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25. 사관 학살한 ‘무오사화’로 연산군 몰락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2.1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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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대통령 지정 기록물’ 공개 논란에 대한 역사적 교훈

사마천이 거세형인 궁형(宮刑)을 당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사마천은 흉노 토벌에 나섰다가 포로로 잡힌 이릉 장군을 옹호하다가 한(漢)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을 당했다. 사마천은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남을 도우려다 도리어 벌을 받는 것보다 더 큰 화는 없으며, 마음이 상심한 것보다 더 괴로운 고통은 없으며,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행동은 없으며, 궁형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습니다(<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라고 한탄했지만, 살아남아 <사기(史記)>를 썼다. 사마천은 <사기>를 쓸 때 자신을 궁형에 처한 무제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사마천은 황제들의 사적인 <사기> ‘본기(本紀)’에서 한나라의 개국 시조인 고조(高祖) 유방 본기보다 유방과 맞서 싸웠던 항우 본기를 앞 순서에 두었다. 그리고 무제를 미신이나 좋아하는 용렬한 군주로 그렸다. 무제는 크게 화를 냈으나 이것으로 죄를 주지는 않았다. 역사 기술은 사관의 몫이란 상식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이 사초 내용을 문제 삼아 김일손 등을 국문하고 있는 JTBC 드라마 의 한 장면. ⓒ JTBC
실록은 제왕 한 사람의 재위 기간에 발생한 일들을 기록한 역사서를 뜻한다. 그래서 상고 시대의 오제(五帝)부터 한 무제 재위(서기 전 141~서기 전 87년) 후반 때까지의 장구한 시기를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를 실록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실록이라는 이름이 붙은 최초의 역사서는 중국 남조 양(梁)나라의 주흥사(?~521년)가 편찬한 <황제실록(皇帝實錄)>인데, 이때의 황제란 양나라 황제를 뜻한다. 주흥사는 <황덕기(皇德記)> <기거주(起居注)> 등 역사서도 편찬했지만, 그의 저서 중에서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뜻밖에도 ‘하늘 천(天) 따 지(地)’로 시작하는 <천자문(千字文)>이다.

동양 사회에는 각 왕의 실록과 각 왕조 전체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기준이 있었다. 한 제왕이 세상을 떠나면 그다음 제왕이 전 왕의 사적을 정리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면 앞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에서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것이 이런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후대에 앞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한 것 중에는 <구삼국사(舊三國史)>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구삼국사>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고려 후기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 서문에 “지난 계축년(1193년) 4월에 <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인종 23년(1145년) 김부식이 국왕의 명으로 최산보 등 사관과 함께 <삼국사기>를 편찬한 지 50여 년 후에도 <구삼국사>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고려는 <삼국사기>는 물론 각 왕의 실록도 편찬했지만 각 왕의 실록은 현재 아쉽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중국 정사보다 <조선왕조실록>이 훨씬 생생

필자는 중국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明史)>나 청나라의 정사인 <청사고(淸史稿)>를 보고 크게 실망한 적이 있다. 예상과 달리 아주 소략했기 때문이다. <명사>나 <청사고> 등이 극도로 편집된 역사서라면, <조선왕조실록>은 당대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그대로 전해지는 현장중계 같은 역사서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조선의 실록은 3단계를 거쳐 편찬되었다. 한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춘추관에 실록청이 만들어진다. 실록청은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과 판서 같은 고위직들이 겸임하는 자리와 춘추관 소속의 전임으로 나뉘는데, 서술 권한은 겸임 고위직들이 아니라 전임 하위직, 즉 사관들의 몫이었다. 실록청은 갓 세상을 떠난 임금과 관련된 사료를 광범위하게 모으는데, 사관들이 매일 기록한 시정기(時政記)가 가장 주된 기초 사료였다.

<조선왕조실록>은 때로 임금과 신하들의 말은 물론 그 동작까지 묘사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말과 동작까지 자세하게 적을 수 있었던 데는 까닭이 있다. <사기> ‘오제본기’ 주석에는 “예(禮)에 말하기를 ‘움직임은 좌사(左史)가 기록하고, 말은 우사(右史)가 기록한다”는 설명이 있다. 두 사관의 역할 분담은 동양 철학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사기정의(史記正義)>는 “좌는 양(陽)이기 때문에 움직임을 기록하고, 우는 음(陰)이기 때문에 말을 기록한다”고 했다. 양은 살아 생동하는 것이므로 좌사가 기록하는 반면, 음은 좀 더 정체된 것이므로 우사가 기록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임금과 경연(經筵)에서 정사를 토론했던 경연관들도 경연 때 나누었던 내용을 기록으로 제출해야 했다. 사관의 시정일기와 경연관 등의 제출 기록 등이 사초(史草)로서 실록 편찬의 기초 사료가 된다.

