는 국민적 궐기에 굴복해야 했다.

대통령의 ‘개헌 불가’ 천명 바로 다음 날인 1월7일 강창희 국회의장은 연내 개헌안 마련 의지가 담긴 신년사를 발표했다. ⓒ 연합뉴스
양김 분열 예상하고 받은 1987년 직선제

여기서 주목할 대목이 있다. 여권이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했더라도 과연 직선제를 수용했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 여권은 야당의 ‘양김’(兩金), 즉 김영삼(YS)·김대중(DJ) 씨 모두 출마를 강행할 것으로 확신했고, 따라서 3자 구도라면 승산이 있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직선제를 받아들였고, 실제 노 후보는 양김의 분열에 힘입어 36.6%의 지지율만으로 당선됐다. YS(28%)와 DJ(27%)가 단일화했다면 어떤 결과가 됐을지는 자명하다. 국민의 승리로 평가받는 1987년 개헌이지만 냉정하게 곱씹을 대목이 있다. 5년 단임제의 문제점은 1987년 당시에도 분명히 거론됐다. 하지만 묵살됐다. 이유는 간단하다. 각 정치 주체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1990년 민주당 총재인 YS가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난을 무릅쓰며 감행한 민정·공화당과의 3당 합당의 고리는 내각제 개헌이었다. YS 자신이 토로했듯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3당 합당을 했다. 내각제는 받는 척만 한 것이다. 또 다른 야합으로 꼽히는 1997년 김대중·김종필의 이른바 DJP연합도 내각제 개헌이 연결 축이었다. 하지만 DJP연합으로 대통령의 꿈을 이룬 DJ가 내각제 개헌 합의서를 찢는 것은 당연했다. 자민련 김종필(JP) 총재와의 연합을 통해 ‘분홍 이미지’를 탈색하고 충청권의 지지를 확보해 대통령에 당선된 DJ가 합의서에 얽매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뒤통수를 맞은 JP가 당내 핵심 김용환·강창희(현 국회의장) 의원 등의 거센 반발 속에 정치 무대 전면에서 사라진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후 집권한 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의 개헌과 관련한 행보는 국민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레임덕으로 추동력을 상실한 임기 후반, 정국 반전 카드로 개헌론을 활용해보려 했으나 무위에 그쳤다. 정치적 저의를 의심받으며 야당은 물론, 여당 내 대선 후보군으로부터도 공박을 자초했다.

오늘날 제기되는 개헌을 둘러싼 논란도 다르지 않다. 본래 ‘5년 단임제’ 폐해를 줄이기 위한 개헌에 대해서는 정치권과 국민 대다수가 공감했다. 이처럼 폭넓은 지지가 이뤄진 것은 드물다는 평가를 낳고 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후보 시절 집권 후 개헌 논의 진행을 공언한 게 괜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집권 후 방향을 180도 선회했다. 그 논거는 개헌 논의로 인한 국력 낭비와 분산이다. 이른바 ‘블랙홀론’이고, 이것이 일부 호응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박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조기 레임덕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대충 이해가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 새누리당 핵심 친박계는 언제 개헌을 말했느냐는 듯 개헌 논의 불끄기에 바쁘다.

“개헌하자” “안 된다” 팽팽…정국 혼란 가중 우려

이래서 정계는 뒤숭숭하다. 결정적인 키를 쥐고 있는 대통령이 브레이크를 걸었으니 휘발성 강한 개헌 논의 자체가 순탄치 않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개헌 필요성이 여전히 세를 얻고 있는 데다 대통령의 힘이나 권위가 과거와는 다르다. 특히 대통령의 공약 이행을 앞세운 야당의 공세가 멈출 기색이 없다. 여당 내부에서도 개헌 지지파의 목소리는 그치질 않는다. 게다가 차기를 노리는 후보군들은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이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다. 이런 것들이 문제다. 1987년처럼 개헌 요구가 대통령의 반대를 압도할 정도라면 교통정리가 되겠으나 지금은 이도저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쪽도 상대를 주저앉힐 수 없다는 게 탈이다. 김병준 국민대 교수의 표현대로 ‘천박한 대의 정치와 경박한 SNS 정치’가 난무하는 판국에 개헌은 논의도 못 되는, 개헌 논의 여부를 둘러싼 원초적 논쟁만 지속되는 사태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권력욕으로 점철된 부끄러운 개헌 역사 


