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 장난감에 생명을 불어넣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5.01.08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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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 <바이클론즈> 감독 겸 제작자 이달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선물용 장난감 쟁탈전이 벌어진다. 2013년부터 이 시장의 승자는 국산 완구 또봇이었다. 또봇은 오랜 강자인 일본 반다이의 파워레인저 시리즈를 누르는 이변을 연출했다. 2014년 연말 시장에선 파워레인저 다이노포스와 또봇이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파워레인저 37번째 시즌이 2014년 7월 국내에 방송되면서 롯데마트의 장난감 매장에서 파워레인저 시리즈 로봇이 또봇을 살짝 앞섰다. 상반기에는 또봇의 완승이었던 터라 연간으로 따지면 비슷한 점유율을 보일 것으로 예측된다.

요동치는 장난감 시장의 원동력은 원작 만화의 인기다. <또봇>은 2010년 4월 첫 방송됐다. 4분짜리 16편으로 구성된 첫 시즌은 케이블 채널인 재능방송에서 겨우 방영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16번째 시즌이 공중파인 SBS에 입성했다. 그것도 케이블에서 먼저 방송되고 공중파에서 방송되는 이례적인 코스를 밟았다. 폭발적인 인기 덕이다. 만화를 본 아이들의 성화를 못 이겨 부모들이 마트로 달려가 로봇 쇼핑을 하는 통에 또봇은 새로운 ‘등골 브레이커’라는 별칭을 얻었다. 

또봇 현상 뒤에는 레트로봇(대표 이달)이라는 만화 제작회사가 있다. 제작자 겸 감독인 이달 대표로부터 만화 비즈니스의 세계에 대해 들어봤다.

2014년 12월30일 만난 레트로봇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이달 대표는 과 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 시사저널 이종현
ⓒ 레트로봇 제공
파워레인저 누른 또봇의 아버지 이달

엄격히 말하면 레트로봇은 완구회사인 영실업의 기획안을 받아서 <또봇>을 제작하는 구조다. 극장판 제작권을 제외한 저작권은 모두 영실업에 있다. 다만 레트로봇은 만화영화를 만들 때 최소한의 제작비를 지원받고 완구를 팔아서 수익이 발생하면 인센티브를 받는다. 레트로봇의 두 번째 작품인

<바이클론즈>는 레트로봇의 자체 기획으로 만든 작품이고 중간에 영실업이 제작비를 대는 투자자로 합류한 까닭에 레트로봇은 극장판 제작권과 출판 사업권을 갖고 있다. <바이클론즈>는 <또봇>과 달리 지난해 7월 첫 시즌 방송부터 공중파인 SBS로 직행했다. 그리고 6개월도 되지 않아 국내 로봇 완구 판매량에서 또봇과 파워레인저 시리즈에 이어 3위로 올라서는 기록을 세웠다.

뽀로로가 3세 미만의 유아 시장을 타깃으로 한다면, 또봇은 4~6세의 남아가 타깃이고, 바이클론즈는 7~10세 안팎의 남아가 타깃이다. 애들 보여주려고 <또봇>이나 <바이클론즈>를 선보였다가 부모가 팬이 됐다는 ‘커밍아웃’ 글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이달 대표는 “만화를 만들면서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즐기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게 목표였다. <또봇>은 완구 판매가 목표였던 터라 온 가족이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이 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성인 팬이 생겨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봇>의 경우 2015년에 발표될 완구 라인업에 맞춰서 스토리를 짜고 제작을 한다. 이때 감독으로서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새로운 캐릭터(신제품)의 등장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또봇>이나 <바이클론즈>의 팬들은 일본 만화와는 달리 로봇 싸움으로 점철되지 않는다는 점, 택배 알바를 하는 주인공, 동네 상권 얘기 등 지금 한국의 상황이 그대로 반영된다는 점에서 TV 드라마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 직장에서 해외 시장을 겨냥한 작품을 만들 때 한국적인 색깔을 빼야 했다. 그게 스트레스였다.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한국적 색깔이 들어가면 커트되니까 답답했다. 왜 우리가 우리 문화를, 우리말로, 우리 작품에 담아내지 못할까. <또봇>을 시작할 때 영실업 김상희 사장이 ‘해외 시장에 못 나가도 상관없다. 국내 시장에서만 잘 팔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더라.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겨 <또봇>에 원 없이 동시대적 생활상을 담고 있다. 정말 재밌다.”

