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세 젊은 총리, 메르켈을 겁박하다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5.02.0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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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생 좌파 정권, 부채 탕감 반대하는 독일에 선전포고

1월25일 저녁, 스페인의 신생 좌파 정당인 ‘포데모스’가 벨기에 브뤼셀에서 파티를 열었다. 그리스 총선 결과를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이날 그리스에서는 좌파연합 ‘시리자(Syriza)’가 예상치를 훨씬 넘어선 36.3%의 지지율로 제1당이 되었고, 알렉시스 치프라스 대표는 역대 최연소인 40세에 총리직을 맡게 됐다.

스페인의 포데모스가 그리스의 시리자를 위해 연회를 베푼 데는 이유가 있다. 두 당은 모두 유럽연합(EU)이 제공한 구제금융에 대해 부채 탕감과 전면 재협상을 주장하고 있다. 치프라스의 새 정부가 선례를 남기면 다른 채무국들도 이득을 볼 가능성이 커진다. 게다가 포데모스는 5월에 치러질 스페인 지방선거에서 시리자 후광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포데모스가 유럽의 수도 브뤼셀에서 터뜨린 샴페인은 EU의 긴축 재정에 대한 선전포고인 셈이다. 

1월25일 총선 결과가 발표된 뒤 지지자들 앞에서 승리 연설을 하고 있는 알렉시스 치프라스 신임 그리스 총리. ⓒ AP 연합
“메르켈은 그리스의 존엄을 앗아갔다”

축제 분위기는 아테네에서 더욱 뜨겁다. “5년간의 굴욕과 고통은 끝났다”는 신임 총리의 말에 아테네 광장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그리스는 지난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총 2400억 유로(약 294조원)의 구제금융을 제공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구원의 대가는 살인적인 구조조정과 긴축이었다. 복지 예산이 삭감되고 국영방송국 ERT도 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28%에 육박하는 실업률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리스 시민들의 분노와 박탈감은 커져만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리자의 공약은 그리스 시민들에게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치프라스 총리는 선거 기간 동안 긴급 복지 지원에 20억 유로, 신규 투자에 40억 유로, 일자리 30만개를 창출하기 위한 예산 50억 유로 등을 통 크게 약속했다. 연금과 공무원 임금, 최저임금 인상안도 발표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리스인의 표심을 사로잡은 것은 치프라스의 패기였다. 그는 ‘재앙과도 같은 긴축 재정’을 그리스에 강요한 EU와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과 전면 재협상을 하겠다고 단언했다. ‘그리스인의 존엄을 앗아간 외세의 대표’로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목됐다.

유로존 위기 당시 긴축 재정을 관철시킨 메르켈 총리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반감은 말도 못하게 높다. 긴축 재정 반대 시위를 할 때면 메르켈의 얼굴에 히틀러 콧수염을 그려 넣은 피켓이 등장했다. 그가 전 유럽을 상대로 ‘긴축 독재’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독일의 ‘슈피겔 온라인’은 그리스 선거 결과를 다룬 기사에 ‘그리스, 메르켈에 반대 투표’라는 헤드라인을 달았을 정도다.

선거 다음 날인 1월26일, EU 각국 재무장관과 관리들은 한목소리로 “선거로 새 정부를 뽑을 순 있어도 새 나라를 뽑진 못한다”며 채무 재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우려의 목소리도 새어 나왔다. ‘슈피겔 온라인’은 한 익명의 고위 관계자 말을 인용해 “시리자가 정말로 반(反)긴축·개혁 정책을 관철시키면 스페인·이탈리아·프랑스 등지에서도 비슷한 요구가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전했다. 채무국 집권 세력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시나리오다.

이처럼 채무국과 채권국 간의 팽팽한 입장 차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할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실제로 올 1월 초 베를린 관가에서는 “메르켈 총리는 설령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한다 해도 타격이 크지 않을 것으로 본다”는 말이 흘러나와 유로존 전체가 술렁거렸다. 그동안 메르켈이 채무국도 끝까지 함께해야 한다는 연대의 원칙을 강조해왔기 때문에 더욱 놀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리스가 유로존을 떠날 가능성은 미미하다. 사실 큰소리를 쳤지만 치프라스가 쥔 패는 좋지 않다.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그리스인의 75%가 유로존에 머무르기를 바라고 있다. 더구나 그리스 경제의 명줄은 EU의 원조에 달려 있다. 당장 다가오는 2월 말에 EU의 원조 프로그램 연장을 승인하지 않으면 그리스 경제는 3170억 유로의 국가 부채를 안고 침몰할 위기에 처해 있다.

유로존 최대의 채권국가인 독일 역시 연대 원칙을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볼프랑 쇼이블레 재무장관이 공영방송 ZDF와의 인터뷰에서 “구제금융은 강요가 아닌 협상의 결과다. 치프라스가 원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리스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며 배짱 대응을 했지만, 그리스가 정말로 유로존을 탈퇴하면 독일 국민들의 세금으로 마련한 1500억 유로의 빚을 돌려받을 길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서로 엄포를 놓으면서 채무 재협상을 두고 ‘밀당’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올해 남부 유럽 잇따라 선거 예정

‘밀당’의 결말은 무엇이 될까.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서로 체면을 살리면서 실리를 챙기는 방법이다. 1월26일 회동에서 유럽 각국 재무장관들은 그리스 구호 프로그램 기한 연장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하면 빌린 돈을 갚을 기간도 자동적으로 연장되고 이자 부담도 낮아지는 효과가 있다. 그리스는 실리를 얻고 EU는 반(反)EU 선동이 유럽 전체로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이다.

사실 치프라스 신임 총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정치·경제·언론을 모두 장악하고 정치를 사유화한 과두 세력 올리가르히 문제 척결이다. 브뤼셀의 싱크탱크인 ‘브뤼겔’의 군트람 볼프는 “그리스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외국) 부채가 아니라 부채를 부유층과 올리가르히에게 지우는 개혁”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치프라스 신임 총리는 취임 첫날 반EU와 개혁 중단에 치중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개혁 과정에서 해직된 공무원들을 복직시키고 그동안 진행되어온 항구와 철도 민영화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같은 급격한 정책 노선 변경으로 그리스 국영은행의 주식 가격은 반 토막이 났다. 또한 치프라스 총리가 취임 첫날 아테네의 러시아 대사관을 찾아가면서 그리스가 본격적으로 EU와 거리 두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추측도 나온다.

2015년에는 프랑스·영국·포르투갈·스페인 등 8개 EU 회원국에서 선거가 예정돼 있다. 그만큼 유럽이 맞게 될 변화의 진폭도 크다. 그리스에서 촉발된 유럽 사회의 분열 위기가 극복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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