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는 시대’ 싸가지를 논하다
  • 노정태│<논객시대> 저자 ()
  • 승인 2014.11.1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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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유시민·진중권·김어준·전원책 등 5인의 논객

대중을 향해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사람은, 어느 한쪽으로부터는 곱지 않은 소리를 듣는다. ‘꼴통’ ‘또라이’ ‘현실을 모르는 청맹과니’ ‘무개념’ 등등. 이 중 단 하나만 꼽자면 ‘싸가지’다. 사회적 통념과 예의의 선을, 어쩌다가 혹은 일부러 살짝 넘으면, 대중으로부터 혹은 논쟁 상대방으로부터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소리가 돌아오게 마련이다.

지난여름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책을 통해 ‘진보는 싸가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덕분에 ‘싸가지’라는 단어와 개념 자체가 다시 한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하여, 그런 비난을 가장 많이 들었을 법한 다섯 명의 논객을 모아봤다.

본격적인 정치 담론 시대 연 싸가지 논객

강준만과 유시민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논객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진중권은 2012년 대선까지 분야를 넘나들며 ‘말의 전장’을 누볐고, 지금은 방송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은 2012년 대선에서 ‘나꼼수 열풍’을 주도했다. 마지막으로 변호사 전원책은, 진보 논객의 ‘말빨’이 서서히 시들어갈 무렵부터 주로 방송 무대를 통해 보수화되어가는 대중, 특히 젊은 남성의 지지를 얻어냈다.

ⓒ 인물과사상사 제공, ⓒ 시사저널 이종현, ⓒ 시사저널 포토
■ 강준만

‘정치는 친구와 적의 구분’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한국의 담론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나선 인물이 바로 강준만이다. <김영삼 이데올로기> <김대중 죽이기> <전라도 죽이기>라는 세 권의 책과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연달아 네 권이나 쏟아져 나온 ‘저널룩’ <인물과 사상> 시리즈를 통해 강준만은 ‘실명 비판’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지나친 추상과 관념이 판을 치는” 글쓰기, “오직 ‘싸잡아’ 비판하는 문화만이 발달돼 있는” 현실을 넘어서고자 한 것이다.

‘점잖지 못하다.’ 젊은 시절의 강준만이 가장 많이 들었던 비판이다. 그는 정치가 ‘점잖은’ 사람들이 ‘점잖게’, ‘나랏일’을 돌보는 것이라는 전통적·유교적 관념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화끈하게 ‘씹고’, 화끈하게 ‘빨아주는’ 정치적 글쓰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처음에는 김대중을, 그다음에는 노무현을 밀어주기 위해 그는 그 정치인의 이름이 제목에 박힌 단행본을 펴냈다. 강준만 이후의 그 어떤 정치 논객도 강준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그래서다. 그는 실명 비판이라는 하나의 양식을 도입함으로써 정치 담론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물론 그 언어는 종종 심하게 거칠고 인격 모독적이었다. 강준만이 조선일보의 이한우 기자를 향해 “스승의 등에 칼을 꽂은 살인청부업자”라는 표현을 썼고, 그에 분노한 이한우가 강준만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했으며 그 고소에 반발해 홍세화가 팔을 걷어붙임으로써 ‘안티조선’ 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된 것은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강준만 자신도 스스로의 ‘싸가지’ 없었던 언어 사용을 인정한다. “나는 논쟁은 매우 정중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나 역시 그러지 못했던 사람으로서 누구를 탓할 자격도 없다.” ‘싸가지 없는’ 화법을 개척했던 당사자가 최근작 <싸가지 없는 진보>에서 하는 말이다. 적과 아군을 확실히 구분하고 거침없는 비판과 조롱을 쏟아내는 화법은, 야권 내의 분열이 가시화되면서 범야권의 내분을 심화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야권이 국민의 지지를 잃게 만들고 있다고, 돌아온 강준만은 말하고 있다. 실명 비판의 깃발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이제 강준만은 ‘싸가지의 회복’을 주장한다.

