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 때려서 진실을 묻어버려라”
  • 이애림│일본 통신원 ()
  • 승인 2014.08.28 13:5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준동하는 일본 우익…오보 시인에 “위안부는 없었다” 궤변

8월5일과 6일, 이틀간 일본에서는 한국이 예민하게 느낄 만한 문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시작은 두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에 관해 아베 정부가 발표한 검증보고서가 6월20일 공개됐다. ‘고노 담화는 한·일 간 정치적 타협의 결과’라는 결론을 도출한 이 보고서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했다.

보고서가 발표되자 위안부 문제에 전향적이던 아사히신문에는 연일 전화와 메일이 쏟아졌다. 1993년 고노 담화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1980~90년대 군 위안부 문제를 연속적으로 제기했던 아사히신문이 있었다. 그 때문에 검증보고서가 나온 뒤 아사히신문을 향해 전 방위적으로 질문이 쏟아졌고, 책임을 느낀 이 신문은 결국 8월5일과 6일 이틀에 걸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특집 기사를 냈다. 아사히신문이 위안부 문제를 특집으로 다룬 것은 1997년 3월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번 특집 기사에서 아사히신문의 1면에는 스기우라 노부유키 편집담당자의 칼럼이 실렸다. 그는 “위안부 문제가 관심을 받기 시작한 1990년대 초에는 이와 관련한 연구가 많지 않았고, 아사히신문은 전 위안부의 증언과 적은 자료를 바탕으로 기사를 보도해왔으며 이 기사 중에는 사실관계의 오보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아사히신문은 ‘독자의 의문에 대답합니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총 5개의 질문에 대해 응답했다. 이 중 일본 내의 관심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에 관한 질문에 쏠렸다. 지금은 사망한 요시다의 증언이 아사히에 처음 실린 것은 1982년 9월이었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제주도에서 950여 명의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위안부 활동을 위해 끌고 갔다”고 증언했다. 아사히신문은 1980년대부터 이 남성을 취재했는데 요시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된 아사히신문의 기사는 1990년대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16건이었다.

일본의 우경화·보수화 바람 생각보다 거세

요시다 증언에 대해 아사히신문은 봉인을 풀었다. 그리고 지면을 통해 이렇게 답변했다. “요시다가 제주도에서 위안부를 강제 연행했다는 증언은 허위라고 판단하고 기사를 취소한다. 당시 허위의 증언이란 점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사히신문은 “올해 4~5월에 취재팀이 제주도를 찾아 70대 후반에서 90대의 주민 40명을 대상으로 알아본 결과 요시다의 발언에 허위를 발견했고 증언과 다른 사실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보수 언론들은 그동안 요시다의 증언을 1990년대부터 집요하게 공격해왔다. 최근 후지TV는 요시다의 증언을 검증하기 위해 제주도를 직접 찾았다. 화면에 등장한 77세의 제주도 해녀는 “그런 이야기를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요시다의 증언대로라면 강제 연행 당시 16세였을 올해 87세의 해녀는 “마을에서 50명이 끌려갔다면 내가 모를 리 없다”고 말했다. 요시다의 증언을 뒤엎는 발언들이 일본의 안방으로 전해졌다.

요시다의 증언을 부정하는 것은 일본 보수 세력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치권·언론·시민단체 등 이념 지형에서 오른쪽에 속한 세력들은 오직 요시다의 이야기가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요시다의 증언은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강제 연행을 공인시킨 결정적 증거였다. 한국 정부는 아사히신문의 보도를 참고로 1992년 ‘일제 치하 군 위안부 실태조사 중간보고서’를 정리했고, 요시다의 증언은 이때 보고서에 채택됐다. 유엔 인권위원회가 1996년 위안부를 ‘전시 성노예’로 규정하고 일본에 법적 책임 인정과 배상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발표했을 때도 요시다의 증언이 증거로 채택됐다. ‘요시다의 증언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 위안부 문제가 허구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증거란 없다’는 게 일본 우익의 논리다.

오보를 정정하는 데 인색한 일본 신문업계의 관행으로 미루어볼 때 32년 만에, 그것도 특집 기사 형태로 정정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런 아사히신문의 행보가 증명하는 것은 일본 사회의 우경화·보수화 바람이 생각보다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당시 요시다의 증언 기사를 쓴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올해 3월 아사히신문을 퇴사했다. 4월부터 고베쇼인여자학원대학의 교수를 맡기로 내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안부 사건을 날조한 기사를 쓴 당사자를 교수로 채용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우익의 비난이 빗발쳤다. 이에 부담을 느낀 대학은 결국 우에무라와 맺었던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했다. 교수로서의 제2의 인생을 꿈꾸며 누구나 인정하는 직장을 퇴사했던 우에무라의 인생은 중간에서 붕 떠버렸다.

우에무라는 지금 홋카이도의 호쿠세이학원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다. 우에무라가 왔다는 소식에 이 학교에서도 우익 단체가 캠퍼스를 배회하며 전단지를 배포하는 등  반대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대학 측은 신경이 곤두서 있다. 호쿠세이학원대학의 관계자는 시사주간지 ‘슈칸분’과의 인터뷰에서 “학내에서 위안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다. 아무도 우에무라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오래전 기사를 쓴 기자 개인에게도 집요하게 응징이 가해질 만큼 일본 우경화의 힘은 촘촘하고 끈끈해졌다.

역사 문제를 ‘아사히 책임론’으로 몰아가

일본의 우익은 이번 아사히의 기사 취소를 ‘위안부’라는 역사를 부정하는 결과물로 만들어갈 기세다. 자민당에서는 이미 역사 문제를 ‘아사히 책임론’으로 수렴시키려 한다. 이시바 시게루 자민당 간사장은 아사히신문의 기사 철회를 두고 “이웃나라와의 우호와 국민의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라 의회에서도 검증을 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있지도 않은 위안부 문제 때문에 한·일 간에 불필요한 오해가 만들어졌고 그 죄는 아사히신문에 있다는 주장이었다.

거칠 게 없는 우익의 목소리에 대해 우려하는 시선도 늘어나고 있다. 구마 에이지 게이오 대학 교수(사회학)는 “일본에는 군인이 직접 여성을 연행했느냐 여부에만 주목해 일본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원자력발전소 사고는 전력회사가 일으켰으니 정부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변명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이 얼마나 보기 흉한 변명인가”라고 비판했다.

한반도 내 문제의 일부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미 확고하게 증명된 다른 증거들은 변함없이 존재한다. 예컨대 1944년 일본군이 네덜란드 여성 35명을 연행해 인도네시아 자바 섬 스마랑 근교에 억류하고 위안부로 삼은 사건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BC급 전범 군사재판의 공소장과 판결문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이번 아사히신문의 기사 철회가 이런 사례까지 없었던 일로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