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것들을 되살려야”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4.10.0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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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쾰른 에렌펠트의 ‘동네 만들기’ 프로젝트 현장을 가다

서울 서촌과 제주도는 한국의 많은 사람이 즐겨 찾고, 살기를 꿈꾸는 곳이다. 대안적 삶을 꾸려나가는 이들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점차 입소문이 퍼지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서울 홍대 앞과 상수동 일대, 삼청동 일대의 전례가 쓰라리기 때문이다.

이 지역들은 지난 10년간 급격하게 얼굴을 바꾸었다. DSLR(Digital Single Lens Reflex) 카메라를 목에 건 주말 나들이객과 이들의 발길을 붙잡으려는 상업 자본이 몰려들어 관광지화되면서부터다. 천정부지로 솟는 임대료와 권리금 때문에 결국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 이들과 토박이들이 밀려났다. 한바탕 유행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어딜 가나 있는 프랜차이즈 가게뿐이고 그 지역의 독특한 색채는 허망하게 사라지고 없다. 영국의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는 이러한 현상에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젠트리피케이션은 ‘고급 주택화’로 번역되지만, 이 표현에서는 왠지 밀려난 이들의 사연보다 ‘부동산 대박’을 좇는 이들의 욕망이 더 진하게 묻어난다.

‘뜨는 동네’ 서촌에서 돈 냄새가 아닌 전혀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이들도 있다. 서촌주거공간연구회를 꾸려 활동하는 주민과 상인들이다. 이들은 문화재 보존 운동을 통해 서촌의 공간적 특색을 지키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동네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며 겨울철 김장 담그기, 혹서기 생수 배달 등 동네 행사도 연다. 인구 1000만의 거대 도시 서울에서 그들만의 동네 공동체를 가꾸려는 것이다.

에렌펠트의 ‘동네 만들기’ 프로젝트를 위해 무가지 ‘페델풍커’를 제작하고 있는 둔야 카라바이치(오른쪽)와 니카 람스. ⓒ 강성운 제공
주민들 내세운 마을 잡지로 참여 유도

지역 특성을 보존하고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한 자생적 동네 활동은 독일에서도 관찰된다. 쾰른 서부의 옛 공업지대인 에렌펠트(Ehrenfeld)가 그 무대다. 인구가 100만 남짓인 쾰른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속도와 규모는 서울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느린 화면으로 운동 경기 장면을 돌려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명료하게 보이듯 변화가 느린 독일의 사례는 흐름이 빠른 한국 사회에서 놓치기 쉬운 것들을 포착해 보여준다.

19세기 말부터 쾰른의 대표적인 중공업단지로 기능하던 에렌펠트 지역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경제 성장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1970년대부터 주거·상업 지구로, 다시 반세기 만에 대안 문화와 다문화 실험의 터로 모습을 바꾸었다. 옛 공장 노동자 거주 지역이 아틀리에와 디자인사무소, 맥줏집과 케밥집, 교회와 이슬람 사원이 나란히 서 있는, 대안적인 동네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곳에도 젠트리피케이션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입소문을 타면서 평균 임대료가 쾰른 최고 수준에 이르렀고, 옛 공장 건물에는 예술가의 작업실 대신 고급 레스토랑과 세계적인 디자인회사의 지사가 들어왔다. 이러한 추세는 8월8~10일에 에렌펠트의 중앙로인 펜로어 가(街)에서 열린 거리 축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지방자치단체가 주도한 이 축제에는 전국 어느 먹거리 장터에서나 볼 수 있는 조잡한 판매대와 자동차업체의 홍보 부스가 즐비해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거리 축제가 열린 이틀 후인 8월12일, 펜로어 가와 닿은 작은 샛길에 위치한 디자인사무소 라보어 그륀(labor gruen)을 찾았다. 독일어로 ‘녹색 실험실’이라는 뜻인 라보어 그륀의 사무실은 20㎡ 남짓한 규모인데 동네에 있던 피아노 학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단출하고 정감 있게 꾸며져 있었다. 구성원도 둔야 카라바이치와 니카 람스 단 두 명뿐이다. 이들은 지난해 9월부터 ‘에렌펠트를 이어주는 잡지’를 모토로 무가지 ‘페델풍커(Veedelfunker)’를 만들고 있다. 매호 분량은 앞뒤 표지를 포함해 28쪽이고 크기는 작은 단행본 사이즈에 불과하다.

