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로비 장부 뚜껑 열린다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4.07.23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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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살된 재력가 송씨가 작성 현직 국회의원, 전 서울시장 등 이름 올라

피살된 서울 강서구 재력가 송 아무개씨(67)가 남긴 금전출납부 성격의 장부를 둘러싸고 경찰과 검찰이 벌이는 갈등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경찰은 송씨의 장부 사본을 숨긴 채 “없다”고 검찰에 거짓말을 했고, 이를 믿고 특정 사실을 언론에 발표했다 망신을 당한 검찰은 중요 증거 훼손을 방치한 경찰에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대립각을 세우는 경찰과 검찰의 해묵은 갈등이 다시 불거지며, 정작 김형식 서울시의원의 살인교사 여부는 뒷전이 된 채 이번 사건은 진실 게임이라는 또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3월 살해당한 송씨는 생전에 주차비 1000원도 기록할 정도로 매일 꼼꼼히 돈 씀씀이를 장부에 정리해왔다. 경찰은 송씨 살해 직후 현장 조사 과정에서 80쪽짜리 장부를 송씨 사무실에서 발견한 후 이를 복사했다. 원본은 송씨 유족에게 돌려주고 사본(사본1)은 강서경찰서 내 캐비닛에 보관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당장 살인 용의자 팽 아무개씨 추적이 급선무였던지라 사본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경찰에 붙잡힌 팽씨는 김형식 시의원이 살인을 교사했다고 자백했다. 그때서야 경찰은 송씨와 김 의원의 관계와 돈거래를 확인하기 위해 6월19일 송씨 아들에게서 장부를 다시 넘겨받아 복사한 후 원본은 역시 송씨 유족에게 되돌려줬다. 이때만 해도 경찰은 사건 직후 이미 장부 사본을 캐비닛에 넣어둔 것을 미처 기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7월3일, 경찰은 살인교사 혐의로 김 의원을 검찰로 송치할 때 6월에 복사한 사본(사본2) 가운데 2쪽짜리 요약본을 검찰에 넘겼다. 검찰은 사본 전체를 요구했지만 경찰로부터 “사본은 폐기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경찰, ‘검사 금품 수수’ 수사하려 했던 듯

