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끝나지 않았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4.09.2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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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아테네올림픽 여자 핸드볼 준우승 ‘우생순’…“후배들아, 너흰 더 잘할 수 있어”

불굴의 투혼을 말할 때 한국 사람이 먼저 떠올릴 이벤트 중 하나는 2004년 8월29일 열린 아테네올림픽 여자 핸드볼 결승전일 것이다.

국내에서 인기도 낮고 선수 저변도 얇아 ‘한데볼’이라는 별칭을 얻은 여자 핸드볼이 1984년 LA올림픽 은메달 이후 30년 가까이 세계 정상권에 머물러 있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덴마크를 상대로 한 아테네올림픽 결승전에서 한국 선수들은 그것이 ‘고난에 꺾이지 않는 순도 높은 투혼’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줬다. 그건 ‘각본 없는 드라마’로 불리는 스포츠가 줄 수 있는 최대치의 선물이었다. 나중에 미디어에서 이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이라고 했을 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우생순 10주년과 인천아시안게임을 맞이해 그날의 기록을 지면으로 재구성해봤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 핸드볼 시상식에서 한국 선수들이 은메달을 수상한 후 퇴장하고 있다. 앞쪽부터 장소희·김현옥·오영란·문필희·명복희·우선희. ⓒ 연합뉴스
순도 높은 투혼은 한국 핸드볼 값진 자산

2004년 8월29일 오후 그리스 아테네 헬리니코 인도어 아레나에서 열린 여자 핸드볼 결승전. 대한민국과 덴마크가 맞붙었다. 두 팀은 8월18일에 열린 조별 예선 첫 경기에서 29-29로 비겼다.

1984년 LA올림픽을 시작으로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까지 은-금-금-은메달 행진을 벌여오던 한국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노메달을 기록했다. 이후 한국 핸드볼은 활력을 잃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진출권이 달린 2003년 9월의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조 2위로 밀리며 본선 진출에 적신호가 켜졌다. 2003년에만 여자 실업팀 2개가 해체되며 선수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고 세대교체에도 문제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팀을 꾸린 임영철 감독은 은퇴했던 선수까지 소집해 그해 12월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 프랑스, 헝가리에 이어 3위를 차지하며 가까스로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턱걸이로 나간 아테네 대회에서 한국은 준결승에서 2003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팀인 프랑스를 32-31로 꺾고 은메달을 확보해 사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프랑스전까지 대표팀 30대 선수들의 힘은 강력했다. 주포 이상은(32·35골)·오성옥(32·23골)·임오경(33·16골) 등 30대 공격 트리오와 골키퍼 오영란(33) 등이 코트를 장악했다. 또 젊은 세대인 우선희(27·33골)·허순영(30·16골)·장소희(27·16골)가 언니들에게 힘을 보태며 한국 대표팀은 결승전까지 진격했다.

결승전 상대인 덴마크는 우리와 악연이었다. 우리 팀은 애틀랜타올림픽 결승전에서 덴마크와 맞붙어 연장 접전 끝에 33-37로 졌다. 때문에 아테네에서 반드시 설욕이 필요했다.

큰 키와 체력을 앞세운 덴마크에 맞서 한국 팀은 속공으로 대응했다. 접전을 펼치던 우리 팀은 후반 중반 이후 연속 3골을 내주며 22-25로 뒤지면서 위기를 맞았다. 경기 종료 3분여 전, 오른쪽을 파고든 최임정과 중앙을 돌파한 문필희, 왼쪽 사이드 슛으로 가세한 장소희가 순식간에 25-25 동점을 만들어냈다. 이어 종료 40초 전, 덴마크 선수의 워킹 반칙으로 공격권을 찾아왔다. 한 골만 넣으면 승부는 끝난다. 종료 3초 전 문필희 선수가 던진 강슛이 상대 골키퍼의 왼손을 맞고 튀어나오면서 연장전에 돌입했다.