시나리오는 완구 제작사인 영실업에 중요한 문제다. 캐릭터가 곧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쪽 의견이 타당하면 반영하고, 내 생각과 다르면 반박 의견도 내고 그랬다. 초기 2년간은 시나리오 작가 교체 등 진통도 있었다. 꼭 지키고 싶은 것은 장문의 메일로 보냈다. 그럼 더 이상의 강요는 없었다.” 시즌 1·2는 김미혜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3·4 시즌에 교체됐다가 다시 김미혜 작가가 복귀했다. 현재 <또봇>은 윤강산 작가가, <바이클론즈>는 김미혜 작가가 맡고 있다. 영실업 쪽에서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부분은 로봇 액션 노출 빈도나 길이 정도라고 한다.   

“제일 중요한 게 시나리오다. <또봇>의 경우 매 시즌 시놉시스를 쓸 때 새로운 로봇을 등장시킬 당위성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이 공을 들인다. 그래야 극적 긴장감이 유지된다. 사회적 문제라고 아동물에 못 담을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주제를 소재로 쓰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자신이 딱 이해할 수 있는 내용만 담으면 금방 싫증낸다. 아이들은 자기 눈높이보다 약간 더 높아야 흥미를 유지한다.”

<바이클론즈>의 이순희 할머니 캐릭터는 김미혜 작가의 아이디어고, 오나전 캐릭터는 이달 대표의 아이디어다. 주인공 5형제 중 택배 알바를 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테오 캐릭터도 그의 아이디어로 탄생했다. <바이클론즈>는 부모가 실종된 후 5형제가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아남는 이야기다. 그는 “1970~80년대 나온 <비둘기 합창곡>이나 <무지개 행진곡> 같은 작품에는 대가족, 가난한 환경, 꿈을 잃지 않고 사는 삶이 담겨 있다. 언제부턴가 가난한 가족 이야기가 드라마에서도, 영화에서도 사라졌다. 그런 이야기를 끄집어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점이 <파워레인저>와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는 “<바이클론즈>는 로봇과 생활 드라마를 결합시켰다.

<파워레인저>가 로봇끼리의 전투에만 방점을 찍은 판타지라면 <또봇>이나 <바이클론즈>는 일일 드라마 같은 생활 속 이야기에 로봇을 추가한 것이다. 그래서 파워레인저보다 덜 폭력적이면서도 성인 팬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내수용으로만 생각했던 <또봇>은 타이완과 싱가포르에 수출돼 타이완 TV 어린이물 중 시청률 1위를 기록하는 등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완구도 1차 선적분이 모두 매진돼 2차 물량을 생산 중이다.

콘텐츠 비즈니스의 진화…완구와 만화영화 동거

이달 대표의 궁극적 목표는 완구에 의존하지 않는 장편 만화영화 제작이다. TV 방영권료로는 제작비의 10분의 1도 건지기 어렵다. 레트로봇이 2015년에 제작하는 <또봇>과 <바이클론즈>는 970분 분량, 레트로봇이 영실업으로부터 제작비로 지원받는 돈은 실제 제작비 수준에 불과하다. 120분 안팎의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들어가는 돈이 100억원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치 않은 돈이다. 작품이 성공할 경우 레트로봇은 영실업으로부터 완구 판매액에 따른 인센티브를 받는다. 이 대표는 “인센티브 덕에 손해는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만큼 만화영화는 캐릭터나 라이선스 사업권이 크다는 뜻이다. “TV 애니메이션은 결국 완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완구회사에서 다음 해에 출시할 로봇을 미리 정해놓으면 발매 순서에 따라 애니메이션을 기획한다. 스토리에서 많은 부분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 성인이나 청소년용을 이렇게 만들면 몰입이 어려워진다. 어른부터 아이까지 다 즐기려면 완구의 품에서 독립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10년 안에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 일단 <또봇>의 첫 극장판이 2015년 말에 나온다. 첫 극장판이 손해 보지 않으면 좀 더 욕심낼 수 있을 것이다. 극장판은 우리가 사업권을 갖고 있으니까. 3년 내에 <바이클론즈>와 <또봇>의 극장판을 한 해에 각각 한 편씩 내는 게 목표다. 그다음에는 오리지널 극장판을 만들 것이다.”