■ 유시민

정치적 담론의 영역에서 ‘싸가지’라는 단어를 이야기할 때, 사실 유시민의 이름은 강준만보다 앞서 등장해야 한다. “사적 영역에서 쓰이던 싸가지가 공적 담론의 영역으로 진입한 때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으며, “김영춘의 유시민 비판 사건이 결정적 계기”였다. <싸가지 없는 진보>에 따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책을 조금 더 인용해보자.

“2005년 3월25일 여당인 열린우리당 386 초·재선 의원 모임인 ‘새로운 모색’의 공동대표 김영춘은 유시민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유시민에 대한 비판을 종합해보자면 가장 앞서는 것이 ‘진실성의 결여’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옳은 소리를 저토록 싸가지 없이 말하는 재주는 어디서 배웠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 ‘유시민 어록’이라고 검색해보면 그의 장점과 단점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 등 베스트셀러를 내고, MBC <100분 토론>을 진행하기도 한 유시민은 탁월한 언어적 재능을 십분 활용해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가 쓴 책과 칼럼뿐 아니라 현장에서 툭툭 내뱉는 말은 ‘아군’을 결집시키는 굉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그만큼 상대방을 분개하게 했다는 것이다. 가령 한 TV토론 자리에서 전여옥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여당은 미리 야당의 정치적 공세, 대통령 탄핵까지 포함하는 공격에 대비했어야 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네, 반성합니다! 야당의 그 무한한 권력욕에 대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횡포함에 대해서 미리 충분히 지각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인정하고 반성하고 국민 앞에 사과합니다.”

뜨거운 지지층을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 더 차가운 ‘안티’를 보유하고 있는 그가 대중 정치인으로 생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2010년 경기도지사에 출마한 그는 젊은 층으로부터 적잖은 지지를 받았지만 노령층의 압도적인 ‘비토’로 고배를 마셨다. 자신에게 붙은 ‘싸가지’의 꼬리표를 어떻게 떼어내느냐 혹은 관리하느냐에 따라 정치인 유시민의 재기 가능성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진중권

진중권은 ‘인터넷 논객’의 원조 격에 해당한다. 독일에서 공부했지만 박사 학위를 얻지는 못한 채 귀국한 미학도 진중권은 21세기와 함께 새롭게 열린 언어의 전쟁터에 기꺼이 뛰어들었다. 인터넷이 시끌시끌할 때, 많은 경우 그 중심에 진중권이 있었다.

오늘날의 진중권만을 아는 사람은 그가 남긴 숱한 실언을 잘 알지 못한다. 2004년 대우건설 전 사장 남상국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의 친형인 노건평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혐의를 받았고 며칠 후 자살했다. 그러자 진중권은 “그걸 민주열사인 양 정권의 책임인 양 얘기를 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되고, 앞으로 ‘자살세’를 걷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시체 치우는 것 짜증 나잖아요”라고 조롱했다. 2009년 해당 발언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며 반성의 뜻을 밝혔다.

‘자살세 논란’은 진중권이 활동하던 시절 인터넷 여론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에는 주로 그때의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인터넷 여론을 대부분 점하고 있었고 야당이던 한나라당의 지지층은 전통적인 매체인 신문을 주로 활용했다. 보수적인 일간지에 칼럼이 올라오면 그것을 인터넷에서 돌려 읽고 비판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인터넷은 당시의 젊은 층에게 일종의 해방구 노릇을 했고 그들의 발언은 종종 ‘수위’를 넘었다는 뜻이다.

진중권은 한국 사회 전체 혹은 자신을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2005년 황우석 사건 전개 과정에서 진중권은 당시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익도 중요하지만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수차례 내보냈다. ‘싸가지’를 넘어 ‘매국노’로 취급당했지만 진중권은 굽히지 않았다. 심형래가 <디 워>를 내놓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해외에서 천문학적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우리 영화’를 감싸 안아야 한다는 대중의 원성이 높았지만 진중권은 작품의 질이 형편없다며 가차 없는 비판을 내놓았다. 다시 한번, ‘싸가지’ 없다는 비난을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의 진중권은 부드러워진 모습이다. 한때 날 선 비판을 주고받았던 유시민과 함께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새끼고양이 ‘루비’를 키우는 모습을 대중에게 공개하며 트위터에서 ‘무한 RT’를 요청하기도 한다. ‘싸가지 있는’ 진보, 따뜻한 진보의 모습을 만들어가려는 것일까. 그러나 일부에서는 ‘싸가지’를 얻은 대신 ‘엣지’(각)를 잃었다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 시사저널 임준선, ⓒ 시사저널 임준선
■ 김어준