10분간의 연장전 경기. 연장 종료 20초 전까지 29-29로 맞서던 두 팀, 장소희가 왼쪽 다이빙 슛을 던졌다. 하지만 슛은 골포스트를 지나가면서 다시 10분간의 2차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2차 연장전에서 한국은 문필희가 중거리 슛과 바운드 슛을 연달아 작렬시키며 33-31로 앞서갔다. 그러다 8분께, 이날 경기에서 100분 넘게 분전하며 22개의 선방을 기록한 오영란이 덴마크의 슛을 또다시 막아냈다. 하지만 두 명의 폴란드 출신 심판은 오영란의 손에 맞고 끝줄 밖으로 나간 공의 소유권을 덴마크에 넘겨줬다. 오영란의 손에 닿지 않았다는 것이다. 규칙상 문지기의 몸에 맞은 공이 끝줄 밖으로 나갔을 때는 수비 팀에 공이 주어진다. 하지만 공은 오영란의 손에 맞았다. 명백한 오심이었다. 그 순간 오영란은 펄쩍펄쩍 뛰었다. 너무나 억울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승리를 결정지을 수 있는 순간은 이렇게 흘러갔다. 공격권을 넘겨받은 덴마크는 골을 성공시켰다. 경기 종료 26초 전, 김차연이 골을 넣으며 34-33. 우리가 한 골 차로 달아났다. 경기 종료 10초 전 덴마크의 카트리네 프루엘룬드가 던진 중거리 슛이 오영란의 방어를 뚫고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경기는 승부 던지기로 이어졌다.

박빙의 치열한 전투였던지라 선수도, 관중도 모두 머리털이 쭈뼛 설 만큼 긴장된 순간. 한국팀의 임오경과 문필희의 슛이 덴마크 골키퍼의 발에 걸렸다. 덴마크의 4번째 슈터 로엔데 헨리테의 볼이 네트에 꽂혔다. 2-4. 100분 넘게 이어지며 동점만 19번을 기록했던 치열한 전투는 이렇게 거짓말처럼 끝났다. 눈물과 허탈.

반전은 그 다음부터다. 세계적인 통신사가 “아테네 올림픽 최고의 명승부”라고 불러서 그런 게 아니라 국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선수들에게 미안해했다. 올림픽 때만 잠깐 관심을 보이고 이내 쳐다보지도 않았던 핸드볼. 1000여 개의 팀과 200여 개의 전용 체육관이 있는 덴마크를 상대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뜨거운 열정을 불태운 투혼에 감동을 받고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년)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돼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무엇보다 2004년 아테네 대회에서 보여준 선수들의 투혼은 우리 사회에 핸드볼에 대한 관심과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SK가 핸드볼의 지킴이를 자청하고 나섰고, 4개에 불과하던 여자 실업팀도 8개로 늘어났다. 핸드볼 전용 경기장도 만들어졌다.

그들이 선사했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불굴의 의지이고, 지금 핸드볼인들은 또 다른 최고의 순간을 만들기 위해 뛰고 있다.

지난 8월23일 10년 만에 화상전화로 덴마크 선수들과 만났다. 왼쪽 두 번째부터 허영숙·최임정·임오경·이상은. ⓒ 서울시체육회
에필로그

■ “너희들이 이해해야 돼. 언니들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은 노르웨이와의 4강전에서 종료 휘슬과 함께 터진 결승골로 인해 3, 4위전으로 밀렸다. 8월23일 베이징올림픽 여자 핸드볼 3, 4위전. 상대는 헝가리, 33-27로 한국이 앞선 종료 1분전. 임영철 감독은 작전타임을 불러 선수 교체를 지시했다.

빈약한 선수층 탓에 30대 중반까지 한국 핸드볼 대표팀을 위해 뛴 센터백 오성옥, 골키퍼 오영란·허순영 등 맏언니들은 그렇게 자신만의 마지막 올림픽을 가슴에 담는 특별한 순간을 맞았다.

