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떠나 이미지 위에서 사유하라”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4.06.25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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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가 요구하는 인문학 제시한 진중권 교수

얼마 전만 해도 디지털 이미지라는 것은 일상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남녀노소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주위의 모든 것이 디지털화한 오늘날, ‘디지털’은 딱히 새로울 것이 없는 일상이 됐다. 이미지를 텍스트로, 텍스트를 다시 이미지로 변환하는 디지털 기술은 일상으로 체험된다. 이런 현실에 대한 진중권 교수(51)의 설명은 이렇다.

“과거에는 책이 사람을 형성했다면, 오늘날 인간의 의식은 영상으로 빚어진다. 텍스트 중심의 인문학은 이제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 속에서 다시 정의돼야 한다. 이는 이미지에 기초한 새로운 유형의 인문학을 요청한다.”

ⓒ 천년의 상상 제공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미지의 원리는 ‘문자로 그린 그림’이다. 이러한 그림은, 형상이 그 아래에 복잡한 텍스트를 깔고 있는 일종의 아이콘이다. ‘이미지’는 눈에 보이나, 그 바탕의 텍스트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에 착안해 진 교수는 2008년부터 기술미학연구회(예술가·인문학자·엔지니어)와 함께 미학 이후의 미학인 디지털 미학, 미디어 미학에 대한 연구와 토론을 쉬지 않았다. 최근 그 결과물로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더불어 등장한 제2차 영상문화, 제2차 구술문화를 설명하는 <이미지 인문학>을 출간했다. 그는 새로운 인문학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문자로 그린 그림’으로 소통하는 세상

“우리는 전자책 책장을 마치 실제 책인 양 손가락으로 짚어 넘긴다. 이렇게 디지털 가상이 아날로그 현실의 자연스러움을 가지고 다가올 때, 그 익숙함 속에서 디지털 매체의 진정한 본성은 슬쩍 은폐되기 쉽다. 이는 디지털의 대중을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 망각’의 상태로 이끌어갈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망각 속에서도 디지털의 논리는 화려한 가상 아래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그 기제는 늘 의식되고 반성돼야 한다.”

진 교수는 글자를 못 읽는 사람은 사라지는데 오히려 이미지를 못 읽는 사람은 너무 많다고 지적한다. 디지털 이미지 속에 감추어진 새로운 세계와 사물을 알아야 하고, 현실과 가상이 중첩하는 ‘파타피직스(Pataphysics)’의 세계, 디지털이 바꿔놓은 예술의 지형도 등을 살펴야 한다고 덧붙인다.

“창조성을 대표하는 것은 메타포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창조성을 대표하는 것은 파타포의 능력이다. 이것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상상력의 논리’다.”

‘파타피직스’는 20세기 중반 유럽의 지성계를 풍미하던 신학문으로 온갖 우스꽝스러운 부조리로 가득 찬 사이비 철학(혹은 과학)을 가리킨다. 진 교수의 설명이다. “철학은 가상과 실재를 구별하는 데서 출발했다. 플라톤 같은 관념론자든, 데모크리토스 같은 유물론자든, 모든 철학자들은 가상의 베일 뒤에 숨은 참된 실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상상과 이성, 허구와 사실, 환상과 실재 사이의 단절을 봉합선 없이 이어준다. 이로써 가상과 현실 사이에 묘한 존재론적 중첩의 상태가 발생한다. 이것이 ‘파타피직스’다.”

가상과 현실의 중첩은 역사 이전의 현상이었다. 선사시대 인간의 의식에서는 가상과 현실이 인과관계로 서로 연결돼 있었다. ‘가상의 원인이 현실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주술의 원리였다. 진 교수는 역사시대가 되면서 사라졌던 이 상징 형식이 디지털 기술 형상의 형태로 되돌아온 것으로 본다. 선사인(先史人)의 상상이 주술적 현상이었다면, 현대인의 상상은 어디까지나 기술적 현상이다. 선사인의 상상이 공상이라면, 현대인의 상상은 기술에 힘입어 현실이 된다. 이것이 역사 이전의 마술과는 구별되는 역사 이후의 ‘기술적 마술’이다. 가상과 현실의 중첩은 디지털 이미지 자체의 특성인 것이다.

디지털 이미지에 밀려나고 변화하고

사진의 등장 이후 회화가 더는 과거의 회화일 수 없었듯이, 컴퓨터의 발명 이후 사진도 더는 과거의 사진일 수 없다. 사진의 발명으로 바뀐 예술의 전체 성격은, 컴퓨터의 발명으로 인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컴퓨터에 기초한 오늘날의 디지털 미학은 사진술에 기초한 벤야민의 모더니즘 미학과 어떻게 대립하는 것일까.

“변화의 요체는 몽타주의 무기적(unorganic) 미학이 디지털 합성의 유기적(organic) 미학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디지털 합성은 시각적 파편들을 균열의 흔적 없이 봉합한다. 여기서 ‘유기적 총체성’이라는 고전예술의 미학과 ‘파편들의 조립’이라는 모더니즘 미학이 묘한 종합을 이룬다. 디지털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 성격이 전혀 다른 새로운 매체다. 모더니스트들의 오해와 달리 디지털 합성의 ‘유기적’ 미학은 디지털 매체의 특성과 정확히 부합한다.”

진 교수는 이런 측면에서 접근하면 이른바 ‘모던’과 ‘포스트모던’ 사이의 논쟁도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모더니스트가 디지털 영상에 여전히 사진과 영화의 미학을 적용하려 했다면, 포스트 모더니스트는 변화한 취향을 옹호하면서도 그 변화의 바탕에 깔린 물질적 토대의 변화와 의미를 제대로 의식하지는 못한 듯하다는 식이다. 또 모더니즘의 몽타주 미학이 가상의 허구성을 폭로함으로써 ‘진리 의지’를 드러냈다면 디지털 이미지는 진리가 사라진 시대의 허무에 창조의 기쁨으로 대항하는 ‘가상 의지’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 밖에도 디지털 이미지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고 지적한다.

“디지털 사진에서는 사진 매체의 본질로 여겨졌던 지표성이 사라진다. 디지털 사진은 일종의 그래픽이고 그래픽 이미지는 굳이 피사체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로써 디지털 사진은 현실의 ‘기록’으로서 성격을 잃는다. 오늘날 보도사진은 예술 작품으로 변용되고 역사는 서사와 오락의 소재로 전락하고 과학의 실험은 디지털 이미지 프로세싱을 닮아가고 있다. 실재는 위기에 처했다. 다큐멘터리 의식은 약화되고 역사주의 의식은 설 자리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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