1990년대 말, 잘 다니던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하려다가 외환위기로 회사가 부도나고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된 젊은 김어준. 그는 자기 집에서 자신이 기사도 쓰고 홍보도 하는 1인 언론을 만들었다. 바로 딴지일보다.

딴지일보는 기사 속에서 거침없이 비속어를 사용했다. 당시만 해도 소수만 사용할 줄 알았던 포토샵 등의 사진 편집기를 이용해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이회창 등 당시 팔팔하던 정치인의 합성 사진을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그가 김영삼은 ‘기명삼’으로, 김대중은 ‘김데중’으로 부르자 사람들은 기존의 권위를 조롱하는 쾌감을 맛볼 수 있었다.

스스로의 활동을 ‘패러디’나 ‘풍자’의 영역으로 묶어두고 있었던 덕에 김어준은 다른 정치 논객과 다르게 직접적으로 ‘싸가지 없다’는 식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적어도 2000년대 초반까지는 그랬다. 황우석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이제 그만 좀 하자, 이러다가 황우석 죽겠다”라고 노골적인 지지 입장을 표명한 것은 아직도 그의 오점으로 남아 있지만, 대중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옹호하는 한 사람의 필자를 아꼈기에 김어준은 꾸준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래, 3년상 치를 거다, 이 개새끼들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자 김어준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김어준은 ‘쥐박이’ ‘가카’ ‘그네꼬’ 등의 표현과 음모론으로 무장한 채 정치 일선에 나섰다.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의 책 <닥치고 정치>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정치를 바라보고 논하는 방식이 또 한 번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오늘날 야권 성향의 지지자는 ‘나는 꼼수다’의 화법과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는 팟캐스트를 즐겨 듣는다. 반대로 여권 성향의 국민은 종편을 통해 하루 종일 북한 김정은의 시시콜콜한 신변 정보를 접하고 있다. 경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지금, 그래서 김어준은 여전히 문제적이다.

■ 전원책

전원책은 앞서 이야기한 네 명의 논객과 연령대 및 활동 시기와 방식 등에서 많이 다르다. 1955년생인 그는 스스로를 ‘시인이 본업, 변호사는 생업’인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실제로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니 그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가 아니라 몇몇 TV토론에서의 과격한, 혹은 화끈한 발언을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다. 2007년 무렵 공무원시험에서 군 복무자에 대해 가산점을 부여해야 하느냐 여부가 대중적인 논점으로 떠올랐다. 헌법재판소는 군 가산점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는데, 그러자 국가를 위해 2년간 청춘을 바친 젊은 남성들이 크게 반발했고 전원책은 바로 그들의 대변자로 급부상했다.

“이 세상에 가고 싶은 군대가 어딨습니까? 군대 가면 자도 자도 졸리고,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곳”이라며 삿대질하고 목청을 높이는 그를 보며, 청년들은 개그맨 박명수에 빗대어 ‘거성’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로 진보적인 정치인과 논객이 주도권을 잡게 마련인 TV토론의 장에서 전원책은 이른바 ‘블루오션’을 개척한 셈이었다.

2014년 현재 한국은 남녀평등지수에서 세계 117위를 기록하고 있는 성 평등 후진국이다. ‘남자가 역차별을 당한다’는 논리를 대변하고 있는 한 전원책의 발언은 결코 공정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 하지만 전원책의 발언이 호응을 얻는다는 것은 그만큼 기존의 담론이 포괄하지 못하는 영역이 적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원책의 등장과 발언을 그저 ‘호통 개그’로 취급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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