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쌤, 저 자퇴하려고요” “또 왜?”
  • 김지영 기자 (abc@sisapress.com)
  • 승인 2014.06.1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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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기자 혁신학교 선사고 1일 체험기 교사와 학생 친구처럼 대화

흔히 말하기를, 우리 사회에서는 15세에 인생이 결정된다고 한다. 특목고나 자율형 사립고(자사고) 입학은 엘리트 코스의 출발선이다. 이와 같은 고등학교 성적 기득권 문화에 변화를 주겠다고 나선 이들이 있다. 6·4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13명의 진보 교육감들이다. 혁신학교가 그 무기다. 과연 혁신학교가 진보 교육감들의 주장대로 치열한 입시, 경쟁 위주의 교육 체제를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한국 입시 교육의 최정점에 있는 고등학교가 ‘혁신적’으로 바뀐다면, 견고한 경쟁 체제 구도에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가능성이다. 그래서 시사저널 취재진은 서울 시내 67개 초·중·고 혁신학교 가운데,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선사고등학교를 직접 찾아가봤다. 혁신학교의 민낯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생일파티가 정규 수업 과정에 포함

6월11일 오전 7시35분 선사고등학교. 아이들이 하나 둘 정문으로 들어선다. 허벅지까지 올라온 짧은 치마, 핫팬츠를 입은 학생도 보인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 노랗게 물들인 머리 등 헤어스타일도 제각각이다. 요즘 유행하는 빨간 립스틱을 칠한 여학생도 여럿이다. 서로 두 손을 깍지 끼고 등교하는 커플도 눈에 띈다.

혁신고에서는 책상이 ㄷ자 모양으로 배치돼 있다. 선사고에서는 생일파티도 정규 수업이다(작은 사진). ⓒ 시사저널 박은숙
오전 8시. 종소리가 울린다. 아침 창의성 체험활동 시간이다. 각 반이 30분 동안 자유로운 활동을 한다. 107A반은 EBS 지식 채널을 보고 감상문을 쓰고, 108A반에서는 스페인 여행을 갔다온 아이가 여행 후기를 프레젠테이션한다. 104A반은 독서 시간이고, 104B반은 복도에 놓인 책상에 교사와 학생이 일대일로 마주 앉아 상담 중이다. 생일파티를 하는 반도 있다. 두 줄로 마주 보게 배치된 책상. 그 위에는 케이크와 과자, 생수 등이 있다. 케이크에는 17개 촛불이 꽂혀 있다. 이 반 강민혜양의 생일이다. 이 반은 한 달에 한 번씩 아이들 생일파티를 연다. 파티비용은 원래 학교에서 지원했지만, 지금은 서울시교육청에서 혁신학교 예산을 줄이면서 학생들도 조금씩 돈을 내고 있다. 학생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동안 담임선생님은 빗자루를 들고 교실 바닥에 흩어진 폭죽을 치운다. 

학급 옆에 붙은 A·B라는 반 표시는 혁신학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다. 예컨대 ‘104A’에서 1은 학년, 4는 4반이란 뜻이다. 선사고에서는 보통 한 반이 30명인데, 1학년만 15명씩 A·B로 나눠 작은 학급제를 운영하고 있다. A·B반으로 나누는 기준은 성적순이 아니다. 보통 앞 번호 순으로 잘라 1~15번까지는 A반이고, 그 이후는 B반이다. A·B반 담임도 각각 다르다. 108A의 서우정 교사는 “아이들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학급당 학생 수가 적을수록 좋다. 그래야 일대일 대면 관계가 가능하고 아이들과 신뢰를 쌓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쉬는 시간. 박민규군(17)은 공책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반 친구들과 같이 쓰는 모둠일기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를 가야 하고, 고등학교가 끝나면 군대를 가야 한다. 힘들다.’ 같은 반 동우가 적은 글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동우의 일기 밑에는 ‘동우야 힘내’라는 친구들의 응원 글귀도 보인다. 담임선생님의 답글도 있다. 민규도 고민이 많다. 일단 잠이 너무 많다. 민규는 “잠이 많아 학교 오기가 힘들지만 아직까지는 편해서 좋다”고 했다. 민규는 중1 때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러 이곳에 왔다.

