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싣고 튀어라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4.05.1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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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추적 피해 현금 숨겨 독일 국경 넘는 유럽인들

4월 말 독일 쾰른 근교의 소도시 케르펜과 뒤렌을 잇는 4번 고속도로에 갑자기 순찰차가 나타났다. 이날 단속 대상은 과속·과적 차량이 아니었다. ‘따라오시오’라는 문구를 켜고 고속도로를 오가는 차량을 갓길로 유도한 것은 쾰른 관세청 소속 차량이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운전자에게 단속원이 물었다. “환각제나 무기, 신고하지 않은 1만 유로 이상의 현금을 소지하고 계십니까?”

운전자와 보조석에 앉아 있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관세청 단속원은 곧 차량을 수색했다. 보조석 뒤편 자동차 시트를 들추자 여러 개의 쓰레기봉투가 나왔다. 그런데 봉투에 든 것은 쓰레기가 아니었다. 총 50만 유로(약 7억5000만원)가량의 현금 뭉치였다. 돈의 출처를 묻자 두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 남자가 “내 돈입니다”라고 말했다. 두 남자는 적발된 현금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2만 유로가량을 예치금으로 내고서야 풀려났다.

거액의 현금이 독일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독일 연방관세청은 올해 들어서만 벌써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담은 보도자료를 12건이나 배포했다. 새해 첫 월요일인 1월6일에는 스위스와 독일 간 국경에서 무려 현금 86만 유로(약 12억원)를 밀반입하려던 79세 남성이 적발됐다. 독일-스위스 국경 검문소가 있는 비팅엔에서만 하루 평균 서너 명이 적발되고 있다.  

ⓒ 일러스트 정창동
현금 밀반입 증가 이유는 탈세자들 때문

유럽연합(EU)에서는 1만 유로 이상의 현금을 소지하고 국경을 넘을 경우 반드시 세관에 신고해야 한다. 어길 경우 벌금이 부과되고 추가로 세무조사를 받게 된다. 그럼에도 현금을 밀반입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떳떳하지 못한 돈이기 때문이다. 쾰른 관세청의 게르트 플린츠 대변인은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특히 스위스와 룩셈부르크 은행에 예치해두었던 돈을 현금이나 수표로 밀반입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 한 해 독일 세관은 총 3300여 건의 현금 밀반입 사례를 적발했다. 출처가 분명치 않아 계류해둔 현금만 5억7300만 유로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8125여 억원이다. 2012년의 930만 유로와 비교하면 57배나 급증한 수치다. 이렇게 적발된 돈은 ‘꼬리’에 불과하다. 외국 은행에 자산을 은닉했음을 알려주는 서류가 같이 발견된 경우도 1800건이나 되는데, 그 규모가 무려 3억4600만 유로(500억여 원)다. 독일 연방재무부의 마틴 카우두리 대변인에게 최근 현금 밀반입 액수가 급증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는 “한 사람이 5400만 유로짜리 수표를 밀반입하다가 적발된 게 컸다”고 답했다. 거액을 들여오는 사람이 단지 몇 명만 늘어나도 수치상으로는 큰 차이가 난다는 뜻이다. 다만 그는 “현금을 밀반입한 사람이 꼭 탈세자라고 할 수는 없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연방재무부 다른 관계자의 말은 달랐다. 거액의 현금을 들고 국경을 넘는 무모한 행위는 탈세자들의 조급증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시각이다. 이 관계자는 “현금 밀반입이 늘어난 이유는 독일이 세금협정 협상을 진행하면서 탈세자들이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특히 독일 프로축구 최고 인기 구단인 FC 바이에른 뮌헨의 울리히 회네스 구단주는 독일 탈세자들에게 끔찍한 ‘시범 케이스’가 되었다. 그는 지난해 초 스위스 은행 계좌를 이용해 탈세한 사실을 자수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진짜 반전은 올해 3월에 일어났다. 탈세 규모가 당초 신고한 액수인 320만 유로가 아니라, 그 아홉 배에 이르는 2700만 유로였던 것이다. FC 바이에른 뮌헨의 최고 스타인 마리오 괴체와 프랑크 리베리가 받는 팀 내 최고 연봉(각 1200만 유로)을 합친 것보다 많은 금액이다. 바이에른 주 검찰은 울리히 회네스에게 징역 3년6월형을 구형했고, 그는 항소를 포기하고 판결을 받아들였다.

