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19. '4색 당파' 정치공작이 조선에 암운 드리워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1.0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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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 세력 내쫓고 집권한 사림…동인과 서인 나뉘어 피비린내 싸움

얼마 전 헌법재판소에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 내려졌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사법부에 의해 정당이 해산된 최초의 사례다. 통진당 해산 결정 후폭풍으로 야권 재편 가능성이 언급되는 등 정치권이 요동치고 있다. 흔히 정당을 가리켜 ‘정치적인 주의나 주장이 같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로 정의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다양한 국민 여론을 수렴하기 위한 정당정치는 기본 요건이지만, 과거 왕조 체제에서도 정당은 엄연히 존재했다. 

조선의 사색(四色) 당파는 노론(老論)·소론(少論)·남인(南人)·북인(北人)을 뜻한다. 그런데 이들의 원 뿌리는 모두 사림(士林)이었다. 사림은 조선 건국에 가담하지 않고 향촌(鄕村)으로 내려갔던 고려 사대부 세력의 후예들이다. 이들이 향촌에서 학문을 닦는 동안 서울에서는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이라는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그 동지들로 구성된 훈구(勳舊)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훈구 세력의 지지로 친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국왕 자리에 올랐던 성종은 막상 즉위하자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끌어들였다. 사림을 언론권과 탄핵권이 있는 대간(臺諫, 사헌부·사간원)에 포진시켜 훈구 세력을 견제한 것이다.

‘정여립 사건’ 등 선조 때의 동인과 서인 간 당파 싸움을 다룬 드라마 의 한 장면. ⓒ KBS 제공
성종 사후 연산군은 이런 정치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사림 세력을 보호하는 대신 훈구 세력 편을 들어 재위 4년(1498년)의 무오사화를 비롯해 재위 10년(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키며 사림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후에도 사림은 계속 훈구 세력의 탄압을 받아 중종 14년(1519년)의 기묘사화, 명종 1년(1545년)의 을사사화까지 ‘4대 사화(士禍)’를 겪었다. 한 번 사화를 당할 때마다 사림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때마다 사림은 지방으로 내려가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재기를 꾀했다. 훈구 세력은 중종 14년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 일파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많은 사대부가 조광조의 죽음을 동정하면서 사림 집권의 분위기가 형성됐다. 15세기 후반인 성종 후반부터 정계에 등장했던 사림은 명종 말엽부터 선조 초엽에 이르는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집권 세력에 위협이 될 정도로 세력을 확장했던 것이다. 선조 초엽 사림은 100여 년에 걸친 지난한 권력투쟁 끝에 드디어 훈구 세력을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조전랑 인사 문제로 동인-서인 갈라져

사림은 정권 장악의 여세를 몰아 그간 꿈꾸었던 새 사회 건설에 나서기도 전에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분당됐다. 사림이 둘로 나뉜 선조 8년(1575년)이 을해년이기 때문에 이때의 분당을 을해분당(乙亥分黨), 또는 을해당론(乙亥黨論)이라고 한다. 사림이 갈린 원인은 이조전랑(吏曹銓郞)이란 자리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문관에 대한 인사권은 이조판서에게 주었지만, 탄핵권·수사권·언론권을 가진 막강한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 관원에 대한 추천권만은 이조판서나 참판이 아니라 지금의 안전행정부 인사국장 격인 이조전랑에게 주었다. 권력자가 삼사를 장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견제 장치였다.

또한 이조전랑 자리를 대신들이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조전랑의 인사권은 판서나 참판에게 주지 않고, 전임 전랑이 떠나면서 후임자를 천거하는 자천제(自薦制)를 실시했다. 이런 시스템으로 권력 독점을 방지한 것이었다. 선조 7년(1574년) 이조전랑 오건(吳健)이 이임하면서 후임으로 김효원(金孝元)을 천거했는데, 김효원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서 명망이 있었으므로 그의 추천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이때 사림의 후견 역할을 해왔던 인순왕후(명종의 비)의 동생 심의겸(沈義謙)이 “김효원은 겉과는 달리 한때 권신 윤원형의 식객이었다”고 반대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김효원은 전랑이 되었고 김효원의 뒤를 이어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이 후임자 물망에 오르자 김효원이 “이조의 벼슬이 어찌 외척(外戚·왕비 집안) 집 물건이냐”라고 반대하면서 사림이 둘로 나뉘게 되었다. 김효원을 지지하던 인물들은 비교적 젊은 사림들로서 김우옹(金宇?)·류성룡(柳成龍)·허엽(許曄)·이산해(李山海)·정유길(鄭惟吉)·정지연(鄭芝衍)·우성전(禹性傳)·이발(李潑) 등이었는데,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의 건천동(乾川洞)에 있어서 동인으로 불렸다. 심의겸을 지지하던 인물들은 비교적 원로들인 박순(朴淳)·김계휘(金繼輝)·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구사맹(具思孟)·홍성민(洪聖民)·신응시(辛應時) 등이었는데,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의 정릉방(貞陵坊)에 있어서 서인으로 불렸다. 오늘날 김대중 전 대통령 중심의 정치세력을 동교동계, 김영삼 전 대통령 중심의 정치 세력을 상도동계라고 불렀던 것에는 이런 역사적 연원이 있는 셈이다.

