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은 막장일 뿐 명작 아니다
  • 하재근│대중문화 평론가 ()
  • 승인 2014.10.0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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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장보리> 시청률 37% 극단적인 캐릭터와 자극적인 설정

MBC 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시청률이 37%까지 치솟았고 향후 40% 돌파까지 전망된다. 과거 인터넷 등 시청 경로가 다양하지 않았던 시절로 따지면 최소한 60% 시청률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갤럽에서 매달 조사하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에선 장기 집권하던 <무한도전>을 제치고 9월 1위에 올랐다. 줌닷컴에서 매주 발표하는 TV 인터넷 관심도에선 8월 말부터 4주 연속 1위를 달리고 있다.

한류의 <별에서 온 그대>, 작품성의 <정도전> 그리고 시청률의 <왔다 장보리>, 이 세 편이 2014년을 대표하는 드라마로 자리매김하는 분위기다. <별에서 온 그대>가 젊은 여성을, <정도전>이 중년 남성을 사로잡았다면 <왔다 장보리>는 중년 여성의 국민 드라마가 되고 있다. 중년 여성의 지지를 바탕으로 높은 시청률을 올리는 건 주말드라마나 일일드라마의 일반적인 경향인데 <왔다 장보리>는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젊은 세대의 지지까지 끌어낸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작품이 젊은 세대의 관심까지 받고 있다는 건 인터넷 관심도 1위에 올랐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포스터 ⓒ MBC 제공
2013년에 방영된 임성한 작가의 <오로라 공주>도 인터넷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받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비난이었다. 반면에 <왔다 장보리>는 찬사를 받는다.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정말 재미있게 보고 있다며, 이 정도면 막장 드라마를 넘어섰다는 평가도 내놓는다. 보리 역의 오연서는 스타덤에 올랐고, 연민정 역의 이유리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악녀로 떠올랐다.

시원시원하고 통쾌한 드라마

이 드라마는 <아내의 유혹>으로 막장 드라마의 새 역사를 연 김순옥 작가의 작품이다. <아내의 유혹>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속도감으로 시청자를 몰입시켰는데, <왔다 장보리>에서도 그 속도감이 유감없이 나타난다. 보통은 중대한 비밀이 마지막에 밝혀지며 악인이 파멸하게 마련인 데 반해 이 작품에선 수시로 진실의 폭탄이 터진다. 그때마다 악인이 여지없이 몰락하는 것처럼 비치지만 다음 회에선 거짓말처럼 다시 부활해 또 다른 긴장을 만들어낸다.

최근 막장 드라마계의 대표작으로 이 작품과 함께 <뻐꾸기 둥지>를 들 수 있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아 자기 새끼를 키우도록 하는 새다. <뻐꾸기 둥지>라는 제목에서부터 핏줄과 관련된 막장 스토리를 작심하고 전개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은 시작하자마자 대리모와 난자 바꿔치기 설정으로 파란을 일으켰다. 남의 아이를 키우는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아내의 유혹>에서 점 하나 찍고 변신했던, 저 유명한 복수의 여왕 장서희가 등장했다.

<아내의 유혹> 작가와 주연 배우가 각각 다른 작품으로 돌아와 경쟁한 셈이다.

결과는 <왔다 장보리>의 완승이다. <왔다 장보리>가 폭발적인 화제를 모은 반면 <뻐꾸기 둥지>는 난자 바꿔치기 설정으로 비난을 들었을 뿐 이렇다 할 반향이 없었다. <왔다 장보리>에선 착한 여주인공과 악녀가 모두 떴지만, <뻐꾸기 둥지>의 주인공들은 그러지 못했다. <뻐꾸기 둥지>는 극의 분위기가 답답하고, 무겁고, 질척질척했다. 반면 <왔다 장보리>는 경쾌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부담 없이 재미있게, 막장이라는 생각까지 잊어가며 빠져들었다.