그러나 ‘페델풍커’는 단순한 동네 소식지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환경 운동과 동네 운동, 디자인 등 언뜻 보면 서로 상관이 없을 법한 세 분야를 기발한 방식으로 결합시켜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카라바이치는 “디자인은 다른 행동과 생태적 감각을 이끌어내는 도구이며 우리는 잡지를 통해 ‘지속 가능성’이라는 개념에 구체적인 내용을 부여했다”고 설명했다. 이 잡지는 독립 디자인 프로젝트로는 드물게 유럽 최대 규모의 환경재단인 독일연방환경재단(DBU)의 지원을 받고 있다.

‘페델풍커’는 매달 하나의 주제를 정해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생태 친화적 생활 방식을 소개하고, 별책부록 격으로 ‘이달의 실천’ 행사를 마련해 지역 주민의 참여를 유도한다. ‘에렌펠트, 식물을 심다’라는 주제를 다룬 2014년 5월호에서는 표제 기사로 옛 에렌펠트 화물기차역을 정원으로 꾸미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뒷표지에 ‘세계의 정원 만들기’ 광고를 실었다. 2차대전 중에 없어진 옛 유대교 회당 터 옆에 전 세계의 식물을 심는 행사였다. 행사 당일인 5월9일에는 100여 명의 시민이 세계 각지의 모종과 씨앗을 가지고 나와 정원을 만들었고, 이는 다시 6월호에 ‘에렌펠트에 다양성과 관용을 상징하는 정원이 새로 탄생했다’는 내용의 후기로 실렸다. 단순히 잡지에 재생지를 사용하고 ‘녹색 칠’을 하는 대신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실천, 나아가 지역 공간을 디자인한 것이다.

에렌펠트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을 표지 모델 겸 표제 기사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잡지를 100여 곳의 가게에 무료로 배포한다. 은근하고 부드러운 톤으로 “환경 문제는 곧 우리 동네의 일이고,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덕분에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개최한 물물교환 행사에는 500명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서촌의 활동가여, 우리에게 물어보라”

인터뷰 말미에 람스는 “대도시인 쾰른에서 왜 동네(Veedel)가 중요하냐”고 묻자 인상적인 대답을 했다. “도시화의 목적지는 무엇인가. 도시인들은 정작 중요한 목표는 잊고 정신없이 바쁘게 산다. 하지만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웃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고 서로 열려 있는 등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것들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도시 공간에서) 되살리고 싶다.”

‘페델풍커’의 두 디자이너를 비롯한 쾰른 에렌펠트의 지역 활동가들은 8월 말 펜로어 가에서 거리 축제를 열었다. 축제의 이름은 ‘좋은 인생의 날’. 이날은 이 도로의 차량 통행이 금지되고 영리단체와 기업은 참가가 불가능했다. 쾰른의 상습 정체 구간이자 복잡한 상점가가 하루 동안 다시 주민들의 차지가 된 것이다. 지난해 처음 열린 ‘좋은 인생의 날’에는 사람들이 소파를 가지고 나와 햇볕을 쬐거나 식탁을 가지고 나와 길에서 음식을 나눠 먹고 담소를 나눴다. 뜨거운 반응 덕분에 올해는 쾰른 남부의 쥘츠(Slz)에서도 같은 행사가 열린다. 카라바이치는 “서촌의 동네 활동가들에게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전해달라”며 웃는 얼굴로 작별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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