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복원’ 아닌 ‘재건’했어야”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 승인 2014.10.3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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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폐허 도시 그단스크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재건

숭례문, 아니 필자가 어렸을 적에는 남대문이 통상적인 이름이었다. 지금은 ‘새로운’ 숭례문이 다시 서울의 관문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새 숭례문을 바라보면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2008년 2월 토지 보상에 불만을 가진 한 사람이 불을 질러 누각을 받치는 석축만 남긴 채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우리는 망연자실 TV를 통해 현장을 지켜보며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이내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어느 날 대통령이 국민 성금으로 ‘복원’하자고 국민의 자존심과 애국심에 호소하더니 어떤 이는 애써 기른 소나무를 기증하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해서 5년 3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2013년 드디어 다시 그 위용을 찾았다. 복원(?)에 연인원 3만5000여 명이 동원되고, 277억원이라는 예산이 들어갔다. 여기에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무형문화재인 대목장과 소목장, 제와장, 단청장 등이 동원됐다. 우리는 남대문을 떠나보내고 전통 기술로 복원된 숭례문을 다시 만났다고 기뻐했다. 그 기쁨도 잠시뿐, ‘전통 기술’로 복원된 숭례문은 준공식이 끝나기 무섭게 민낯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7월7일 수사관과 국과수 직원이 숭례문 단청의 부실 시공을 조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돌아왔다고 반겼던 숭례문의 성벽은 벌어지고 기둥은 갈라지며, 성벽 내부 돌 구조물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도 아닌 것이 배부름을 발현하고 단청은 군데군데 벗겨지기 시작하더니 총체적으로 517곳에서 문제점이 발견됐다고 한다. 완공된 지 1년도 안 돼 벌어진 일이다. 여기에 만약에 화재가 났을 경우 적정한 소방용수조차 확보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새 숭례문은 화려하고 위풍당당한 겉모습과는 달리 속병이 든 ‘돌아온 탕자’였던 셈이다. 이런 총체적 부실의 원인을 전문가들은 무리한 ‘공기 단축’과 ‘전통에 대한 무리한 고집’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한다.

부실과 비리의 복마전처럼 얼룩진 숭례문을 바라보다 문득 얼마 전 다녀온 폴란드의 그단스크와 바르샤바가 떠올랐다. 바르샤바의 구도심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단스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오늘날 두 도시는 부활해 우리 앞에 위용을 자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당하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숭례문, 부실과 비리의 복마전

바르샤바도 아름답지만 그단스크 역시 매우 아름다운 작고 정겨운 도시다. 어떤 이들은 체코의 프라하보다 아름답다고 한다. 아마도 구도심에 재건된 그단스크의 건축물을 보고 하는 말일 터이다. 그단스크의 역사는 매우 깊어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2세기 이래 독일의 상인들이 이주해 와 1224년 독일의 도시권을 획득하고, 1361년 한자동맹에 가맹해 동부 유럽의 주요 항구로 번성했던 곳이다. 그래서 독일어로는 단치히라고 불리기도 한다. 1793년 프로이센령이 됐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자유도시가 됐지만 1939년 독일이 병합을 요구하면서 폴란드를 침공해 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말 그대로 초토화된 그단스크는 도시를 제대로 중창 또는 재건하는 것이야말로 히틀러에게 제대로 복수하는 것이라는 결기마저 느껴지게 했다. 그단스크의 재건은 합리적이며 실리적으로 진행됐다. 그단스크 재건협의회가 구성되고 과거를 복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12세기부터 만들어진 건축물의 도면이 있을 리 없었다. 그때 고증과 검증 작업을 도와준 것은 그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재건을 두고 논쟁이 극에 달했다. 문제는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였다. 그들은 로테르담·민스크·드레스덴·코벤트리·바르샤바·베를린 등을 전례로 삼았다.