이달 대표는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를 나와 씨네픽스라는 컴퓨터그래픽회사에서 일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우리도 저런 것을 만들어보자’며 해외 시장을 겨냥한 <아쿠아키드>(2004년)로 감독에 입문했지만 영화는 망했다. 2007년 독립해 2009년 10월 <또봇> 제작을 시작하면서 터닝포인트를 맞았다. 직원 5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100명이 넘고 대학 만화과를 나온 친구들이 제 발로 일하고 싶다고 찾아올 정도가 됐다. <또봇> 시즌 12에 삽입해 큰 인기를 모은 ‘김떡순 송’은 그의 자작곡이다. 사무실에서도 틈틈이 작곡을 한다. 시나리오를 쓰고 노래를 만드는 재능은 물려받은 부분도 있는 것 같다. 한국 카피라이터계의 대부로 꼽히는 이만재씨가 그의 아버지다.  

이 대표는 <또봇>과 <바이클론즈>의 새 시즌에 대한 귀띔도 해줬다. “<또봇> 시즌 17은 2~3월 중, <바이클론즈> 시즌 3은 4월에 방영될 예정이다. <바이클론즈> 시즌 3에서는 새로운 로봇 등장은 없을 것이다. 무기는 추가될 수 있지만.” 로봇 마니아와 학부모들에겐 복음이다. 새로운 로봇 구입을 위해 지출을 안 해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휩쓰는 만화의 힘 


<또봇>의 힘은 또봇 완구제작사인 영실업의 영업장부에 그대로 드러난다. 2010년 243억원이던 영실업의 매출은 2011년 349억원, 2012년 542억원, 2013년 761억원으로 뛰었다. 순이익도 2010년 2억8000만원에서 2013년 120억원으로 급증했다. <또봇>이 영실업을 일으켜세운 것.  

만화가 완구의 인기를 부채질하고 그래서 완구회사가 만화를 더 열심히 만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는 해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영화산업의 메카인 할리우드에서 그렇다. 완구회사 해즈브로는 <G.I 조>나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캐릭터 소유권자다. 스토리가 없던 장난감에 이야기를 붙인 게 바로 두 영화다. 디즈니는 영화산업과 방송산업, 놀이공원산업에서 강자인데 완구나 의류 부문도 세다. 전체 매출의 20% 정도가 완구류 판매와 라이선스 사업에서 나온다고 한다.

2014년 미국 내 영화 흥행 톱10 기록(박스오피스 모조 자료)을 보면 1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비롯해 4편이 디즈니 계열(BV)이다. 이 중 3편은 마블코믹스의 원작 만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한 편은 만화영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실사판인 <말레피센트>다. 전체 톱10에서 만화가 원작이 아닌 것은 <헝거게임: 모킹제이 파트1>과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뿐이다.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는 제작사인 워너브러더스는 상대적으로 2014년에 부진했다. 디즈니가 마블과 협력해 상위권을 독식하는 동안 워너와 협력 관계를 맺은 DC코믹스의 슈퍼히어로물 개봉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레고 무비>가 터지면서 체면치레는 했다.

<레고 무비>는 원작 없이 완구만 있었던 경우다. 워너브러더스의 준 오 부사장은 지난 11월 디콘2014에 참석해 “레고사가 시나리오와 캐릭터 설정에 까다롭게 굴어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영화 흥행은 완구 판매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영화사 자체적으로 캐릭터를 부여하는 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완구 판매에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또봇>을 기획한 영실업에서도 초기에는 시나리오에 민감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청률과 완구 판매 결과가 좋게 나오면서 신뢰 관계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만화영화는 한번 인기를 끌면 배우의 몸값이나 이미지 걱정 없이 안전하게 오랜 기간 흥행을 이어갈 수 있고 완구 등 각종 라이선스 사업 수익도 크다는 점에서 영화사에서도, 완구회사에서도 큰 환영을 받고 있다. 한국 흥행업자들이 온 가족 관람용 만화영화 제작에 목을 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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