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자신만만한 사기꾼이 되다
  • 이은선│매거진M 기자 ()
  • 승인 2014.02.18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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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허슬> 주연 크리스천 베일

오는 3월2일 미국에서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다. 비록 권위가 예전 같지 않다는 비판도 있지만, 여전히 전 세계 영화 팬의 눈과 귀가 집중되는 시상식임에 틀림없다. 올해 시상식 최고의 화제작은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아메리칸 허슬>이다.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남녀 주·조연상, 각본상 등 10개 부문 후보에 오르면서 시상식을 달굴 뜨거운 감자로 일찌감치 떠올랐다.

<아메리칸 허슬>은 천재적인 사기꾼 어빙(크리스천 베일·위 사진 오른쪽)과 매력적인 여인 시드니(에이미 애덤스)에 관한 이야기다.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연인이 되고, 그들이 사기로 일군 사업은 번창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복은 야심찬 FBI 요원 리치(브래들리 쿠퍼)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한다.

ⓒ 누리 픽쳐스 제공
리치는 정상 참작을 무기로 어빙과 시드니 커플에게 부패 정치인들을 체포하기 위한 함정 수사에 가담하길 강요한다. 여기에 어빙의 통제 불가능한 아내 로잘린(제니퍼 로렌스)까지 가세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꼬인다.

내용은 심상치 않지만 결코 심각한 영화는 아니다. 경쾌한 리듬의 범죄 사기극을 상상하면 이해가 빠르다. <아메리칸 허슬>의 탁월한 유머 감각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 등장하는 자막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임’. 1970년대 미국의 공기를 그대로 소환한 듯한 이 영화는 당시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FBI와 사기꾼의 합동 함정 수사인 ‘앱스캠 스캔들’을 바탕으로 한다.

경쾌한 리듬의 범죄 사기극

감독은 사건 자체를 충실히 재현하기보다 그에 휘말린 인간 군상의 면면을 파헤치는 데 집중한 듯이 보인다. 그 과정에서 욕망·야심·의심·애정·질투·후회·연민 등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온갖 감정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진다. 극장에 ‘사기극’을 보러 갔다가 ‘인간’을 보고 감탄하며 나오게 되는 형국이다.

연출도 훌륭하지만 이 영화를 탁월하게 완성한 공은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은 배우들에게 돌려야 한다. 확실히 즉각적으로 시선을 빼앗는 이는 시드니와 로잘린을 연기하는 두 여배우, 에이미 애덤스와 제니퍼 로렌스다. 두 배우는 이미 ‘아카데미의 전초전’이라 불리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각각 뮤지컬-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아메리칸 허슬>에서 가장 중요한 배우는 어빙을 연기한 크리스천 베일이다. 그가 극의 중심을 잡지 않았다면, 영화는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의 신경질적이고 기 센 연기 대결로만 끝났을지 모른다.

어빙은 두 여자 그리고 자기가 벌인 판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가련한 인물이다. 쿨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의 사기꾼으로 등장했지만 숱한 굴욕 앞에서 지질해지는 이 안쓰러운 남자는 사기극이자 러브스토리이고, 동시에 인간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심리 드라마라는 복잡한 극의 구성을 하나로 촘촘하게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국내에서 크리스천 베일은 고담 시를 수호하는 어둠의 기사로 더 유명한 배우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배트맨 3부작 <배트맨 비긴즈>(2005년), <다크 나이트>(2008년),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년)에서 배트맨을 연기했던 배우가 그다. 혹시 이번 영화에서도 그에게서 예의 그 날렵하고 우수 어린 모습을 기대한다면, 벼락 맞은 듯 놀라게 될 것이다.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은 크리스천 베일의 외모를 철저하게 망가뜨리는 데서 쾌감을 얻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 두 사람이 연출가와 배우로 만났던 전작 <파이터>(2010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에서 크리스천 베일은 앙상한 몸에 퀭한 눈을 하고 등장했다. 한때는 최고의 복서였지만 결국 마약 중독자의 비루한 삶을 사는 남자. 그의 온몸에는 고단한 일상을 견디는 실패자의 무거운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 영화는 2011년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트로피를 크리스천 베일의 품에 안긴 작품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 첫 아카데미 트로피였다.

베일의 충격적인 변신

<아메리칸 허슬>에서 베일의 변신은 더욱 충격적이다. 영화의 첫 장면. 맹꽁이배에 펑퍼짐한 몸매를 가진 남자가 추레한 대머리를 감추느라 거울 앞에서 신중히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카메라가 얼마간 집요하게 추적하는 이 과정은 성스러운 의식처럼 보일 정도다. 이 남자가 바로 영화의 주인공 어빙, 즉 크리스천 베일이다. 베일은 어빙을 연기하기 위해 체중을 20kg이나 불렸다. 가히 충격적인 모습이다. 극 중 전설적인 마피아로 등장하는 로버트 드니로가 현장에서 크리스천 베일을 보고 감독에게 “저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원래부터 크리스천 베일은 연기를 위해 체중을 자유자재로 바꾸기로 유명한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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