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믿겠다, 차라리 내가 응징하겠다”
  • 정덕현│대중문화 평론가 ()
  • 승인 2014.04.30 17:1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의 선물 14일> <쓰리데이즈> 등 부패한 공권력 투영

최근 종영한 SBS 드라마 <신의 선물 14일>은 유괴돼 시신으로 돌아온 딸 때문에 강물로 뛰어들지만 14일 전으로 타임워프되면서 이 비극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다룬다. 재미있는 점은 타임워프되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해 보였던 인물이 되돌아가서 보니 저마다 숨겨진 비밀이 있더라는 것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남편도, 옛 남자친구도, 회사 동료 또는 이웃까지도 심지어 범인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갖게 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남편과 옛 남자친구의 직업이다. 남편은 한때 인권변호사였지만 욕심에 눈이 멀어 딸마저 위험에 빠지게 만든다. 옛 남자친구는 강력계 형사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오점을 숨기기 위해 비리와 손을 잡는다. 스릴러 장르에서 흔히 쓰는 장치이긴 하지만 변호사와 형사가 이처럼 믿을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지는 것에 대해 이 드라마는 스스럼이 없다. 드라마 막바지에 이르면 대통령 또한 용의선상에 올라온다. 결국 대통령의 아들이 저지른 살인을 숨기기 위해 법무부장관과 영부인이 권력을 이용하면서 이 거대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게 밝혀진다.

의 손현주 ⓒ SBS 제공
<신의 선물 14일>은 지금 현재 드라마나 영화 같은 대중문화에 투영된 공권력의 자화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드라마의 끝없는 반전을 허용하는 건 사실상 현실에서도 그러하듯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불신 풍조다. 그리고 그 불신의 핵심은 공권력을 향해 간다. 결국 모든 사태가 잘못된 공권력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SBS 수목드라마 <쓰리데이즈>는 대통령의 한때 잘못된 선택이 문제를 만들어낸다. 남북 간의 긴장을 고조시켜 한반도에 무기를 팔려는 국제적인 무기상과의 거래에서 양진리 마을 주민이 남파된 군인에 의해 학살당한다. 그리고 이들은 또다시 제2의 양진리 사태를 계획한다. 그걸 대통령이 일부 측근과 막으려 하자 그들은 하나 둘 살해된다. 대통령마저 저격당한다. 심지어 대통령이라고 해도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현실, 실질적으로는 거대 외국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국내 경제 상황, 필요하다면 제2의 외환위기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본의 거대한 힘. 그 앞에서 공권력은 허망해진다.

<쓰리데이즈>의 주인공이 대통령을 경호하는 일개 경호원이라는 사실은 공권력의 최정상부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가를 잘 드러내준다. 대통령도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약화된 공권력, 이것이 <쓰리데이즈>가 보여주는 현실이다.

최근 시작한 KBS 수목드라마 <골든크로스>는 대한민국 경제를 주무르는 상위 0.001% 집단을 소재로 다룬다.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이 풍경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외국 자본이 몰려와 국내의 멀쩡한 기업까지 사냥했던 일을 연상케 한다. 멀쩡한 은행을 헐값에 팔아넘기기 위해 부실한 은행으로 저평가시키고 그 대가로 ‘골든크로스’의 고위층 인사는 수천억 원의 리베이트를 챙긴다. 국가 경제를 걱정해야 할 경제 관료가 지위를 이용해 사적인 부의 축적에 몰두한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돈이 정계와 경제계에 뿌려지고 이렇게 공범화된 공권력은 그들만을 위한 권력으로 전락한다.

(위)ⓒ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아래)ⓒ SBS 제공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불신 풍조

이 과정에서 몰락하는 건 서민이다. 힘없는 서민은 돈의 유혹에 못 견뎌 이들의 대리인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양심선언을 하려다 혼자 죄를 뒤집어쓰는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이렇게 외국 자본에 팔려나간 멀쩡한 기업은 무수히 많은 가계를 파탄 낸다. 졸지에 정리해고를 당한 직원은 부당함을 토로하며 거리로 나서지만 돌아오는 건 경찰의 방망이질뿐이다.

최근 일련의 드라마가 보여주는 공권력에 대한 반감은 이제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는 장르화의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정부와 싸우는 서민 영웅의 이야기는 이미 <추적자>에서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던 아이템이다. 정·재계의 거물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된 딸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백홍석(손현주)이라는 서민 형사는 권력과 손잡은 잘못된 공권력의 문제를 통쾌하게 만천하에 공개하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추적자> 이후 일련의 드라마가 부실한 공권력과 잘못된 권력의 문제를 서민과의 대결 구도로 만들어냈다는 것은 드라마에 투영된 현재 대중의 정서를 읽어낼 수 있는 대목이다.

드라마보다 영화는 더 일찍 공권력의 부조리를 단골 소재로 사용해왔다.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마 문제보다 더 심각한 건 무능한 공권력이다. 끝없는 추격 과정에서 공권력이 한 일이라고는 거의 없다. 대신 전직 형사였으나 지금은 건달처럼 살아가는 인물이 사건의 대부분을 해결해나간다. 심지어 경찰은 붙잡힌 연쇄살인마를 증거 불충분으로 풀어줌으로써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존재다. 대중의 차가운 현실 인식. 공권력은 믿을 수 없다. 결국 믿을 건 나 자신뿐.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서도 마찬가지다. 괴물의 탄생 과정 자체가 주한미군의 독극물 한강 방류에서 비롯된다. 거기에 대한 정부의 관리·감독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 이 영화가 주목하는 건 괴물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다. 정부는 시민을 보호하기보다는 이들을 격리하고 심지어 조사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자행한다. <괴물>이 말하는 진짜 괴물은 정부의 공권력인 셈이다. <괴물>과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 김성수 감독의 <감기>나 박정우 감독의 <연가시> 같은 영화에서도 단골로 등장하는 건 역시 믿지 못할 공권력에 대한 날 선 비판이다. <감기>에서 공권력에 의해 살처분되는 시신으로 가득한 체육관의 살풍경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축소해놓은 미니어처 같은 느낌마저 준다.

최근 대중을 끌어모았던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에서 핵심적인 대사는 “국가란 국민입니다”라는 외침이다. 이 외침 속에는 잘못된 공권력에 대한 항거가 들어 있다.

실제 벌어졌던 사건을 영화화한 <집으로 가는 길> 역시 <변호인>에서의 질문을 또다시 던진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지만 이역만리에서 통역 서비스조차 없이 무려 2년여 간이나 수감 생활을 한 장미정씨의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이야기다. 영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벌어진다는 건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 분노와 불안까지 야기한다.

어째서 우리네 공권력은 이토록 무능과 부패와 불신의 극치로 그려지게 되었을까. 이번 세월호 참사는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조목조목 보여준다. 사고 초기 전원 구출 발표 같은 어처구니없는 오보에, 구조자와 희생자 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오락가락하는 정부. 사고가 발생한 후 즉각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초동 대처, 오징어잡이 배를 야간에 세우고 바지선을 이용하는 것 같은 생각조차 실종자 가족이 먼저 이야기해 그때서야 실행된 상황. 이 와중에도 현장에 가 얼굴 도장 찍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고위 공무원의 행태. 선장과 일부 선원이 먼저 도망쳐버린 세월호는 그래서 씁쓸하게도 우리네 자화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어떻게 공권력을 신뢰할 수 있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알고 보니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였더라’ 하는 허탈한 말이 오가는 현실 속에서 대중문화가 다루는 공권력은 불신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