대신들 당파 싸움 통제 못한 선조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자 두 당을 통합시키려고 노력했던 인물이 율곡 이이였다. 양당의 통합 이론을 조제론(調劑論)이라고 하는데, 동인과 서인은 모두 사림이고 군자이니 갈라져서 싸울 것이 없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젊은 동인들이 이이의 조제론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이는 두 당이 모두 사림이니 모두 옳다는 양시론(兩是論)을 제기했는데, 동인들은 “천하에 어찌 두 가지 모두 옳고, 모두 그른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따져 물었다. 이이는 “무왕(武王)과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일은 둘 다 옳은 것이고, 춘추시대의 전쟁은 둘 다 그른 것”이라고 답변했다.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신하였던 서백(西伯·무왕)이 주왕을 내쫓고 주(周)나라를 세운 것도 옳고, 서백의 말고삐를 잡고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것이 옳으냐?”고 따졌던 백이·숙제도 옳다는 논리였다. 이이는 당론을 조제하고자 했지만, 동인들의 거듭된 공격을 받고 저절로 서인이 되고 말았다.

정부 내에 당파가 나뉘어 정쟁할 때 중요한 것이 임금의 역할이다. 지금으로 치면 여론의 역할일 것이다. 그런데 선조는 이이가 생존해 있을 때는 허봉·송응개·박근원 등 이이를 탄핵하는 3명의 동인들을 잇따라 귀양 보낼 정도로 이이를 높게 평가했다가, 막상 이이가 이듬해(1584년) 세상을 떠나자 이건창이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임금이 이이를 융성하게 대접하다가 사망한 후에는 은혜와 예절이 박절해졌다’고 적고 있듯이 선조의 생각이 180도 달라졌다. 선조는 나아가 죽은 이이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김시양(金時讓)은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선조가 재위 18년(1585년) 대사헌 구봉령(具鳳齡)에게 “(귀양 간) 세 신하가 이이를 큰 간신이라고 말했는데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고 전하고 있다. 구봉령은 “비록 간사하지는 않지만 경솔한 사람”이라면서 그에게 나라를 맡기면 나라가 잘못될 것이라고 답했고, 그 후 ‘오래지 않아 귀양 간 세 신하가 다 사면되었다’고 쓰고 있다.

선조의 마음이 자신들에게 기운 것을 간파한 동인들은 공세로 전환해 심의겸을 공격했다. 그러자 선조는 “논한 바가 너무 옳아서 더할 나위가 없다”면서 직접 전교를 내려 “(심의겸이) 국권을 마음대로 천단했다”면서 파직시켰다. 그러나 선조를 임금으로 만들어준 인물은 바로 심의겸의 손위 누이 인순왕후였다. 명종은 후계자에 대한 유조(遺詔·임금의 유언)도 없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 부인 인순왕후가 중종의 아홉 번째 아들 이초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선조)을 임금으로 만들어준 것이었다.

정여립 사건으로 동·서인 살육 전쟁

동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적을 바꾸는 인물도 나타났다. 정여립이 그 장본인인데 선조 3년(1570년) 문과에 급제한 그는 당초 서인의 영수였던 이이와 성혼의 제자였다가 이이 사후 동인으로 당적을 옮겼다. 선조는 이이 사후 동인들을 총애했지만 정여립은 싫어했다. 선조는 심지어 정여립을 “이 시대의 형서(刑恕)”라고 비판했는데, ‘형서’라는 말은 ‘스승을 배신한 인물’이란 뜻이다.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지는 것처럼 남다른 사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선조에게 용납되지 못한 정여립은 낙향 후 전라도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고 대동계원들과 활을 쏘는 향사례(鄕射禮) 등의 활동들을 했다.

그러자 서인들은 정여립을 이용해 동인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다. 선조 22년(1589·기축년) 10월 황해감사 한준(韓準)의 비밀 장계(狀啓)가 도착하면서 시작된 ‘정여립 사건’, 즉 기축옥사가 이것이다. 한준의 비밀 장계는 전라도에서 역모가 있다고 고변한 것인데, 그 과녁은 정여립이었다. 서인의 맹장이었던 송강 정철이 나서 동인들을 대거 살육했다. 정여립이 꾸렸던 대동계가 역모의 증거로 사용되었지만, 실제 대동계는 선조 20년(1587년) 왜구들이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했을 때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에 응해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던 조직이었다. 비밀 조직이 아니라 공개된, 그것도 나라를 위해 싸운 조직이었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동인이 죽임을 당했다.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우의정 정언신(鄭彦信)도 이 사건에 연루돼 파직되는 등 동인들은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화를 입었다.

그러나 선조 24년(1591년) 정철은 인빈 김씨 소생의 신성군(信城君)을 세자로 세우려는 선조의 속뜻을 잘못 읽고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자고 주청했다가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되고, 정권이 다시 동인 계열로 바뀌게 된다. 정여립 옥사는 원래 같은 뿌리였던 동인과 서인을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적당(敵黨)으로 만들었다. 율곡 이이의 조제론은 설 곳이 없어졌다. 정치공작이 조선 역사에 큰 암운을 드리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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