이런 사초를 기본 사료로 해 만드는 실록은 모두 세 차례의 편찬 과정을 거친다. 사료들을 모아서 1차로 작성한 원고를 초초(初草)라고 한다. 이 초초를 검토한 후 수정·보완해 다시 작성한 원고를 중초(中草)라고 한다. 이 중초를 다시 한 번 수정·보완해 작성한 것이 최종본인 정초(正草)다. 정초는 교서관(校書館)에서 인쇄해 서울의 춘추관과 지방의 외사고에 봉안했다. 그리고 초초·중초·정초는 물에 씻어 그 내용을 지우는 세초(洗草)를 했다. 세초 때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造紙署)가 있던 세검정 부근의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연(洗草宴)이라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실록 편찬의 노고를 위로하는 잔치였다. 춘추관과 사고에 보관된 실록은 국왕도 볼 수 없었다. 정사에 필요한 부분은 승정원의 관리 등을 보내서 해당 부분만을 등서(謄書)해서 볼 수 있었다.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대신들은 물론 국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직필(直筆)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데 실록은 완성된 이후의 보관뿐만 아니라 작성 과정에서도 국왕이나 고위 관료들의 간섭을 배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연산군 4년(1498년)에 발생했던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선비 사(士)자 대신 역사 사(史)자를 써서 사화(史話)라고도 한다. 사관들이 집중적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무오사화는 시작 자체가 실록에 무엇을 실을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 그해 7월1일,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 등 훈구 대신들이 국왕이 거처하는 편전의 정문인 차비문으로 와서 ‘비사(秘事)’를 아뢴다는 명분으로 연산군과의 면담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도승지였던 신수근이 이들을 안내했는데, 예문관의 사초 담당자인 검열(檢閱) 이사공이 참석하려 하자 신수근이 “참여해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막았다. 이 무렵 조정은 수양대군(세조)이 일으킨 계유정난 이후 형성된 훈구 계열과 성종 때부터 관직에 진출한 사림 계열이 대립하며 투쟁하고 있었다. 연산군의 부친 성종은 사림을 대간(臺諫)에 배치시켜 훈구 세력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는데 정치력이 부족한 연산군은 이런 역학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사관 이사공을 배제한 채 훈구 대신들과 밀담을 나눈 연산군은 급히 금부도사를 찾았다. 이 날짜 <연산군일기>의 사관은 “의금부 경력(經歷) 홍사호와 의금부 도사(都事) 신극성이 명령을 받고 경상도로 달려갔으나 외인(外人)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를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금부 관료들이 달려간 곳은 사관 김일손이 풍질(風疾)을 치료하고 있던 경상도 청도군이었다. 의금부 도사에게 체포된 김일손은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史草)로 인한 것이라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오”라고 예견했다. 홍사호가 그 이유를 묻자 김일손은 “나의 사초에, 이극돈이 세조 때 전라도관찰사가 된 것은 불경을 잘 외웠기 때문이라고 쓴 것과 정희왕후의 상을 당했을 때 향(香)을 바치지도 않고 장흥의 관기 등을 가까이한 일을 기록하였는데, 이극돈이 이 조항을 삭제하려다가 실패했소. (중략)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오”(<연산군일기> 4년 7월12일)라고 예견했다. 공신이기도 했던 이극돈은 종1품인 좌찬성이자 실록청 당상관으로서 정6품 기사관이었던 김일손의 직속상관이었다. 이극돈이 자신에 관한 사항을 빼줄 것을 요구했으나 김일손이 거부하자 유자광 등과 짜고 김일손 등이 ‘세조에 대한 불미스러운 내용을 적었다’고 연산군에게 폭로하면서 무오사화가 발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등 세 사관이 능지처사를 당한 것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화를 입었는데, <연산군일기>는 이 과정을 생중계하듯이 낱낱이 적어서 후세에 전했다.

2월5일 종로 영풍문고에 진열된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 ⓒ 연합뉴스
지정 기록물 지정 권한, 중립 기구에 맡겨야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의 시간>이란 회고록을 발간하면서 대통령 지정 기록물을 보고 그 내용을 공개한 것이 불법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은 열람 공개 수준에 따라 일반·비밀·지정 기록물로 구분된다. 일반 기록물은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고 비밀 기록물은 차기 대통령·국무총리·각 부처 장관 등 비밀 취급 인가권자에 한해 열람이 가능하다. 문제는 지정 기록물인데 해당 기록의 당사자인 대통령만 최대 30년간 열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정 기록물을 열람하는 것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나 고등법원장이 발부한 영장이 있어야 가능하다. 더 큰 문제는 지정 기록물 지정 권한이 해당 대통령에게만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가 지정 기록물 지정 권한을 중립성이 보장되는 객관적인 기구를 설치해 맡기지 않고 대통령 자신에게 준 것은 큰 실책이다. 그나마 노무현 전 대통령은 9700여 건은 비밀 기록으로 분류해 비밀 취급 인가자들이 볼 수 있게 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은 1088만건 모두를 지정 기록물로 지정해 자신만 볼 수 있게 했다. 조선의 실록은 국왕도 보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두고 있었는데 지금의 지정 기록물 제도에서는 30년 동안 대통령 자신만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전 대통령처럼 이를 악용할 경우 아무런 대책이 없는 이런 법률은 하루빨리 개정해야 한다. 선조들의 실록 편찬 정신을 오늘에 되살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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