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한국의 가벌] #13. 돌아올 수 없었던 ‘형제의 강’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5.01.29 18:2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대그룹 와해 부른 ‘왕자의 난’…몽구-몽헌, 끝내 화해 못 이뤄

‘정주영 정신’으로 무장한 현대가였지만 2000년 3월에 있었던 이른바 ‘왕자의 난’은 아픈 기억이다. 더구나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과 갈등 끝에 후계자 자리를 거머쥔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이 2003년 8월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정몽구-몽헌 형제의 화해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게 됐다. ‘왕자의 난’ 후유증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범(汎)현대가에 짙은 그늘로 남아 있다.

현대가 ‘왕자의 난’은 2000년 3월14일 시작됐다. 그날 저녁 연합뉴스에 3월15일자로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이 현대자동차가 대주주인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옮기고 현대증권 사장 자리에는 정몽구 직할 회사인 현대캐피탈의 노정익 부사장이 옮겨간다는 인사 내용이 보도된 것이다. 당시 정몽헌은 싱가포르에 머무르고 있었다. 현대증권의 대주주는 현대상선이었고 현대상선의 대주주는 정몽헌이었다. 인사권자인 정몽헌이 국내에 없는 상황에서 사장 인사가 이뤄진 것이다. 현대그룹 출입기자들로부터 연합뉴스 보도 내용을 확인해달라는 요청이 쏟아진 이유였다. 그러나 그룹에서 공식 발표는 나오지 않았다. 싱가포르에서 소식을 접한 정몽헌이 불같이 화를 냈기 때문이다.

2000년 5월30일 현대그룹은 ‘정주영·정몽구·정몽헌 3부자 퇴진’을 발표했다. ⓒ 동아일보 제공
정주영 “그룹 회장에서 정몽구 이름 빼라”

정몽구-정몽헌 갈등은 인사 소식이 보도된 3월15일부터 본격화했다. 외형상 인사발령을 통해 선제공격을 한 것은 정몽구였다. 정몽헌 측에서는 ‘야음을 틈탄 쿠데타’라며 정몽구 측을 비판했다. 정몽구 측에서는 정주영이 재가한 내용을 정몽구가 국내 부문 회장 자격으로 그룹 구조조정위원회에 지시했는데도 정몽헌 측이 항명하고 있다고 맞섰다. 언론은 연일 ‘왕자의 난’ 사태를 크게 보도했다.

정몽헌이 미국에서 귀국한 것은 3월24일. 귀국하자마자 정주영을 만나 단숨에 판세를 뒤집었다. 이익치를 경질하는 인사를 ‘없던 일’로 만든 것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정몽구를 아예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정몽헌의 승리였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정몽구의 2차 공세가 이어졌다. ‘제2차 왕자의 난’이었다. 이틀 후인 3월26일 오후, 정몽구의 대리인인 정순원 현대·기아자동차 기획조정실장은 “경영자협의회 의장직에서 정몽구 회장을 면하게 한 것은 (그룹 구조조정위원회의) 잘못된 발표다. 3월24일자로 발표된 명령을 3월26일자로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정몽구 측이 공개한 서류에는 정주영의 사인이 있었다. 당연히 정주영의 의중이 실린 것으로 해석되면서 후계 구도를 둘러싼 혼란은 극심해졌다. “도대체 정주영의 본심이 무엇이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3월27일 오전에 긴급 소집된 경영자협의회에서 정주영은 다시 정몽헌의 손을 들어줬다. 정몽헌 측은 이번에는 아예 정주영의 육성을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혹시 모를 혼선이나 괜한 추측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 정주영의 육성 내용은 이랬다. “앞으로 경영자협의회 의장을 정몽헌 회장 단독으로 한다는 것을 여러분께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 및 기아자동차 등 여러 가지 일이 바쁘기 때문에 정몽헌 회장이 단독으로 경영자협의회 의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정몽구·정몽헌 공동 회장 체제에서 정몽헌 단독 회장 체제로 바꾼다는, ‘후계자는 정몽헌’이라는 것이었다. 정몽구는 “정몽헌 회장과 각사가 협조해 좋은 성과를 거두기 바란다”라는 말을 남기고 경영자협의회 자리를 떴다. 정몽구·정몽헌은 1998년부터 현대그룹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경영자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아왔는데 정몽헌 한 사람으로 정리된 것이다.