이제 시행 27년째로 접어드는 1987년 헌법 체제는 ‘9차 개헌’의 소산이다. 경제민주화 개념이 도입됐다는 등의 다른 요인을 굳이 거론치 않더라도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우리 헌정사를 얼룩지게 한 나머지 대부분의 개헌 과정은 떠올리기조차 끔찍하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2공화국 출범과 관련한 ‘3차 개헌’이나 1961년 5·16 쿠데타 후의 ‘5차 개헌’ 정도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대통령의 권력욕과 집권 세력의 사욕이 얽어낸 비극들이었다.

1952년의 ‘1차 개헌’은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으로 부산까지 피난 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벌어져 부산 정치 파동으로, 의원 발의 개헌안과 정부 제출 개헌안을 섞어찌개식으로 버무렸기에 발췌 개헌으로도 불리는 1차 개헌은 후진 정치의 온갖 악폐의 총합이었다. 국회에서의 간선으로는 재선이 어려움을 절감한 이 대통령 주변은 백골단 등 정체불명의 폭력 조직을 동원해 국회를 포위하는 등 폭력이 난무하도록 했고 이를 구실로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공포 분위기 속에 심야 국회를 열어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의원들을 버스에 실어 헌병사령부로 연행하는 폭거 등은 영화 속 장면처럼 믿기지 않을 정도다.

1954년 11월의 ‘2차 개헌’은 내용과 절차 모두 ‘위헌’이었기에 차라리 블랙 코미디로 치부하는 게 나을 듯하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 1인 종신 집권이 가능토록 개정하려는 궤변도 코미디지만,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어불성설의 논리를 펴 부결된 개헌안을 가결로 뒤집는 억지를 연출했다. 자유당 정권은 국회 표결 결과, 재적 203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로 개헌 정족수인 136표에 1표가 미달해 부결이 선언되었다. 그랬음에도 이틀 뒤 ‘국회의원 재적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인데 0.333…이라는 소수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의 인간이 될 수 없으므로 반올림하면 203명의 3분의 2는 135명이 된다는 황당한 주장으로 이틀 뒤 부결 선언을 번복하고 개헌안 가결을 선포했다. 권력에 한번 눈이 멀면 어느 정도까지 막장으로 치달을 수 있는가를 보여준 헌정사 치욕의 극치였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대한 반사적 결과로 내각제를 채택한 민주당 정부의 ‘3차 개헌’이나, 민주당 정부의 무능에 대한 반동으로 대통령 직선제로 회귀한 ‘5차 개헌’ 등은 권력 이동에 따른 결과였다. 시비 요소가 아주 없지는 않으나 그런 대로 납득이 되었다. 위헌 시비가 다분한 소급 입법을 가능케 한 ‘4차 개헌’은 논외로 하더라도 나머지 군부 집권 시대에 이뤄진 개헌들은 철저하게 권력자의 입맛에 맞춘, 권력 유지를 위한 방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3선 연임의 길을 트기 위해 여당 의원들까지 두들겨 패가며 밀어붙인 1969년의 ‘6차 개헌’, 박정희 대통령의 종신 집권을 위해 비상계엄으로 헌정 중단 사태를 빚게 만든 후 유신헌법을 통과시킨 1972년의 ‘7차 개헌’ 등은 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특히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임명하도록 하고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과 국회해산권을 부여하는 등 제왕적 대통령제를 도입한 유신 개헌은 고삐 풀린 권력이 어디까지 발호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줬다.

1979년 12·12 사태를 계기로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7년 단임 대통령 간선제’를 도입한 ‘8차 개헌’으로 집권을 이어갔다. 일부를 제외한 대개의 개헌들은 이처럼 권력욕을 뒷받침하는 수단·장식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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