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김영삼 김대중·노무현 쓸쓸한 퇴장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02.1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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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당에서 쫓겨난 대통령들… 박 대통령, ‘반면교사’ 삼아야

“형식상으론 탈당(脫黨)이지만 실제론 출당(黜黨)이나 마찬가지다.” 5년 단임 직선제가 도입된 13대 노태우 대통령 이래 역대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임기 후반기에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소속 집권당을 떠나야 했다. 말이 좋아 당을 떠난 것(탈당)이지, 당에서 쫓겨난 것(출당)이다. ‘당신이 옆에 있으면 나까지 위험하다’는 분노를 거스를 수 없는 탓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에 이어 김영삼(YS)·김대중(DJ)·노무현 대통령이 다 그랬다. 이명박(MB) 대통령의 경우 마지막까지 당적을 유지하긴 했으나 정치 무대 뒷전에 비켜나 있어야 했다.

대통령 개인을 넘어 국가적으로도 손실인 이 한국적 비극은 하나같이 본인의 실정(失政)에서 비롯했다. 여기엔 권력의 지형이 달라지고 민심이 예전과 다름에도 여전히 군림하고자 했던 역대 대통령들의 시대착오적 사고도 크게 작용했다. ‘현재 권력’과 갈등을 빚게 마련인 ‘미래 권력’과 집단은 ‘차기’를 위태롭게 하는 대통령의 패착을 결단코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2월3일 국회 본회의 대표 연설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며 정치인이 그런 말로 국민을 속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또 당 주도의 고위 당·정·청 회의를 수시로 열어 국정현안을 풀어가겠다고 공언했다. 비박(非박근혜계)이 장악한 집권당과 청와대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차기’ 위태롭게 만드는 현재 권력 용납 안 해

탈당 첫 테이프를 끊은 이는 노태우 대통령이다.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의 산물로 탄생한 민자당 출범으로 인해 안정적 원내 의석을 확보한 노 대통령은 ‘민정계’ 박철언·박태준 의원 등을 내세워 ‘민주계’에 대한 견제를 시도했으나, 대세가 YS로 기울자 결국 민자당 총재직을 넘겨줬다. 그리곤 20일 후 탈당을 선언했다. 정치적 중립을 명분으로 내걸긴 했지만 제2이동통신(SKT) 특혜 시비가 겹치면서 자신의 직할부대인 민정계까지 비판 대열에 합류한 게 결정타였다.

YS는 ‘정치 9단’답게 대통령 권한을 행사했고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도입 등 나름의 치적을 남겼다. 한때 그는 “(민자)당이 내 인기의 반만 돼도 걱정을 않는다”고 호언장담할 정도로 9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랬던 YS였으나, 아들 현철씨의 부정이 드러나면서 모든 게 허사가 됐다. 임기 5년 차 벽두의 노동법 개정안 날치기 통과로 민심이 들끓고, 단군 이래 최대 대출 부정이라는 한보그룹 부도 사태에 이어 현철씨가 한보로부터 검은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자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민자당을 신한국당으로 개편하면서 당을 완전히 ‘YS당’으로 장악했던 그였으나, 외환위기 사태(IMF)에 즈음해 지지율은 8.3%로 폭락했다.

자민련 김종필(JP) 총재와의 DJP연합으로 집권한 DJ는 당명을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새천년민주당으로 바꾸면서 여당의 완벽한 오너가 됐다. 그러나 임기 2년 차에 터진 옷로비 의혹 사건 이후 ‘소장파’ 정동영 의원을 중심으로 한 ‘바른정치 실천모임’이 결성되는 등 그의 오너십도 이내 도전을 받았다. 그리곤 임기 3년 차에 차남 홍업씨와 3남 홍걸씨를 수뢰죄로 감옥에 보내면서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한국인 최초의 노벨 평화상 영예도 소용없었다.

YS·DJ 모두 단순 최대주주가 아닌 오너십을 가진 절대적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지만 차기 총선이나 대선을 앞두고 위기를 느낀 집권당의 공세는 가차 없었다. 직계마저 돌팔매질에 가세하는 판이었다. YS·DJ가 이랬으니 ‘입양(入養)’된 처지에서 개혁을 부르짖은 노무현 대통령의 처지는 불문가지였다.

