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나라들의 횡포, "실업수당 챙길 생각 말고, 일만 하고 가라"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4.01.2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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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부자 나라들, ‘빈곤 이민자’ 복지 체제 편입 막으려 안간힘

영국과 독일이 새해부터 ‘문단속’에 나섰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국민에 대한 취업·이주 제한이 2014년 1월1일부터 풀렸기 때문이다. 취업·이주의 자유는 1957년 작성된 유럽공동체 결성 조약에도 포함된 원칙으로 유럽연합(EU)의 핵심을 이룬다. 이 원칙에 따르면, EU 시민은 제한 없이 다른 EU 국가에서 3개월까지 체류할 수 있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EU에 가입한 것은 지난 2007년. 그러나 EU에서 가장 가난한 이 두 나라는 가입 이후에도 EU 노동 시장의 대문 밖에서 서성여야 했다. 영국·독일·프랑스 등 9개 EU 국가가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저임금 노동력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올 것을 우려해 7년이라는 이주 제한 기간을 뒀기 때문이다.

유예 기간이 끝나 마지못해 문을 열어야 하는 EU 국가들의 표정은 밝지 못하다. 특히 영국과 독일의 보수 정치인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험악한 인상으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취업 이주민들을 맞이하고 있다. 혹여 취업을 핑계로 눌러앉아 복지 재원을 축내지나 않을까 의심의 눈초리부터 던지는 것이다.

EU 내 취업·이주 제한이 풀린 이튿날인 2014년 1월2일, 불가리아인들이 런던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모여 있다. ⓒ REUTERS
“복지 재원 축내지 마” 영국·독일의 경고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지난해 11월27일자 ‘파이낸셜타임즈’에 기고문을 실었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국민의 이주 제한이 풀리는 2014년 1월부터 이주민들의 사회복지 시스템 접근을 제한하고 취업 이주민의 체류를 더 엄격하게 관리하는 법안을 시행할 계획이다.’

캐머런 총리의 계획대로라면 이주민들은 처음 3개월간은 실업수당을 신청할 수 없다. 영국에서 구걸을 하거나 노숙을 할 경우에는 바로 본국으로 추방되고, 12개월간 재입국할 수 없다. 이 법안은 동유럽계의 취업 이민자를 겨냥하고 있다. 해당 국가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로젠 플레비네리에프 불가리아 대통령은 “영국이 고립과 공포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루마니아의 주간지인 ‘딜레마 베케(Dilema Veche)’는 “캐머런 정부가 경제 위기를 초래한 은행권을 국민의 세금으로 구제한 과실을 덮기 위해 엉뚱하게 외국인과 EU 때리기에 나섰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논란이 된 법안은 캐머런의 계획대로 1월1일부터 효력을 갖게 됐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진행 중이다. 특히 보수 성향의 기독사회민주연합(CSU, 이하 기사연)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 이른바 ‘빈곤 이민자’가 몰려올 것이라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 중이다. 벌써 이들 나라에서 온 빈민층이 뒤스부르크·도르트문트·베를린·노이쾰른 등 대도시에 슬럼을 형성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기사연이 구체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자녀수당과 실업수당이다. 현재 독일의 사회복지법에 따르면, 독일에 거주하는 EU 시민은 자녀 한 명당 매월 최소 184유로(약 27만원)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부모와 자녀가 떨어져 사는 경우다. 자녀가 고향에 있을 경우에도 독일 정부는 자녀수당을 지급한다. 독일 노동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3년 현재 8만5000여 명의 외국 노동자 자녀가 독일 밖에서 수당을 받고 있다. 한스 페터 울 기사연 의원은 ‘타게스슈피겔 암 존탁(Tagesspiegel am Sonntag)’과의 인터뷰에서 “외국에 사는 외국인 자녀수당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녀수당보다 더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하르츠 IV(Hartz IV)라 불리는 2급 실업수당이다. 실업자 및 저소득층에 지급되는 이 보조금은 그동안 독일 사회법전이 정한 대로 외국인에 대해서는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지급됐다. 그러나 ‘다른 EU 국가에서 일하는 모든 EU 시민은 해당 국가의 노동자와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는 EU법의 평등 조항으로 인해 혼란이 생겼다. 2012년 라이프치히에 거주하던 한 루마니아 여성은 자녀수당과 생활보조금에 이어 2급 실업수당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하자 소송을 냈다. 니더작센 주 사회재판부는 그가 일을 하지 않았고 구직 활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업수당을 받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사회재판부는 2013년 비슷한 소송을 낸 다른 루마니아 가족에게 승소 판결을 내려 혼란을 야기했다. 현재 독일은 유럽 사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기사연은 이러한 혼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이주민들이 독일의 사회복지 체제에 무임승차하려 한다고 부채질 중이다. 급기야 지난해 말에는 영국과 같이 취업 이주민에 대한 복지 혜택을 축소할 것을 결의하며 ‘속이면 쫓겨난다’는 자극적인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베른트 릭싱어 좌파당 총재는 “속이면 쫓겨난다는 구호는 (극우 나치당인) 독일 민족민주당(NPD)에서나 나올 법하다”며 기사연이 외국인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방선거 득표 위해 ‘반외국인’ 감정 부추겨

보수 정치권의 ‘동유럽 때리기’가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독일 노동부 산하 ‘노동시장과 직업연구소(IAB)’의 자료에 따르면, 독일에 사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인 중 실업수당을 받는 사람의 비율은 10%로 독일인(7.5%)보다는 높았지만 전체 외국인 집단(16.2%)에 비하면 현저히 낮다. 돈으로 따지면 전체 실업수당의 0.64%에 불과하다. 자녀수당을 받는 루마니아·불가리아인의 비율은 8.8%로 전체 외국인(15%)은 물론 독일인(10.8%)보다도 낮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이주민들이 복지 재원을 축낸다는 주장은 사실보다 상당히 부풀려졌음이 실증된 셈이다.

그럼에도 기사연이 반(反)외국인 캠페인을 벌이는 배경에는 3월 지방선거가 있다. 유독 지역색과 애향심이 강한 바이에른에서는 반EU 및 반외국인 감정이 표심을 여는 핵심 열쇠가 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치러진 총선에서 “독일 아우토반을 이용하는 외국인에게만 요금을 부과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기사연이 압승을 거뒀다.

EU도 취업·이주 제한 이후 빚어지는 유럽의 혼란을 진정시키려고 나선 상태다. 라슬로 앤도 유럽위원회 노동감독관은 “일부 EU 국가에서 이주 문제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그릇된 방향으로 논의되고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취업 이주 문제가 지닌 넓은 스펙트럼은 무시하고 오로지 ‘밥그릇’ 싸움에만 몰두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사라 방엔크네히트 독일 좌파당 부총재는 한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독일 기업들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출신 이주 노동자들을 헐값에 부리고 있다. 기사연은 이들이 보조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오히려 이들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국과 독일 정치인들이 자국에 들어오는 사람들로 생기는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동안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IT, 의료, 보건 서비스 분야의 우수한 인재들이 전부 외국으로 빠져나가면서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캐머런 총리의 기고문이 실린 직후 불가리아의 일간 신문인 ‘두마(Duma)’는 부강한 유럽 국가들을 향해 쓴소리를 날렸다. “우리가 2등 국민이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 왜 우리를 2류 취급하는가? (우리가 2등 국민이라면) 우리 사회의 알짜배기인 고급 인력들을 데려갈 때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

영국과 독일에서 벌어진 유럽의 취업 이주 자유 논란의 본질을 정리하자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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