하지만 전통과 현대성은 여전히 딜레마였다.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수많은 토론을 거쳐 역사의 실재를 재구성하는 한편, 현대와 역사적 가치를 융합해 “새롭고 매력적인 행복 도시”를 향해야 한다는 미술사학자 마이클 바리키(Michał Walicki)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역사적인 재구성을 통해 근대적인 성격의 완전한 재건이라는, 사회 구성원들이 동의하는 공통의 목적을 설정한 후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지만 간단없이 ‘오래됐지만 새로운 그단스크’를 완성했다. 이런 기조는 1980년대까지 지속됐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들은 여전히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방식으로 현실을 볼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믿고 그들을 신뢰하면서 기다려주었다.

폐허가 된 그단스크(위 사진)와 재건된 그단스크. ⓒ 정준모 제공
수많은 토론 거쳐 역사의 실재 재구성

이렇게 사회적인 합의와 이해를 바탕으로 재건의 목표를 설정하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 오늘의 그단스크를 만들었다. 한데 숭례문 복원은 이런 사회적인 합의 없이 오직 ‘전통 그대로 복원’한다는 원칙 하나만으로 시작됐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했다.

사실 숭례문 복원 사업이 과도하게 이벤트성 사업으로 이끌려가고, 대통령 임기 내에 완성한다고 공기를 단축할 때부터 불행은 예견됐다. 숭례문에 쓰일 기와를 굽는다고 공장을 짓고 화입식을 하거나 서울시내 한복판에 임시로 전통 대장간을 만들고 담금질을 하는 등의 이벤트가 그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제대로 복원을 했다면 누가 무어라 할까만. 불행하게도 일반적인 건축공사에서 발생할 수 있는 총체적인 부실과 비리로 얼룩진 사업이 되고 말았다.

복원을 논의하던 때부터 많은 사람이 지적했다. 과연 ‘복원’이 가능한 것이냐고. 전통 기술도 좋지만 새로운 기술을 적용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숭례문을 건설해야 한다고 말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전통 단청 기법’을 사용한다고 나서더니 결국 누더기 단청으로 우리의 자존심만 상하게 만들고 말았다. 사실 문화재를 복원하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불가한 일이다. 왜냐하면 옛날의 기법과 재료를 써서 그대로 다시 만들어낸다는 것인데 이것이 가능할까. 전통 방식으로 재건했을 경우 과연 조선시대의 건축 공법이 오늘날 서울의 독한 대기오염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하긴 존 러스킨이 말한 것처럼 “복원은 건물에 가해질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 건축에서 언젠가 위대하고 아름다웠던 것을 복구하는 것은 마치 죽은 자를 깨우는 것처럼,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복원은 말 그대로 원래 건축물의 구조와 재료와 마감을 있는 그대로 현대적인 기술과 공법으로 그림자처럼 살려내는 것”이라는 건축의 복원 및 재생 건축을 공부한 김희건의 견해가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전통 방식 그대로 복원했다’는 숭례문의 부실한 복구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복원’과 ‘재건’에 대해 생각해보자. 복원이란 ‘원래대로 회복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수리와 수복, 이건 등으로 나뉜다. 불가능한 복원보다는 ‘콘크리트 광화문’의 재건이 오히려 적절하고 타당한 것은 아닐까. “문화재를 복원하는 데 기준은 없다. 중창이나 재창이라는 말을 써야 하며 ‘옛날 그대로 되살린다’는 뜻의 복원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한 건축가 고 김동현의 말을 곱씹어보게 된다.

전화와 화재와 약탈로 얼룩진 우리 문화사의 트라우마가 빚어낸 자격지심이 전통 그대로의 복원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전통과 창조는 결국 시대와 주체의 문제다. 전통은 ‘과거’가 아닌 ‘지금’, ‘우리’가 아닌 ‘나’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복원에 대한 사회적 강요보다는 재건에 대해 열린 논의가 필요하다. 글을 쓰다 보니 불과 3년 전 숭례문을 복원한 이들이 완공한 광화문은 과연 안녕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보나 보물이 아니라서 관심권 밖에 있다면 이것도 미래의 문화재에 대한 도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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