이익치는 ‘왕자의 난’과 관련해 시사저널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당시 정몽헌과 함께 싱가포르에 있었다. 북한의 송호경 아세아태평양위원회 부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발령 난 사실은 뒤늦게 언론을 통해 알게 됐다. 귀국해서 정주영 회장을 만나 보니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당장 그룹 회장에서 정몽구의 이름을 빼라’고 호통을 쳤다. 때마침 남북정상회담 협상이 마무리됐다. 북한은 현대건설에 7개 사업권을 주기로 정몽헌과 합의했다. 그 대가로 현대그룹이 4억 달러를, 정부가 1억 달러를 지불하기로 하고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했다. 남북정상회담 날짜도 6월15일로 확정했다. 정(주영) 회장은 이때 이미 후계 구도를 결정한 것 같았다. 합의문 발표 직후인 4월 중순에 정몽헌과 나만 조용히 불러 유언장 작성을 지시했다. 정주영 이름의 모든 재산을 정몽헌에게 상속하며, 현대그룹의 경영권 역시 정몽헌에게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극비리에 후속 조치들이 진행됐다. 법적 절차를 마무리 짓기 위해 변호사단이 꾸려졌다. 서울 남부터미널 현장 앞에 있는 사무실에서 유언장이 작성됐다. 이때가 2000년 4월17일이었다. 당시 정 회장은 두 명의 변호사 앞에서 직접 유언장을 낭독했다. 변호사 확인 후 유언장에 날인을 하면서 후계 구도가 사실상 마무리됐다. ‘왕자의 난’이 발생한 지 한 달여 만이었다.”

정몽헌에 대한 정몽구의 공격이 있기 1년 전에는 정주영-정세영 간 형제의 난이 있을 수도 있었다. 정주영이 정세영을 현대자동차에서 물러나게 하는 과정은 외견상 별 갈등 없이 정리됐지만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있었다. 지난 호에서 잠깐 거론했지만 정주영은 동생 정세영을 압박해 현대차를 정몽구에게 줬다. 만약 정세영이 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면 정몽구-정몽헌 싸움이 일어나기 1년 전 1차 ‘형제의 난’이 일어났을 것이다.

정주영-정세영 ‘형제의 난’ 일어날 뻔

정세영은 자서전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에서 당시 상황과 심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99년 3월3일, ‘몽구가 장자인데 자동차 회사를 넘겨주는 게 잘못됐어?’(정주영) ‘잘못된 것 없습니다.’(정세영) ‘그럼 그렇게 해!’(정주영) ‘예.’(정세영) 32년간 땀과 청춘을 바쳐 이룩했던 자동차회사를 떠나는 과정이 이렇게 마무리됐다. 큰형님(정주영)은 ‘몽규(정세영의 아들)는 자동차 부회장으로 몽구 밑에 두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나는 다른 견해를 보였다. ‘다음에 또 오늘과 같은 곤혹스러운 일이 생길 텐데 몽규도 그만두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함께 자동차를 떠나겠습니다.’ 1999년 3월3일,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 못 이루며 긴 밤을 보냈다. 평상시에 형님은 나와 주위에 나를 오너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현대자동차의 오너 입장으로 살아왔고 주위의 모든 사람 또한 그렇게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떠나라’는 한마디에 두말없이 회사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 되었으니, 사실 나는 오너의 허울을 쓴 전문경영인이었던 모양이다. ‘떠나라’는 말을 들은 후 32년간 몸담았던 현대자동차의 계동 사옥을 떠나기까지 불과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정세영은 당혹스러웠지만 결국 큰형의 뜻에 따랐다. 1~2년도 아니고 강산이 세 번 바뀌는 32년 동안 키워낸 회사를 말 한마디에 떠나야 했던 정세영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정세영은 “몇 차례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큰형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내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특히 이치에 어긋난 일을 두고 큰형님의 의사에 반대한 일은 한 번도 없다. 큰형님은 언제나 내 뒤에 서서 지켜보다가 방향을 잃고 잠시 머뭇거릴 때 나아갈 바를 지시해주는 등대와 같았고, 어떤 난관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목으로 나의 버팀목이 돼주셨다”며 정주영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을 나타냈다. 그만큼 정주영은 형제들에게 큰 나무 그늘과 같았다.