도덕성을 내세운 정부였음에도 측근들의 부패 연루와 안팎의 반발에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며 취임 7개월 만에 집권당(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노 대통령은 ‘친노’ 그룹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기댔다가 사상 초유의 탄핵을 당했다. 탄핵 역풍에 힘입어 과반 이상을 확보해 제1당이 된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노 대통령은 그러나 재·보선, 지방선거에서의 잇단 패배로 무너졌다. “대통령의 낯가림이 너무 심하다. ‘친노’하고만 밥을 먹는 행태는 참을 수 없다”는 여러 ‘비노(무현)그룹’ 의원들의 푸념은 지난해 12월 박근혜 대통령의 친박 의원 7명과의 청와대 만찬을 연상시킨다. 취임 4년 차인 2006년 12월 그의 지지도는 5%대로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는 다음 해 2월, 임기 1년을 앞두고 열린우리당을 떠나야 했다.

MB는 집권당 내에 견고한 반대 세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와 흡사하다. 노 대통령에게 호남을 중심으로 한 민주계가 있었다면, MB에게는 박근혜를 중심으로 한 ‘친박’이 엄존했다. ‘내 편’만 끼고 도는 행태도 엇비슷했다. 더구나 차기 주자가 마땅치 않은 MB에게 ‘박근혜 의원’의 폭발력은 메가톤급이었다. MB가 명운을 걸었던 세종시 수정안이 ‘박근혜 의원’의 한마디로 일거에 무산됐다. 임기 4년 차인 2011년 5월에 있은 한나라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친이(명박)계’ 안경률 의원이 친박 황우여 의원에게 패한 것은 MB 시대가 저무는 징표였다. 박근혜 의원이 비대위원장을 맡아 당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개명한 것은 ‘MB 때가 묻은 한나라 간판으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의 소산이었다는 점에서 MB로서는 치욕적인 장면이었다. 그나마 박근혜 위원장과의 담판에서 ‘차기 대선 승리를 위해 적극 협력한다’는 다짐으로 출당을 면하기는 했다.

‘오너십’ 가진 YS·DJ조차 당에서 밀려나

‘역사는 반복된다’는 경구에는 모두가 공감한다. 그러나 권력자는 입증된 역사적 경고를 외면하는 반복까지 ‘반복’한다. 유감스럽게도 박근혜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청와대와 집권당 간의 갈등, 그로 인한 비극적 사태 도래는 전임 5명의 대통령들에게서 분명히 드러났다. 시간, 등장인물, 상황 전개 등만 다를 뿐 기본 패턴은 매한가지였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이를 답습하고 있다. 20%대로의 지지율 급락에 놀라 뒤늦게 국정 쇄신을 공약하고는, 여당 의원 다수와 국민들이 쇄신의 제1 대상으로 꼽는 김기춘 비서실장으로 하여금 국정 쇄신을 계속 주관케 하는 불감증 노출도 서슴지 않았다.

한때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김무성 대표와 신임 유승민 원내대표가 청와대를 정면으로 치받는 상황은 우연이 아니다. 김 대표가 박 대통령을 겨냥한 게 아니라고는 했지만 “증세 없이 복지는 불가능하며 정치인이 그런 말로 국민을 속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질타한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장삼이사(張三李四)들도 훤히 꿰뚫고 있다.

사실 청와대의 독주·패착에 대한 새누리당의 저항과 반발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지난해 지방선거 당시 서울시장은 물론 대통령의 본거지인 대구시장 당 후보 경선에서도 비박 후보가 당선됐다. 그 의미를 애써 축소하며 외면하던 청와대는 이후 정의화 국회의장, 김 대표, 유 원내대표에 이르기까지 연전연패했다.

민심과 ‘당심(黨心)’ 모두를 잃은 청와대의 속을 알 만하다. 누차 지적했듯이 떠난 민심은 여간해선 돌아오지 않는다. 민심에 기대 내년 총선을 바라보는 소속 의원들의 계산이 어떨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물며 의원들의 제1 관심사인 공천권을 비박이 완전 장악하고 있는 마당이다. 박 대통령은 과연 여당뿐 아니라 야당과도 소통하면서 민심을 보듬고 자기 쇄신 노력을 기울이는 일대 변신을 꾀할 수 있을까. 역대 대통령의 ‘출당’ 말로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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