검찰은 송씨 아들로부터 장부 원본을 넘겨받았다. 하지만 이 장부는 이미 송씨 아들에 의해 일부 훼손된 상태였다. 장부에는 수원지검에 근무하는 정 아무개 검사에게 돈을 준 기록이 있었다. 서울남부지검은 7월13일 언론 브리핑에서 “정 검사가 200만원을 받은 기록이 있다”고 했다가 다음 날 “2차례에 걸쳐 300만원을 받은 기록이 있다”고 말을 바꿨다. 그 시점에서 경찰은 검찰 조사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검찰을 압박했다. 정 검사가 10회에 걸쳐 받은 돈이 1000만원이 넘는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경찰의 문제제기로 ‘제 식구 감싸기’ 의혹을 받게 된 검찰은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수사 담당 경찰과 만났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캐비닛 속에 넣어뒀던 ‘사본1’을 공개했다. 파기했다던 장부 사본이 나타난 것이다. 장부 원본과 사본1을 비교한 검찰은 7월15일 “정 검사가 2005년부터 2011년까지 10회에 걸쳐 1780만원을 받은 내역이 있는 것으로 확인했다”며 “송씨 아들이 장부 원본에서 정 검사의 기록을 수정액으로 지웠고, 경찰은 장부 사본을 내놓지 않아 수사에 혼선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현재 송씨의 장부는 모두 세 종류다. 사본1과 원본은 현재 검찰에 있다. 경찰이 최초 확보하고 있던 사본1은 강서경찰서 캐비닛에 있다가 검찰 손으로 넘어갔고, 검찰은 사본 내용을 살펴보는 중이다. 사본2는 경찰이 김 의원 관련 2쪽만 검찰에 넘기고 나머지는 폐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결정적 단서는 3월 사건 직후 경찰이 확보한 사본1이 될 전망이다. 사본2와 원본은 이미 송씨 아들에 의해 훼손됐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정적 단서가 될 사본1을 갖고서도 없다고 했던 경찰의 말은 결국 거짓으로 드러났다. 수사권을 놓고 지난 2011~12년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검찰과 경찰이었다. 양측의 앙금은 지금도 남아 있다. 늘 검찰에 당한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경찰이 검사의 비리를 캐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이나 김광준 부장검사 뇌물 사건 등을 제대로 수사하지도 못한 채 검찰로 넘겨 체면을 구긴 경찰은, 검찰에 송치한 살인 사건 외에 별건의 사건을 조사하므로 검찰에 관련 자료를 제공할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다. 정 검사에 대한 경찰 수사를 의미하는 대목이다. 서울지방경찰청도 최근 언론에 “별건의 사건에 대해서는 추가 단서가 나오면 수사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검찰은 ‘두고 보자’는 분위기다. 검찰은 이참에 아예 장부 원본을 공개할 의지가 있음을 언론에 내비치기도 했다. 장부는 김 의원의 살인교사 혐의뿐만 아니라 공무원 뇌물 수수와 관련된 증거물이었음에도 경찰이 원본을 송씨 가족에게 돌려주는 실수를 저질러 수사에 혼선을 초래했다는 시각이다. 검찰 관계자는 “경찰이 중요 증거인 장부 원본을 압수하지 않아 훼손됐으므로 경찰을 상대로 그 경위를 파악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장부 훼손은 심각했다. 정 검사는 2007~11년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작게는 100만원에서 많게는 500만원씩 모두 1200만원을 받은 것으로 장부에 기록돼 있다. 송씨 아들은 이 가운데 네 곳을 수정액으로 지웠다. 원본과 사본을 비교한 검찰은 장부 뒤에 있는 별지 두 쪽이 찢긴 사실도 알아냈다. 송씨 아들은 검찰 조사에서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 이름이 있어 피해가 갈까 봐 자발적으로 지웠다”고 진술했다.

“일반인이라면 장부에 나온 이름 지웠겠나”

서울남부지검은 송씨 아들이 찢은 별지에 정 검사가 4차례 돈을 받은 기록이 있다고 발표했다. 시사저널 취재 결과, 송씨는 2005년 적게는 80만원에서 많게는 200만원, 5차례에 걸쳐 모두 580만원을 정 검사에게 건넨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남부지검 관계자는 “5차례가 맞다. 4차례는 날짜가 적혀 있고 한 차례는 그렇지 않아서 4차례라고 말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수정액으로 지운 23곳 가운데 정 검사 부분(4곳)을 제외한 19곳에 기록된 인물은 누구일까. 지금까지는 전·현직 국회의원·서울시장·검사·경찰·시의원·구의원·구청 공무원 등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일반인이라면 지울 필요가 없다. (그들이 누군지는) 구체적으로 조사해서 밝히겠다”고 말했다. 장부를 훼손한 것은 송씨 아들의 단독 행동으로 보이지만, 정 검사를 비롯한 당사자들이 송씨 아들에게 이름을 지워달라고 부탁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정황이 사실로 드러나면 송씨 아들과 정·관계 인사들의 증거 인멸 모의 개연성에 대한 수사 확대가 불가피해 보인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시의원의 살인교사 여부와 그 배후를 밝히는 일이다. 장부에 기록된 김 의원과 정 검사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장부에 나온 이름과 금액만으로 뇌물 혐의가 인정될 수 없다. 이 점은 검찰도 잘 알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이 장부는 금품 수수 로비 확인에 중요한 증거지만, 살인 및 살인교사를 입증할 유일한 증거는 아니다”고 말했다. 국민은 정·관계 고위층이 연루된 이번 사건이 용두사미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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