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희·이은미·이소라 “진정한 팝의 세계 보여주마”
  • 김영대│대중음악 평론가 ()
  • 승인 2014.04.0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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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참 여성 보컬리스트들 신작…신세대 음악과 다른 성숙한 메시지 담아

그 옛날, 팝의 전성시대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사전에 정의돼 있지는 않지만 사람들에게 팝이란 무엇보다도 쉬운 음악이며 장소나 상황에 관계없는, 무엇보다도 ‘가수’의 음악으로 인지됐다. 1960년대에는 ‘이지 리스닝’으로 불리던 것이 1970년대에는 스탠더드 팝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 이후로 넘어와서는 성인 취향의 팝-발라드를 중심으로 조금은 보수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음악이 트렌드 위주의 신세대 댄스음악과 대비된, 어른들을 위한 고급스러운 대중음악이라는 뜻의 어덜트 컨템포러리(adult contemporary)라는 흐름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 미8군 출신의 최희준·패티김 등이 이끌던 스탠더드 보컬 팝, 1980~90년대에 전성기를 이끈 이문세·변진섭·신승훈 등 발라디어들의 음악을 비슷한 흐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는 어덜트 컨템포러리 계열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한 성인 가요의 흐름이 한국 대중음악에서 본격적으로 꽃을 피웠던 기억은 쉽게 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1990년대를 수놓은 발라드도 결국 랩·댄스 음악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는 청소년을 소구층으로 삼은 ‘젊은’ 음악이었다. 트로트나 가요무대 식의 레퍼토리를 빼고는 여전히 성인 취향의 대중음악이라는 것은 흘러간 라디오에서나 들을 수 있는 ‘흘러간 옛 노래’에 가까운 소극적 개념이 돼버린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왼쪽부터 이소라 이은미 이선희 ⓒ 연합뉴스·뉴시스
미묘한 변화의 기류가 감지된 것은 근 몇 년간의 8090 음악에 대한 복고, 더 직접적으로는 ‘나가수(<나는 가수다>)’를 비롯한 보컬리스트 중심의 음악·연예 프로그램 이후부터였다. <슈퍼스타K>류의 오디션 프로그램도 비슷한 맥락이지만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 같은 프로그램은 궁극적으로 ‘가수’라는 존재를 환기시키고 있다는 것이 그 본질이다. 박정현·이은미·이소라·임재범 등이 새삼 회자되며 명곡의 리메이크를 통해 가수라는 정체성을 근거로 ‘K팝’이 아닌 한국 ‘가요’로서의 맥을 확보해나가는 기회를 포착했던 것이다.

이런 흐름의 와중에 비슷한 시기에 새 앨범을 내놓고 활동을 예고한 고참 여성 보컬리스트 이선희와 이은미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과연 한국의 어덜트 컨템포러리는 가능한가’라는 문제의식을 새삼 갖게 된다. 아이돌이나 뮤지션이 아닌 고전적인 의미의 ‘가수’가 중심이 되는, 젊은 세대와 굳이 소통하지 않고도 또래의 관객과 독립된 시장을 근거로 그 나름의 자리매김이 가능한 트로트 이외의 ‘성인풍 팝’ 음악은 과연 가능할까 하는 점이다.

K팝·트로트와 다른 한국형 어덜트 컨템포러리

이선희의 최근 행보는 다분히 공격적이다. 1984년 강변가요제를 통해 가요계에 첫발을 디딘 그는 8090을 대표하는 10대 가수의 상징이었지만 정작 1990년대 이후로는 이렇다 할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선희가 가수로서 본격적인 부활의 기지개를 켤 수 있게 된 데는 2005년 영화 <왕의 남자>의 주제곡인 <인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이후 브라운관을 통해 다양한 활동을 보여줬다. 이를테면 <위대한 탄생>을 통해서는 젊은 세대의 음악에도 소통할 수 있는 보컬 멘토로서의 능력이, <불후의 명곡>에서는 여전히 절대적 기준에서도 정상의 위치를 뽐내고 있는 보컬리스트로서의 역량이 한껏 과시됐다. 이제 데뷔 30주년을 맞이해 의욕적으로 내놓은 15집 <Serendipity(뜻밖의 재미)>는 그 같은 행보의 연장선에서 단순히 오래 머무른 가수가 아닌 대표적인 디바로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고 싶은 욕심이 한껏 드러난다.

