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재벌’ 키우는 침묵의 카르텔 깨야
  • 여준민 형제복지원 대책위원회 사무국장 ()
  • 승인 2014.04.30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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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욕의 복지법인, 무책임한 지자체, 잘못된 국가 정책이 비리 키워

2012년 7월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자신을 부산 형제복지원 출신이라고 소개한 한종선씨는 <도가니>보다 극악했던 사건을 왜 모르며,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항의했다. 25년도 더 지난 일이라 당장 사건의 내막이나 실체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일단 알아보겠다고 답변을 한 후 전화를 끊고 인터넷에서 ‘형제복지원’을 검색했다.

부정과 비리, 인권침해가 벌어진 복지시설을 조사하고 거주인의 탈(脫)시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기 때문에 전국의 많은 시설을 다녀봤지만, 도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당시 기사들은 믿을 수 없는 내용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1987년 1월 3200여 명이라는 상상하기도 싫은 어마어마한 수의 시민이 무고하게 끌려가 강제 수용돼 있었고, 군대식 운영으로 폭력과 성폭행이 난무하는 가운데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사망자 수가 무려 513명이라니…. 이는 분명 단일 장소에서 벌어진 한국 사회 최대의 학살 사건이었다.

필자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현재 상황이었다. 원장이었던 박인근씨는 중차대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2년 6개월의 형만 살고 나왔다. 대법원이 감금을 인정하지 않아 이례적으로 7번의 재판이 진행됐지만 결국 횡령과 초지(草地)법·외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만 인정됐다. 그때 그 판결을 내린 사람이 박근혜 정권이 국무총리로 지명했던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이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가능했을까.

3월11일 국회 정론관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과 피해 생존자·실종자·유가족의 생활 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감옥에서도 황제처럼 지냈다”

당시 수사 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법무법인 한별 대표)의 말에 따르면 당시 심한 외압이 있었다고 한다. 횡령액이 11억원 이상이었는데 10억원 이상이면 무기징역도 가능해 그를 제대로 처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검찰 지휘부는 10억원 미만으로 마무리하라고 했다고 한다. 청와대에서도 전화가 왔고, 부산시장 또한 직접 전화해 “박 원장을 풀어주라”고까지 했단다. 김 변호사는 사진 한 장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박 원장이 구치소에 들어가 있을 때 무슨 수를 쓴 건지 시내에 있는 사우나를 가는 현장 사진이었다.

최근 한 지인이 박인근씨와 1989년 같은 감옥에 있었다고 말해 깜짝 놀랐다. 그동안 잊고 있다가 최근 형제복지원 사건이 다시 여론의 주목을 받자 떠올렸다며 “그는 감옥에서도 황제처럼 지냈다”고 회상했다. 전 방위적인 박인근 구명운동 혹은 수사 방해와 사건 은폐·왜곡 상황은 2013년 <삼성뎐>이란 책을 쓴 이용우 전 중앙일보 기자 또한 똑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취재 경험 중에서 특히 잊을 수 없는 이상한 사건이었다며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한 개인이 어떻게 이런 국가적 비호를 받을 수 있었는지 의아해했다.

하지만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박인근 원장이 1989년 출소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복지 재벌로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구속된 시점에서 3년이 지나면 다시 사회복지법인의 이사장이 될 수 있다는 사회복지사업법을 악용했다. 법인 이름을 재육원으로 바꾸고 다시 이사장이 된 것이다. 1987년 사건이 터진 후 ‘형제복지원’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라고 기대한 우리들은 너무 순진했다.

각종 공문과 이사회 회의록, 법인 등기부등본 등 자료를 수집해 형제복지원의 연혁을 파악해보니 단 한 번도 폐쇄 혹은 법인 설립 허가가 취소된 적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박인근 원장은 시설에 무슨 문제가 터질 때마다 법인 이름을 바꿔가며 자신의 배를 채웠다. 이사장과 이사 등록 또한 수시로 반복했고, 측근들로 이사진을 구성해 늘 법인을 지배했다.