<왔다 장보리>의 경쾌함을 만들어낸 건 앞에서 지적한 속도감과 함께 요소요소에 등장한 코믹함이었다. 남녀 주인공의 러브라인부터가 코믹했다. 남주인공이 ‘나 잡아봐라~’ 하고 도망가면 여주인공이 ‘잡히면 뒤진다’라고 하면서 쫓아가는, 마치 시트콤 같은 설정이 이어졌다. 엄격한 가부장 캐릭터인 한진희와 악녀의 또 다른 축인 금보라마저 때때로 시트콤 설정에 가세한다.

가장 강력한 MSG(조미료)인 악녀 캐릭터도 한두 명이 아니다. 대표적 악녀 연민정을 비롯해, 연민정의 친모(보리의 양모), 보리의 친모(연민정의 양모), 남주인공의 계모(연민정과 보리의 시모) 등 무려 4명의 악녀로 블록버스터급 물량 공세를 퍼부었다. 이들에겐 모두 절박한 이해관계와 비밀이 있는데, KGB 같은 정보력을 보유한 연민정이 그것들을 얄밉도록 잘 활용해 때론 원수, 때론 동지라는 현란한 이합집산·합종연횡을 펼쳐 마치 <삼국지>를 보는 것 같은 쾌감을 안겨줬다.

최근 종영한 <유혹>은 권상우·최지우·이정진·박하선 등 특급 캐스팅에 불륜 소재라는 선정적 ‘떡밥’까지 장착했음에도 호응을 얻지 못했다. 캐릭터가 답답했기 때문인데 거기에 남의 가정을 파탄 내는 불륜 재벌녀가 순정녀처럼 묘사되는 선악의 전도로 비난까지 들었다. 반면에 <왔다 장보리>의 캐릭터는 화끈하다. 보리는 지나치리만치 화끈하게 착하고, 연민정은 정말 극단적으로 악하다. 선악에 대한 보상과 징벌도 정확하다. 착한 보리는 뭘 해도 다 잘되고 악한 연민정은 지속적으로 처벌받는다. 때문에 시원시원하고 통쾌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에서 배우 이유리가 ‘악녀 연민정’으로 분해 연기를 펼치고 있다. ⓒ MBC 제공
막장 넘어선 국민 드라마인가

요즘 들어 ‘성공한 막장은 막장이 아니다’ 혹은 ‘재밌는 막장은 막장이 아니다’라는 논리가 자주 등장한다. <왔다 장보리>의 경우도 워낙 성공하다 보니 ‘막장을 넘어선 국민 드라마’라는 식의 기사가 나왔다. 정말 그럴까.

막장 드라마는 도식적이고 자극적인 설정으로 재미를 극대화해 시청률을 올리려는 상업주의의 정점이다. 따라서 시장에서의 성공은 막장 드라마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건 내용이다. <왔다 장보리>는 막장 드라마의 공식을 도식적으로 답습한다. 교통사고, 기억 상실, 살인, 납치, 계모, 후계자 경합, 경영권, 재벌 며느리, 모든 비밀을 알아채는 능력을 소유한 극단적 악녀, 구박받는 착한 여자, 운명의 뒤바뀜, 핏줄 찾기 등 익숙한 MSG 코드가 버무려진 것이다. 그것이 워낙 자극적으로 잘 배합돼 재미를 주니까 성공하고 찬사를 받은 것인데, 그렇다고 막장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막장을 넘어선 국민 드라마’가 아니라 ‘막장이라서 국민 드라마’라고 봐야 한다. 자극적으로 만드니까 시청률이 올라간다는 이야기다.

음식 매체가 MSG와 나트륨을 듬뿍 쳐 자극적으로 만든 음식을 웰빙 식단이라고 소개하면 정말 정성스럽게 만드는 음식점은 씨가 마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단지 시청률이 높다는 이유로, 막장에 면죄부를 주는 행태는 우려스럽다. 방송사가 막장 드라마에 올인하는 것도 상업주의이고, 매체가 시청률이 작품성을 결정짓는다는 듯한 논조를 보이는 것도 상업주의가 팽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이면 어떤 작가가 취재와 치밀한 준비에 시간을 들이면서 극본을 쓰겠는가. 말이 안 되더라도 그저 극단적인 캐릭터와 자극적인 설정을 경쾌하게 버무리기만 하면 돈과 찬사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는데 말이다. 바야흐로 막장이 명작이 되는 시대가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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