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가 대형 공사 현장 접수했다”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4.04.2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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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범죄 조직, 독일로 넘어가 사업가로 위장해 활동

어슴푸레한 방 안, 한 사내가 혼자 체스판 앞에 앉아 있다. 그의 이름은 조반니 로시, 전직 청부살인업자다. 로는 ‘서독일방송(WDR)’ 카메라 앞에 서서 마피아 조직 ‘코사 노스트라’를 위해 지금까지 7명을 살해했다고 밝혔다. 1990년대 중반 이탈리아 경찰은 추격전을 벌인 끝에 그를 생포했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있던 친구는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징역 18년형을 선고받은 로는 조직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정보를 경찰에 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 경찰에 협력했다. 앞서 그를 배신했던 두목 역시 체포되었다. 출옥 후 로는 독일로 건너왔다. 보복을 피해 숨어 사는 삶에 지쳤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 형사청의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희망을 걸고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카메라 앞에서 털어놓았다. 마피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대신 독일 땅에서 새 출발을 약속받는 조건이었다.

2011년 7월12일 이탈리아 남부 도시 로크리 법정에서 부르노 머스콜로 판사가 독일 뒤스부르크에서 벌어진 이탈리아인 6명 무차별 총격 사건에 대한 판결문을 읽고 있다. ⓒ AP 연합
이탈리아에선 총, 독일에선 사업등록증

로의 얼굴과 목소리는 알아볼 수 없게 처리됐다. 이름 역시 가명이다. 말을 옮기는 그의 두툼한 손만이 조명 아래 드러났다. 그는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이 어떻게 외국에 뿌리를 내리는지를 체스에 비유해 설명했다. “‘졸’은 중요하지 않다. 처음에는 책사인 ‘여왕’과 ‘경호원’이 와서 정찰한다. 이 나라 정부가 어떻게 조직돼 있는지, 어떤 법이 있는지를 아주 자세히 관찰한다. 법망에 허점이 보이고 사업을 할 만하다고 판단되면 영업을 시작한다.”

지난 2007년 8월 독일 내에서 이탈리아 마피아 문제가 반짝 관심을 끈 적이 있었다. 당시 독일 뒤스부르크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경영하던 친인척 5명과 견습생 1명이 무차별 총격을 받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수사 과정에서 견습생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이 이탈리아 산 루카의 한 마피아 가문 출신으로 알려졌다. 이탈리아 경찰은 이 사건을 1991년 시작된 ‘산 루카 복수전’의 연장선에서 수사했다. 하지만 독일 시민들의 뇌리에서 이 사건은 곧 잊혀졌다. 어쩌다 벌어진 일로 치부된 탓이다. 

그러나 WDR과 ‘슈피겔 온라인’, 풍케 미디어그룹은 ‘독일 땅에 마피아는 없다’는 생각은 착각이며, 이탈리아 마피아는 이미 독일 사회 곳곳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고 경고한다. 지난 2년간 6000여 쪽의 문건을 분석하고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아 내린 결론이다. 유럽연합의 반(反)마피아 위원장인 소니아 알파노 역시 2012년 슈피겔 온라인과의 인터뷰에서 “2007년 뒤스부르크 사건 이후에도 독일 관청은 무사안일하게 대응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 마피아가 아무 제재 없이 독일에 정착하게 되었다. 독일은 세계 제2의 범죄 조직인 은드랑게타의 두 번째 고향”이라고 경고했다. 슈피겔 온라인은 적어도 1200명 이상의 마피아 조직원과 협조자가 독일에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로는 “1970년대부터 거물급 보스들이 독일로 넘어왔으며, 마피아 세력 간의 구역 나누기도 이미 끝났다”고 밝혔다. 알파노 위원장은 “독일인들이 무엇을 가장 경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무지”라고 답했다. 로 역시 “독일인들은 마피아가 어떻게 조직되고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독일엔 마피아가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마피아는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맞춰 변신한다”고 설명했다.

이탈리아 마피아는 독일에서 작지만 건실한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 위장한다. 우선 작은 식당이나 수입상·운송회사를 열어 지역 사정을 파악한 후 서류뿐인 건설 하청업체를 세운다. 이런 식으로 피자집 주인이 불과 1년 만에 연매출 수백만 유로의 수익을 올리는 하청업체 사장으로 둔갑하는 일이 빈번하다. 기술력 덕분이 아니다. 돈세탁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건설업체에 공사 금액을 청구한 후 10%의 수수료를 떼고 받은 돈을 다시 현금으로 되돌려주는 수법을 이용한다. 불법 노동자를 알선해 세금과 사회보장기금 탈루도 조장한다. 그 결과 국고에 들어가야 할 돈이 건설업체와 이탈리아 마피아의 뒷주머니로 들어가게 된다. 이탈리아 마피아가 독일에서 총 대신 사업자등록증을 손에 쥔 이유는 간단하다. 불법 마약 거래보다 경제사범에 대한 처벌이 경미하고, 들킬 위험도 작을뿐더러 훨씬 큰돈을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쾰른 경찰청은 건설 마피아 전담팀인 ‘스카보(Scavo)’를 설치했다. 스카보는 지난해 1월 시칠리아 경찰과 협력해 대규모 검거 작전을 펼쳤다. 마피아의 본산인 시칠리아에서는 6명이 검거된 반면, 독일에서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 주에서만 11명이 검거됐다. 스카보 팀장은 “독일의 대형 건축 현장은 이미 이탈리아 마피아 손에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강력한 법 없이는 마피아와 못 싸운다”

이탈리아에서는 1992년 마피아 소탕을 주도하던 팔레르모의 검사 파올로 보르셀리노와 조반니 팔코네가 살해된 일을 계기로 이른바 ‘반(反)마피아 법’이 제정됐다. 마피아 조직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입증되기만 하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처벌이 가능하고,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재산을 압류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전직 마피아인 로 역시 “이탈리아와 같이 공격적인 반마피아 법이 있어야만 마피아 조직에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조언했다.

2009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형사청은 이탈리아 경찰의 제보를 받고 한 조직의 ‘마피아 선서식’을 도청하는 데 성공했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지역을 담당하는 거물급 마피아라는 혐의를 받던 남자도 이 자리에 나타났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들이 독일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1년 후 이탈리아 검찰이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한 뒤에야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총 41명의 마피아 조직원을 검거했다. 이 중에는 15년째 수배 중이던 코사 노스트라의 서열 2위인 도메니코 라쿠길라도 포함돼 있다. 취재진에 라쿠길라의 사진을 들어 보여준 이탈리아 경찰관은 신변 보호를 위해 복면을 쓰고 있었다.

전직 마피아 조반니 로시와 인터뷰를 진행한 다비드 슈라벤은 취재 후기를 통해 “로에 대한 증인 보호 프로그램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독일 내 마피아 조직과 은신처 등의 정보를 제공했지만 이들이 살인 등 중죄를 저질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로는 이후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폭로자의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거운 침묵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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