■ 지난 8월23일 저녁 중랑구의 서울시체육회 사무실에 아테네 멤버 임오경·이상은·최임정·허영숙 선수가 모였다. 이들은 8200㎞ 떨어진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국 대사관에 모인 얀 퓌틀릭 당시 덴마크 감독과 요세핀 투라이 등 당시 우리의 ‘주적’이었던 8명의 선수를 화상전화를 통해 만났다. 주덴마크 한국 대사관과 서울시체육회가 주선한 ‘우생순 10주년’ 기념 행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한국 대사관저에 모인 덴마크 멤버는 감독 등 코치진 3명, 선수 5명으로 이들은 우리 대사관에서 준비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편집본을 이날 단체 관람한 후 화상전화에 나섰다. 덴마크에서 선수 생활을 한 허영숙과 최임정에겐 반가운 얼굴이 많았고 덴마크어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논란이 됐던 심판 오심에 대해 당시 덴마크 코치였던 킴 옌센은 “운이 좋았다”는 말로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임영철 감독처럼 지금도 덴마크 대표팀을 맡고 있는 퓌틀릭 감독은 2015년 덴마크 세계여자핸드볼선수권대회 개최 이전에 한국 국가대표 선수와 덴마크에서 평가전을 갖고 싶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 대한핸드볼협회는 요즘 기분이 좋다. 어린 시절 ‘우생순’을 본 ‘우생순 키즈’라고 할 수 있는 10대 후반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사상 처음으로 세계여자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데 이어 8월에는 난징 유스올림픽에서 여자 청소년 대표팀이 우승을 하고, 아시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남자 20세 이하 대표팀이 준우승 소식을 전해왔다.

아테네올림픽의 젊은 피에서 어느새 대표팀 최고참으로서 선수 이력의 마지막 아시안게임에 참가 중인 우선희는 “후배들이 든든하다”고 말했다.

 


이공주

아테네 대회에서 제일 기억나는 순간은 프랑스를 꺾고 결승 진출을 확정하던 때였다. 완전 축제 분위기였다. 내가 제일 잘한 경기이기도 하다. 결승은 진 경기라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나는 아테네올림픽 티켓이 걸린 마지막 대회인 2003년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대표팀에 발탁됐다. 내가 윙이었는데, 그 전 감독은 윙을 한 명씩 뽑았는데 임영철 감독으로 바뀌면서 한 포지션에 무조건 두 명씩 뽑았다. 그래서 대표팀에 들어갔다. 운도 좋았다. 세계선수권대회 3위, 올림픽 은메달, 도하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고 은퇴했다. 친구들이 짧게 대표팀 선수 생활을 하면서 할 것 다 했다고 부러워한다. 2007년 결혼해 강원도 양양에 정착했다. 핸드볼 보급을 위해 뛰고 싶지만 이 지역에 팀이 없는 게 아쉽다.

 

ⓒ 연합뉴스
오영란

23세 때인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때 대표팀에 발탁돼 2008년 베이징올림픽까지 뛰었다. 베이징 대회에서 감독님이 멋있게 끝낼 수 있도록 배려해주셔서 대표팀은 졸업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소속팀에서 플레잉코치로 뛴다. 내가 남녀 핸드볼 통틀어 최고령 선수(43)다. 선수 생활은 몸이 허락한다면 좀 더 하고 싶다. 언니들도 응원해준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라고. 나도 내가 이렇게 오래 선수 생활을 할 줄 몰랐다(웃음). 아테네 대회를 생각하면 ‘좀 더 잘 막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최선을 다했고 선수들도 ‘서로 미안하다’ ‘내가 한 골만 더 넣었다면…’이라고 말할 정도로 간절했다. 하지만 멋진 경기를 한 게 자랑스럽다. 우리가 그때 금메달 땄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기억해줄까. 멋진 경기를 한 게 자랑스럽고 후회도 없다.