검문 중 신용카드 씹어 삼키기도

울리히 회네스 사건은 그동안 ‘자수해서 추징금과 벌금만 내면 된다’던 탈세자들의 오만한 믿음에 경종을 울렸다. 독일 정부가 스위스 은행으로부터 편안하게 익명으로 세금을 전송받기를 거부하고 굳이 탈세자의 신상정보까지 넘겨줄 것을 요구하는 것도 처벌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탈세자의 불안감은 자수로 이어졌다. 회네스 사건이 알려진 2013년 자신이 탈세를 했다고 자수한 사람의 수는 2012년의 8100여 명에 비해 세 배 가까이 증가한 2만4000여 명에 달했다. 독일 일간지 ‘타게스 슈피겔’은 이를 두고 ‘회네스 효과’라고 불렀다. 채찍이 효력을 발휘하자 정치권은 고삐를 더 바싹 조였다. 3월27일 독일 각 주의 재무장관들은 자수자에게 매기는 벌금을 현행 탈세액의 5%에서 최소 10% 이상으로 인상하기로 합의했다. 4월11일에는 연방 참의원회가 고객의 탈세를 도울 경우 은행면허 취소도 가능케 하는 법안 제정에 동의했다. 그동안은 탈세가 일어나도 해당 고객을 도운 직원의 개인적 일탈로 간주될 뿐이었고, 은행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 법안은 상원인 연방의회의 비준을 기다리는 중이다.

점점 좁혀오는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 도박을 선택한 이들은 필사적이다. 가방이나 자동차 시트에 현금을 숨기는 경우는 그나마 점잖은 축에 속한다. 라인 강변에 자리한 코블렌츠 시 세관은 4월9일 불시단속 중 현금 21만 유로를 사전 신고 없이 소지한 노부부를 적발했다. 남편은 이 중 20만 유로가량을 성기와 그 주변에 테이프로 붙인 상태에서 붙잡혔다. 스위스에서 국경을 넘기 위해 어린 자녀의 바지 속에 현금 7만 유로를 감추었다가 적발된 사례도 있었고, 차 안에 누워 있던 애완견의 배 밑에 25만 유로를 숨긴 경우도 있었다. 이보다 더한 일도 있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차이퉁’은 독일 남부의 징엔 중앙세관이 단속에 나서자 탈세자들이 검문 중에 계좌 내역서는 물론 신용카드까지 씹어 삼키는 경우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나날이 교묘해지는 현금 밀수 수법에 맞서기 위해 징엔 세관은 현금 탐지견을 투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시의 고속도로 순찰과 현금 탐지견 동원으로 국외 탈세자를 모두 찾아낼 수는 없다. 독일-스위스 간 국경 검문소의 경우 차량 수색을 받는 자동차는 5~10대 중 1대꼴에 불과하다. 중도 좌파 성향인 사회민주당(SPD) 정치인들은 회네스에 대한 판결이 내려진 지난 3월14일, 보수 우파 성향인 기독사회연맹(CDU)의 볼프강 쇼이블레 연방 재무장관에게 스위스와의 세금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들의 요구대로 세금 정보 자동 교환이 이루어지면 은행비밀법을 악용한 탈세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판결 후 두 달이 지난 5월2일, 울리히 회네스는 구단의 특별회의에 참석해 “(형을 살고) 돌아오면 조용히 있지 않겠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고 때 이른 컴백을 예고했다. 그는 “큰 실수를 저질렀으며 이에 대한 책임을 졌다”면서도 “내가 갑자기 나쁜 놈, 더러운 놈, 사람들 주머니에서 돈을 훔친 놈이 되어 있다”며 불쾌한 심경을 감추지 않았다. 돈과 본심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결국 드러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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