교사가 지나갈 때마다 학생들이 웃으며 인사한다. 놀라운 것은 선생님들이 인사하는 학생들의 이름과 반을 정확히 안다는 점이다. 영어를 가르치는 강명희 교사는 “교사학습동아리라는 게 있다. 수업뿐 아니라 전교생 사진이 있는 출석부를 하나씩 갖고 다니면서 교사들이 서로서로 아이들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 이름을 외우게 됐다. 집안 환경부터 요즘 고민이 뭔지까지 교사들 사이에 공유가 이뤄지고 있다.”

교사와 학생의 친밀한 관계는 교무실에서도 드러난다. “쌤, 저 자퇴하려고요.” “또 왜?” 누가 들으면 놀랄 법한 학생의 말을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게 받는다. ‘쌤’이 교무실을 나가자 아이가 졸래졸래 선생님을 따라간다. 그렇게 쉬는 시간마다 꼭 한두 명의 학생이 선생님을 찾는다. 고민영양(16)의 말이다. “선생님이랑 진짜 친해요. 만우절 때 선생님이 우리에게 장난을 쳤어요. 전학생이 왔다고 하는 거예요. 각 반에 한 명씩 전학생이 와서 교복을 입고 앉아 있는데 알고 보니 올해 졸업한 선배들인 거예요. 되게 재밌었어요.”

“선생님 제 수업 나아졌나요?” “그 반은 선생님이 들어오면 피어나더라고. 나한테는 아이들이 살갑게 굴지 않아. 잘 안 앵겨. 거리를 두는 것 같아.” EBS 교육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화가 선사고 교무실에서 실제로 오간다.

국·영·수 수업은 어떨까. 수업 시간은 50분으로 일반고와 같다. 다만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일단 책상 배치가 일반 학교와 다르다. 교실 가운데 있는 교탁을 중심으로 책상 네 개가 그룹으로 모여 있다. 학생들이 4명씩 조를 이뤄 서로 마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모둠’이라는 혁신학교만의 이색 교실 구조다. 모든 과목을 이 책상 배치를 한 채로 배운다. 강명희 교사는 “협력과 경청이 가장 잘 이뤄지는 구조다. 아이들이 서로 눈을 보며 얘기를 한다. 선생님이 말하면 잔다. 그런데 친구가 말하면 안 잔다. 또래의 언어를 통해 더 쉽게 배우는 거다. 가르치는 학생도 더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모둠을 통해 함께 성장해간다.

국어는 연극 시간, 원의 방정식은 토론으로

실제로 학생들은 원의 방정식을 토론을 통해 푼다. 각 모둠은 서로 모르는 것을 물어보느라 왁자지껄하다. 모르는 부분은 적극적으로 손을 들고 선생님께 물어서 해결한다. 교사는 끝날 때 10분, 시작할 때 10분만 설명하고 남은 시간은 모둠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대일로 아이들에게 설명한다. 수학 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생은 딱 한 명이었다. 새벽 2~3까지 복싱을 하는 애다. 선생님은 알지만 일부러 깨우지 않는다.

영어 시간은 휴대전화가 수업 시간에 허용된 유일한 시간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미리 나눠준 영어 지문을 학생들이 같은 모둠 친구들과 함께 푼다. 휴대전화를 꺼내지만 게임을 하거나 모바일 메신저를 하는 학생은 없다. 모르는 단어만 휴대전화를 통해 검색할 뿐이다. 휴대전화로 하는 가장 큰 딴짓은 ‘셀카’를 찍는 정도다.

