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아이들 식판 뒤엎는 치졸한 정치 싸움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4.11.1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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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무상보육은 내 자식, 무상급식은 남의 자식’ 논란 촉발 홍준표·남경필 등도 가세

이런 상상을 해보자. 당신의 마음속에 일종의 평형 저울이 있다. 저울의 한쪽엔 유아의 한 끼 이유식이 지닌 가치를, 그 반대쪽에는 초등학생의 점심 급식이 지닌 가치를 얹어놓는다. 그러면 과연 평형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울까. 어느 특정 연령대의 자녀를 둔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둘 다 공히 아이들의 배를 채운다는 점에서 이유식과 급식이 지닌 가치의 경중을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위한 복지를 단순히 과학적 중량으로 환산할 성질이 아니라는 데 이견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상상 속의 평형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 수 있다는 논리를 철저히 믿는 이들이 있다. 무상보육과 무상급식 등 복지정책을 둘러싸고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이른바 ‘복지논쟁’은 이런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는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은 엄청난 철학적 담론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저 아이들에게 줘야 할 복지 혜택의 크기를 적당히 저울질해보겠다는 옹졸한 심보나 다름없다.

ⓒ 일러스트 신춘성
2011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로 촉발된 후 소멸됐던 복지 논쟁이 재점화됐다. 또 아이들의 식판 때리기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복지 논쟁의 2라운드는 박근혜정부의 대선 복지 공약 중 하나인 누리과정(만 3~5세 보육료 지원·무상보육) 정책 예산을 시·도교육청으로 이관하는 과정에서 재정난을 토로하는 지방정부·교육청의 주장과 교육청의 누리과정 예산 배정은 법적 의무 사항이라는 중앙정부의 주장이 대립한 것이 논란의 단초가 됐다. 하지만 무상 복지 논란 2라운드는 순수한 의미의 정책 논쟁이 아니다. 정책 현안인 무상보육에만 논란이 국한되지 않은 양상이기 때문이다. 무상보육 재정 이관을 두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보수 단체장과 진보 교육감 간 책임 공방이 무상급식으로 비화된 것이다. 청와대와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정책 추진과 여야 간 정략적 이해득실에 따라 주판알을 퉁기는 대한민국 정치가 치졸한 복지논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무상보육 문제없다” 큰소리치더니

이른바 무상복지 논쟁을 촉발시킨 누리과정은 2011년 국회에서 합의돼 2012년부터 도입됐다. 도입 초기는 만 5세와 소득 하위 70%의 만 3~4세 어린이 보육비를 지원하는 제한적인 지원책이었지만, 2013년 3월부터 소득 구분 없이 모든 만 3~5세 어린이에게로 지원이 확대됐다. 선별적 복지에서 보편적 복지로 확대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당시 누리과정 확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당시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0~5세 보육 및 유아 교육 국가완전책임제 실현’을 선언하고 “국가 보육 및 유아 교육을 위한 예산의 안정적 확보”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당시 공약에는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만 3~5세 누리과정의 지원 비용을 증액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11월9일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이 누리과정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런데 9월18일 정부가 누리과정을 직접적인 국고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면서 지방자치단체와 교육청의 반발을 샀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정부가 누리과정의 예산 조달 방안으로 무상급식 예산을 대안으로 내건 것이 논란에 기름을 끼얹었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의 무상보육과 무상급식 연계로 논쟁은 더욱 정쟁화되는 양상이다. 황우여 교육부장관은 “무상급식 예산 5000억원을 무상보육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은 11월9일 “(시·도교육청이) 무상급식에 많은 재원을 쏟아붓고, 누리 사업에 재원을 투입하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누리 사업은 각종 법률과 시행령을 근거로 의무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인 반면, 무상급식은 법적 토대가 없다는 점을 논리로 내세웠다. 특히 안 수석은 “무상보육은 대선 공약이고 무상급식은 대선 공약이 아니다”고 밝혀 논란을 증폭시켰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최근 “무상 복지의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무상보육이 최고 우선”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내 공약, 네 공약’ 논쟁이 불거지면서 여야 간, 보혁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11월4일 무상급식 갈등을 겪는 홍준표 경남도지사(왼쪽)와 박종훈 경남도교육감이 도의회 본회의장 앞에서 마주쳤지만 서로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잠룡’ 홍준표·남경필, 무상급식 외면
 