언뜻 연상된 건 지난해 가요계의 최대 화두 중 하나였던 조용필의 컴백이다. 다양한 장르의 신진 음악인을 두루 중용해 음악의 현대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는 이선희의 15집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하나 프로듀싱적인 측면에서 지난해 ‘가왕’의 앨범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이선희 자신이 앨범 프로듀싱을 넘어 대부분의 곡을 직접 쓰는 일견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욕심을 표출했다는 점이다. 곡마다 새로운 젊은 뮤지션에게 편곡을 맡긴 것은 현대성을 담보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예외적인 곡은 <그중에 그대를 만나>다. 아이유·가인 등 정상급 아이돌 가수의 감수성을 만들어낸 작사가 김이나가 가사를 쓰고 베테랑 박근태가 곡을 맡아 팝 발라드로서의 전형성을 담보했는데, 오히려 가장 복고적인 감성이 담긴 작품이다. <이뻐이뻐>는 평단에서 지난해 최고의 신인으로 지목된 바 있는 선우정아에 의해 재즈와 라틴이 결합된 감각적인 곡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너를 만나다>는 인디 프로젝트 밴드 에피톤 프로젝트(차세정)가 가사를 담당해 ‘때론 사라진다는 건 더 영원해져’ 같은 탁월한 표현이 이끄는 서정성이 돋보이는 곡이다. <거리구경>은 누구보다도 독특한 음악 세계를 가진 작곡가 고찬용이 편곡을 맡아 회고적이면서도 구슬픈 느낌의 집시풍 음악으로 독특하게 완성된 작품이다.

가수로서의 정체성을 관용적으로 구현하려는 노력이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곡은 작곡팀 이단옆차기가 프로듀싱한  <동네 한바퀴>다. 이선희의 미성과 비브라토를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절제시킨 서정미가 현대적인 감수성으로 와 닿는다. 보컬리스트로서는 물론이고 앨범 전반에 걸쳐 록·포크·발라드를 오가는 작곡가로서 이선희의 기량은 3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지 않게 새삼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과거 벗어던지고 현재형 음악으로 현역 복귀

최근 가요계에서 그 누구보다도 ‘가수’라는 명칭에 적확하게 들어맞는 인물은 바로 이은미일 것이다. 이선희와 유사하게 경연 프로그램(<나는 가수다>)과 오디션 프로그램(<위대한 탄생>)을 거치며 오히려 데뷔 초보다 대중적인 접속점을 넓혀놓은 상태다. 신촌블루스 출신으로 언더그라운드의 총아로 불리던 그였지만 이후로는 보컬 팝 분야에 줄곧 머무르며 한국형 어덜트 컨템포러리라는 카테고리에 가장 근접하게 포지셔닝하고 있는 가수 중 한 명이다.

<가슴이 뛴다>를 타이틀로 삼은 앨범 <스페로 스페레>는 그의 신작 EP로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라틴어가 의미하듯 성숙한 인생의 성찰이 담긴 어쿠스틱한 발라드들이 주된 지향점이다. <애인  있어요> <녹턴>을 통해 꾸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작곡가 윤일상과 또 한 번 호흡을 맞춘 것이 주목할 만한데, 전작이 팝 발라드의 전형이나 격정의 한계 지점을 다소 공식적으로 건드린 데 반해 <가슴이 뛴다>는 노랫말과 함께 멜로디가 차분히 감정을 쌓아가면서 가사의 핵심부를 작위적이지 않게 벅차게 훑어가는 것이 인상적이다. 느린 발라드라는 점에서는 전과 같지만 마치 이문세의 <옛사랑>이나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를 연상케 하는 아날로그적 성숙미가 연상되는 곡으로 이은미 개인에게도, 작곡가 윤일상의 경력에서도 ‘성장’의 한 지점으로 남을 것 같다.

며칠 전에는 기타를 앞세운 얼터너티브 사운드로 여덟 번째 앨범 <8>을 만들어낸  ‘뮤지션’ 이소라의 쇼케이스도 열렸다. 불과 몇 주를 사이에 두고 중견 여가수의 의욕작이 줄을 잇고 등장하는 형국이다. 고급스러운 만듦새와 성숙한 메시지를 의도한 이들의 음악이 각개약진을 넘어 하나의 무게감 있는 ‘흐름’으로 모아질 수 있을지가 새삼 궁금해지는 이유다.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이는 하나의 방향성으로 지켜봐야 할 일이다. 지난해 ‘왕의 귀환’을 알린 조용필에서 시작해 이선희, 이은미 그리고 이소라까지. 2014년은 한국형 어덜트 컨템포러리 무대의 새로운 상상력이 모색되는 시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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