“이놈 말뚝아! 춤이나 추고 가자” “아이고 양반님.” “말은 정확하게 씹으면서 가야 해. 그렇게 다시 해보자.” 2-4반 아이들이 극문학을 연극으로 배우고 있다. 30명의 학생이 여섯 모둠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희곡을 읽는다. <하회별신굿 탈놀이> 같은 전통극부터 <성난 기계> 같은 현대극까지 각 모둠별로 대본은 다르다. 연습이 끝나면 모둠별로 10분간 실제 연기를 한다. <오광대놀이>를 연기하는 조하영군(17)의 책에는 밑줄이 여러 개 그어져 있다. 전통극이라 유난히 한자어와 고유어가 많은 탓이다. “지금까지 한 여섯 번 봤나? 그래도 어려워요. 사자성어도 많고,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시간 날 때마다 봐야죠.”

오후 1시쯤 도서관. 정은지양(17)은 도서관에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다. ‘선사 연구 과제’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선사 연구 과제는 학생들이 주제 선정부터 자료 수집까지 스스로 연구해 소논문을 써 내는 것이다. 은지는 고1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선사 연구 과제를 위한 팀을 꾸렸는데 서로 시간이 안 맞아 점심시간에 겨우 보기로 한 것이다. 주제는 ‘수입 과자의 인기 요인 분석’이다. 선사고 학생들은 바쁘다. 3~4개의 교내 활동은 기본이다. 최민주양(17)도 정치토론동아리, 선사아카데미, 인문학 특강, 교내 논술대회 준비까지 4개나 하고 있다.

김대선 자치문화부 담당교사는 “매주 월요일마다 특강이 있고 독서토론, 논술캠프, 이공계 특강 등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이 많다. 모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다. 교가도 아이들이 직접 만들었다. 현재의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이른바 명문대를 얼마나 가느냐가 최우선의 가치가 됐다. 하지만 원래 교육의 목적은 그게 아니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선사고 학생들은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국악을 배운다(작은 사진). 국어시간에는 교과서에 실린 희곡을 아이들이 실제처럼 연기한다. ⓒ 시사저널 박은숙
“학교 끝나면 영·수 학원 다니고 있다”

“혁신학교는 특별한 학교가 아니다.” 선사고 일선 교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곳에서 물리를 가르치는 오두환 교사의 얘기다. “난 과학을 가르치는데 혁신학교라고 해서 실험을 더 많이 하지 않는다. 다만 아이들에게 더 잘 가르쳐주기 위해 매일 수업 내용을 업데이트할 뿐이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수업하는 방법만 살짝 바꾼 것이다. 다른 수업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는 유명무실화된 학급회의를 실제로 해서 아이들 스스로 문제 해결력을 키워나간다. 사실 이게 정상 아닌가.”

극문학을 연극을 통해 가르치는 배성우 교사 역시 자신의 수업 방식이 실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수업의 가치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재밌어야 한다. 둘째, 아이들이 직접 해야 한다. 셋째, 실생활과 연결돼야 한다.” 그의 말이 낯설지 않다.

사실 기자가 방문한 다음 날(6월12일)은 전국 모의고사가 있는 날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모의고사 전날 학생들이 문제집을 열심히 푸는 것은 당연한 풍경이다. 그런데 선사고는 달랐다. 물론 이곳에서도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다. 이곳 학생들 중에도 방과 후 사교육에 의존하는 아이들이 꽤 있다. 고3 교실에서는 선사고가 자랑하는 ‘모둠형 책상 배치’도 하지 않는다. 토론 수업보다 EBS 교재로 공부한다. 3학년 이현우군은 “선생님도, 자유로운 학교문화도 너무 좋다. 입학사정관제로 선배들이 올 2월에 좋은 학교를 많이 갔다고 들었다. 그래도 대학이 가장 걱정된다. 학교 끝나면 영·수 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희 선사고등학교 교장은 “올 2월에 처음으로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생 가운데 절반 이상이 4년제 대학에 갔다. 그중 ‘인(IN) 서울’ 대학에 합격한 학생도 70명이나 된다. 혁신학교의 희망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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