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몸 안에는 끔찍한 인격이 여럿 있다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5.02.05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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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받은 학대와 충격의 트라우마가 다중인격장애 원인

아동학대는 아이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각인시킨다. 트라우마가 오랜 기간 반복되면 해리성 정체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해리성 정체장애는 흔히 다중인격장애라고 부르는 정신 질환이다.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이나 판타지 등에 빠지기도 하고, 본래의 모습과 전혀 다른 인격체로 변하기도 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다중인격장애는 많은 사람의 관심거리다. 요즘 이를 소재로 한 TV 드라마 <킬미 힐미>가 방영되면서 관심이 새삼 높아졌다. 

해리(解離)란 ‘분해되어 떨어진다’는 뜻으로 시간이나 환경에 대한 의식이 분리되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다. 해리 현상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한 사람 안에 다수의 인격(정체성)이 존재하는 다중인격장애가 나타난다. 과거엔 빙의라고 부르기도 했다. 멀쩡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잔인하고 포악한 행동을 보일 때 일반적으로 ‘다중인격자’라고 표현한다. 성격뿐만 아니라 인종, 성, 나이도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각 인격에서 경험한 바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을 ‘우리’라고 말하며 다른 인격을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다중인격장애 환자 97%, 아동기 학대 경험

다중인격장애가 발생하는 원인은 뚜렷하지 않다. 뇌의 해마 부위 손상 탓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고, 쪽잠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 빙엄턴 대학 연구팀은 2012년 잠을 한 번에 푹 자지 않고 여러 차례 나눠 자는 쪽잠이 다중인격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보고했다. 나쁜 기억이 수면 장애를 일으켜 수면의 질이 떨어지면 기억이 훼손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많은 연구가 진행됐지만 아직 뚜렷한 해답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환자의 97%가 어린 시절 심각한 학대와 폭력을 겪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국내 한 대학병원에 최근 네 살배기 아이가 입원했다. 잘 놀다가도 갑자기 멍한 상태가 되는 증상 때문이다. 또 자기가 한 살이라며 목소리와 행동이 갑자기 변하는 초등학교 5학년 아이도 있다. 이 병원의 정신과 교수는 “이 아이들은 모두 어릴 때 정신적 충격을 받았는데, 이런 증상은 현실을 벗어나 자신만의 판타지 세계로 빠진 경우”라며 “일주일에 약 2건 정도의 해리 의심 사례가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주체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기에는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자아를 바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다중인격장애는 잠재적 범죄자라기보다 보호하지 못한 약자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대표적인 사례가 빌리 밀리건이라는 미국인이다. 그는 1978년 연쇄 강간, 폭행, 강도 등 수많은 범죄로 재판정에 섰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무려 24개 인격을 가진 다중인격장애와 정신 이상에 의한 범죄로 판단한 것이다. 인격체가 변할 때마다 나이, 성별, 생김새, 성격, 학식이 모두 달랐다.

가짜 연기를 펼친다고 의심한 수사관과 의사들이 갖가지 검사와 취조를 했지만 단순한 연기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능력들이 나타났다. 밀리건은 사회 부적응과 불안 증세로 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이었지만, A 인격의 지배를 받으면 아랍어와 아프리카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수학·물리학·의학에 정통했다. B 인격체가 되면 크로아티아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했고, C로 변하면 전자제품 전문가가 됐다. 그도 아동기에 극심한 학대를 경험했다. 10세 무렵 부모는 이혼했고 엄마와 함께 살던 그는 계부로부터 심한 학대와 성폭행을 당했다.

아동학대자는 ‘반사회적 다중인격자’

14세 때부터 100개의 인격체를 가진 것으로 보고된 50대 영국 여성 킴 노블은 2011년 일간지(가디언)와의 인터뷰에서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며 “하루에 서너 번 인격이 바뀐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김은주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아동기에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모두 다중인격장애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 나이에 강한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모든 정신 질환에 취약한 상태가 되고 심하면 해리 현상까지 나타날 수 있다”며 “갑자기 끔찍한 기억이 떠오르면 정신이 닫히는 상태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2008년 제주에 사는 30대 여성은 은행 VIP실에서 상담하는 동안 다섯 살 된 딸에게 금고를 열고 자기앞수표 등 1400만원을 훔치게 했다. 이 모습이 폐쇄회로 TV에 포착돼 엄마는 구속 기소됐으나 해리성 정체장애를 앓고 있었던 점이 참작돼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풀려났다. 2011년 울산의 한 경찰관은 차량을 훔쳐 도로를 질주하다 차량 4대를 들이받고 붙잡혔다. 다중인격장애를 앓아 자신도 모르게 사고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인의 관심을 끄는 다중인격장애는 영화·드라마·책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평소 점잖다가도 술만 마시면 다른 사람이 되거나, 직장과 가정에서의 성격이 다른 사람을 가리켜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다중인격자라고 한다. 그러나 기분장애·성격장애·충동조절장애 등 다른 정신 질환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게 전문가의 판단이다. 주연호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다른 정신 질환이 있는 데다 술까지 마시면 성격이 전혀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며 “직장에서는 언행에 조심하지만 집에서는 맘대로 할 수 있으니까 다른 인격체처럼 보이나 다중인격장애인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남부럽지 않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공공장소에서 막말과 욕설을 서슴지 않고 평범한 가장이 특별한 이유 없이 가족의 목을 조르는 상황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의붓딸 앞에서 음란행위를 하고 흉기로 살해한 후 “나도 피해자”라고 외치는 사람을 정상적으로 보기도 어렵다. 특히 아동학대를 일삼는 어른은 다중인격장애가 의심된다. 물론 이들이 모두 다중인격자는 아니겠지만 최소한 ‘반사회적 다중인격자’임에는 틀림없다. 이처럼 아동학대는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위험한 행위라는 점이 다중인격장애의 사례에서 다시 한 번 입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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