2000년 5월25일, 유언장 내용에 따라 정주영이 보유한 현대중공업 주식이 정몽헌에게 넘어갔다. 정주영은 현대중공업 지분을 계열사에 판 돈으로 현대차 주식 9.3%를 매입하도록 지시했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회사를 만들기 위해 전문경영인을 영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대그룹 주가가 일제히 폭락했다. 정부와 채권단은 지배구조 개선과 함께 경영진 문책을 요구했다. 정주영은 결국 5월30일 ‘3부자 퇴진’ 계획을 언론에 발표했다. 정몽구는 이에 반발하며 “3부자 퇴진 발표를 거둬 달라”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2003년 8월5일 고 정몽헌 현대회장의 빈소. ⓒ 사진 공동취재단
2000년 5월25일 ‘3부자 퇴진’ 발표

이익치는 정주영이 3부자 퇴진을 결정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현대차가 글로벌 기업으로 가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인데 정주영은 이런 면에서 정몽구가 문제가 있다고 봤고 현대그룹을 더 키우기보다 지키는 것을 원했다. 2세들이 자산가나 사회사업가로 살면서 자신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기를 바랐다. 경영진이 잘못하면 대주주 권한을 행사해 더 좋은 경영진으로 바꾸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후계자는 정몽헌으로 정해졌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른 정몽헌은 점점 늪에 빠져들었다. 반대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독립한 정몽구는 승승장구했다. 현대차는 창사 이래 가장 좋은 실적을 기록한 반면, 정몽헌은 사면초가 신세가 됐다. 현대건설에서 전자와 상선, 석유화학 등으로 유동성 위기가 번졌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정몽헌이 가장 공을 들였던 대북 사업은 퇴로조차 보이지 않는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대북 사업이 시작된 1998년 이래 2000년 상반기까지 현대그룹 계열사를 통해 북한에 투입된 자금 규모는 2조5000억원이 넘었다. 하이닉스반도체와 현대건설의 경영권은 채권단으로 넘어갔다.

현대증권의 ‘바이 코리아’ 펀드를 통해 돈을 끌어모으며 확장해가려던 정몽헌의 전략에 차질을 빚게 만든 것은 대우 사태였다. 1999년 하반기 대우 사태로 예탁금이 빠져나가면서 현대투신은 자본 잠식 상태에 들어갔다. 투신사가 기능을 하지 못하고 은행들은 자기자본비율에 묶여 기업 대출을 꺼리는 상태였다.

정몽헌, 대북 송금 특검 조사 후 투신

이런 와중에 대북 송금 특별검사의 조사를 받은 정몽헌은 2003년 8월 스스로 생을 마친다. 계동 본사에서 투신한 것이다. 정몽헌은 투신하기 전 집무실 탁자 위에 자신이 사용하던 안경·시계와 함께 흰 편지봉투 세 통에 담긴 유서 넉 장을 남겼다. 현대가는 1982년 장남인 몽필씨가 교통사고로 숨졌고 1990년엔 4남 몽우씨가 스스로 생을 접었다.

정몽헌의 사망으로 정몽구-몽헌 형제의 화해는 이뤄질 수 없게 됐다. 정몽헌이 투신하기 전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정몽구는 2003년 3월, 청운동 옛 정주영 자택에서 열린 제사에도 아들인 정의선 현대·기아차 부사장만 보낸 채 불참했다. 선영에도 혼자 먼저 다녀와 정몽헌과의 대면을 피했다. 넷째 정몽우씨(1990년 작고)의 아들 문선씨의 결혼식에서도 정몽구-몽헌 형제는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은 채 서먹서먹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동생의 자살 소식이 알려지자 형제들 중 가장 먼저 현대 계동 사옥으로 찾아와 현장에서 시신 수습 과정을 챙긴 사람은 형 몽구였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