 

 

장소희

2013년 리그를 끝으로 은퇴하고 일본에서 11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지금은 이와테 현에서 산다. 지난해 득점상도 타며 다시 전성기를 맞았지만 남편을 더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일본인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에 아테네 대회 결승전을 보고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TV에서 보던 그 사람이 나타나 자기랑 결혼한 게 ‘복권에 당첨된 것’이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2002~04년이 전성기였다. 2004년에 상이란 상은 모두 다 받고 올림픽도 나갔다. 물론 올림픽 준비는 죽을 만큼 힘들었다. 아테네 가기 전에 구급차만 4번 탔다. 지금도 태릉선수촌 경비아저씨가 나를 기억한다. 구급차 많이 탔다고. 그건 평생 못 잊는다. 너무나 준비가 힘들었기에 지면 정말 억울했다. 요즘은 그런 헝그리 정신이 없지 않나? 아테네 때는 언니들이 너무 잘했다. 내가 셔틀런을 하다가 쓰러진 것도 언니들이 너무 잘 뛰니까 지지 않으려고 죽어라 뛰다가 그런 것이다. 지금 애들은 ‘저 언니, 눈치 없이 왜 저렇게 빨리 뛰어’ 그러지 않을까(웃음). 아테네 선수촌에서도 매일 링거를 맞았다. 언니들이 쓰러질까 봐 무조건 맞게 했다. 그래도 아테네올림픽은 좋았다. 세계선수권대회도 큰 무대지만 올림픽은 아무나 나가는 경기가 아니지 않나. 화려한 경기장에 선 순간 연예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결승전 관중의 90%는 덴마크 응원단이었고 덴마크 응원단의 야유 소리가 크게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 연합뉴스
최임정

아테네 대회 때 제일 기억나는 일은 영란 언니 손을 맞고 나간 공이 우리 공이 돼야 하는데 심판이 오심을 한 것이다. 언니가 팔짝팔짝 뛰면서 심판에게 항의하던 장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선수들도 다 우리 볼이라고 생각했다.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그때 공격권을 얻었으면 우리가 이길 수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한 골인가, 두 골로 이기고 있었다. 충분히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게 고비였다. 좋았던 기억은 준결승에서 프랑스를 꺾고 어깨동무를 한 채 빙글빙글 돌 때, 그때 기분 정말 좋았다. 그때는 10년 뒤에도 운동하고 있을 줄 꿈에도 몰랐는데 지금도 운동을 하고 있다(웃음). 올해 3월 서울시청에 입단했다. 후배들 보면 기량이 과거보다 좋다. 다만 정신 면에서는 예전 언니들보다 처지는 것 같다. 그것까지 갖추면 더 잘할 것 같다.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사고’칠 것 같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해줘라. 

 

 

임오경

아테네 대회를 끝으로 대표팀 은퇴를 하고 39세에 선수 은퇴를 했다. 내가 노장 선수, 아줌마 선수 시대의 스타트를 알린 셈이다. 여자 선수는 이번 세계주니어대회 제패에서 보듯 항상 가능성이 열려 있다. 더 노력하면 지금 멤버들이 1990년대 멤버 못지않게 좋기 때문에 꽃을 피울 수 있다.

 

 

이상은

아테네 대회 결승전은 내 인생에서 최선을 다한 경기였고 그때는 안타까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행복하다. 그런 무대에서 그런 경기를 펼쳤다는 것, 그 경기를 계기로 영화도 나오고,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주기 시작했다는 것이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내가 덴마크에서도 1년간 뛰고, 애틀랜타 대회와 아테네 대회 결승전 상대가 모두 덴마크였다. 그래서 덴마크 선수는 미우면서도 친하다. 이번에 10주년 화상전화 행사 때 가보니까 선수들 얼굴 전부 알아보겠더라. 요즘 대표팀 후배들의 경기력이 많이 올라온 것 같다. 준비만 철저히 하면 좋은 성적이 있을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부상 방지다.

 

 

우선희

아테네 대회에서 센터백 이상은 선수가 44골로 득점 2위, 라이트윙인 내가 37골로 전체 득점 6위에 올랐다. 대회 ‘베스트 7’에도 뽑혔다. 그때는 내가 중간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공격수 중 가장 나이(37)가 많다. 국가대표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운동하다 보면 아플 수도 있고 회복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회복도 더디고, 몸 만드는 것도 예전처럼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치던 것들도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가정에서 내 역할도 있는 것이고. 남녀 동반 금메달로 좋은 매듭을 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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