박 원장은 최근 부산저축은행 불법 대출과 관련해 불구속 기소되고, 형제복지지원재단을 물려받은 아들 박천광씨도 2년 구형을 받아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부산 지역 사회복지 법인들은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기보다 시장과 시의회를 찾아다니며 박인근 구명운동을 펼쳤다. 사회복지법인들은 부정과 비리 앞에서도 서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자 한다. 서로가 공모자임을 보여준다. 최근 형제복지지원재단은 박인근 측근들로 새로운 이사진을 구성했고, 올 2월 법인 이름을 ‘느헤미야’로 바꿨다. 여전히 사회복지법인 사업에서 손을 놓지 않겠다는 표현이다.

형제복지원에 감금됐던 피해자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 김용원 변호사 제공
복지 법인이 한 개인 소유물로 전락

그렇다면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부산시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법인 이름을 바꾸거나 이사진을 구성하는 것은 법인의 자율·독립적 고유 권한이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회복지법인의 시설 운영비는 100% 국가가 지원한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적인 활동을 대신 하는 것이다.

2012년 부산시의 감사 결과에서도 드러났듯 박인근씨가 운영하는 법인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46명이 거주하는 중증 장애인 요양시설을 달랑 하나 운영할 뿐이며 법인 전입금은 한 푼도 없다. 수익 사업만을 위해 부산시의 허가도 받지 않고 112억원을 불법 대출받는 등 사리사욕 추구에 골몰했다.

사회복지법인이 한 개인의 소유물로 전락해 목적 사업을 수행하고 있지 않다면, 부산시는 설립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올바른 관리·감독이다. 하지만 왜 지금껏 침묵하며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일까. 2012년 감사에서 16명의 공무원이 연루돼 징계받은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형제복지원의 출발부터 살펴보자. 1960년 ‘육아원’으로 출발했는데 1975년 부산시가 무상 임대해준 주례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 부산시와 ‘부랑인 일시 보호 사업’ 계약을 체결했고, 그해 12월에는 ‘내무부 훈령 410호’가 공포돼 본격적으로 ‘부랑인’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형제복지원에 감금했다. 그리고 제식훈련과 구타, 강제 노역으로 어마어마한 건축물들을 지었고, 1977년 8600여 평에 달하는 토지를 1461만원에 부산시로부터 불하받았다. 그 후 도시 확장으로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자, 2001년 한 건설사에 223억7800만원에 되팔았다. 24년 후라지만 200억원이 넘는 시세 차익을 본 것이다.

그 후 정관을 변경해 목적 사업보다 수익 사업에 열을 올렸고 박인근씨는 전국부랑인복지시설협회 회장, 부산사회복지법인단체협의회 회장, 장학사업, 종교사업(불법적인 시설 내 교회 운영)을 하며 지역 유지로 행세했다. 1998년에는 당시 수사 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반성은커녕 명예회복을 하겠다며 2010년 자신의 회고록과 같은 <형제복지원, 이렇게 운영되었다>는 운영 자료집 14권을 제작하기도 했다. 책 속에서 그는 “박정희·전두환 정권, 부산시가 시킨 일을 한 것일 뿐”이라고 강변했다.

복지의 이름으로 배를 불리는 사회복지법인, 그리고 잘못된 운영을 눈감아주는 무책임한 지자체, 사회복지 실천을 늘 선한 의지로 생각하며 막연하게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여기는 일반 시민들의 잘못된 인식, 가난한 장애인과 노인은 수용 시설에 보내야 한다는 국가 정책. 이 모든 것이 현재 전국 곳곳에서 또 다른 형제복지원 사건을 낳고 있는 공모자들이다. 공고한 이 침묵의 카르텔을 끊고 인권과 공공성을 최우선에 둔 국가 정책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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