일각에서는 청와대와 정부·여당이 그동안 지방 재정 고갈을 우려하는 지방정부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정책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지방정부들은 누리과정으로 인해 재정에 부담이 전가된다는 점을 거듭 밝혀왔다. 2013년 1월 ‘만 0~5세 전면 무상보육’ 예산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자, 박원순 서울시장은 “무상보육 국고보조율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2월 전국시도지사협의회와 광역시장협의회 등도 무상보육 지방 재정 부담 경감을 연이어 요청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무상보육 추진에는 문제가 없다는 점만 강조했다. 누리과정의 지방 재정 부담이 지방정부의 반발을 사는 와중인 지난해 6월, 진영 당시 보건복지부장관은 “정부가 약속한 무상보육은 (추진에)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무상보육의 차질 없는 시행이라는 공염불만 외치다, 뒤늦게 ‘무상급식 삭감 통한 무상보육 추진’이라는 떠넘기기 수를  정부·여당이 꺼내든 것이고, 이에 대해 야당은 책임 회피라며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무상급식을 정책 의제화한 것은 야권과 진보적인 시민교육단체지만, 2011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반대투표 무산으로 무상급식에 대한 공론화는 이미 상당 부분 이뤄졌다는 평가가 많다. 무상급식 정책은 지원 규모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현재 전국 1만1000여 개 초·중·고교 중 72.7%가 지자체의 형편에 따라 시행하고 있다.

무상급식을 두고 여권의 대권 잠룡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의 언행도 복지정책에 대한 건전한 논의보다는 정쟁화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11월3일 경남도교육청에 대한 무상급식 예산 지원 전면 중단을 선언하면서 논란에 불을 질렀다. 남경필 경기도지사도 경기도교육청의 무상급식 예산 30% 지원 요청을 거부하면서 무상급식 때리기에 가세하고 있다.

특히 홍 지사는 공공의료 훼손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진주의료원 폐쇄를 강행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일각에서는 홍 지사가 무상급식을 고리로 ‘보수 대 진보’ 진영 싸움으로 몰아가려고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더욱이 무상급식을 둘러싼 홍 지사의 말 바꾸기 논란이 일면서 “홍 지사가 무상급식을 때려 보수 진영에서 자신의 몸값을 올리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홍 지사는 무상급식 예산 지원 중단과 관련해 “정치적·법적인 의무 아무것도 없다”며 “그걸 왜 내 책임으로 돌리나. 무상급식을 공약한 바도 없는데…”라고 말했다. 하지만 홍 지사는 한나라당 의원 시절인 2010년 “무상급식은 얼치기 좌파들이 내세우는 국민 현혹 공약”이라고 비판한 것과 달리, 2012년 도지사 보궐 선거 당시에는 “무상급식이 국민의 뜻이라면 그대로 실시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2012년 도지사 당선 후 취임식에서 홍 지사는 “무상급식과 노인 틀니 사업 같은 복지 예산이 삭감되는 일이 없도록 재정 건전화 특별대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고도  했다.

예산 고갈되는 내년 봄, 극심한 혼란 불가피

그런데 지난해 11월 재정 부담을 이유로 무상급식 예산을 160억원 삭감했다가, 지방선거를 앞둔 올 2월 이를 원상 복구하면서 선거를 염두에 두고 말 바꾸기를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에 대해 홍 지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12년 경남도지사 보궐 선거 때는 전임 김두관 지사가 세워놓은 것을 따랐던 것뿐이다. 보궐 선거에 당선됐다고 해서 전임 지사의 정책을 송두리째 뒤엎을 수는 없었다. 재선되면서 ‘홍준표 정책’을 펴나가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김지수 경남도의회 의원은 “홍 지사는 지사 취임 후 ‘도지사 지시 사항’으로 무상급식을 점검해오다가 돌연 무상급식 지원을 삭감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며 “자기의 입장에 따라 말을 바꾸는 것은 도정을 책임지는 수장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다”고 말했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복지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와 여당은 ‘무상보육이냐, 무상급식이냐’ 두 가지 정책을 두고 마치 양자택일하라는 식으로 압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이 과정에서 야권과 정책적 대립각을 세우며 중앙 정치에서 위상을 높이려는 카드로 사용하려는 정치인의 언행까지 겹치면서 복지 논쟁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각 교육청이 편성한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은 3~6개월분 정도로 내년 봄부터는 본격적으로 바닥을 드러낼 전망이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의 강경 일변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무상급식 재정 부실화 도미노 현상은 불가피하다. 정치권의 대립과 정쟁이 빚어지는 사이, 교육복지 대란을 향한 시곗바늘이 지금도 째깍째깍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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