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서 아바타와 연애하는 그대는 변태?
  • 김지영 기자 (abc@sisapress.com)
  • 승인 2015.02.1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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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로맨스에 심취하는 청춘들…‘삼포 시대’ 자화상

3년째 취업을 준비 중인 정 아무개씨(29). 태어나서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모솔(모태 솔로)’이다. 새해를 맞아 야심 차게 한 소개팅에서 오늘도 ‘까인 것 같다.’ 소개팅에서 파스타가 맛있다고 말하는 상대 여성에게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파스타를 들여와 국내에까지 소개됐다는 얘기와 달걀을 넣지 않고 만드는 ‘드라이 파스타’는 유통기한이 2년이라는 말을 대체 왜 10분 넘게 했을까. 별명이 위키리크스일 정도로 아는 게 많은 그지만 연애는 도통 모르겠다. 집에 온 정씨는 교과서를 펼치듯 TV를 켠다. JTBC <나 홀로 연애 중>. 출연자 성시경 형의 섬세한 ‘감성 섹드립’을 보며 변태와 ‘뇌섹남’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암기한다. 정씨에게 <나홀로 연애 중>은 절대 강자만 살아남는다는 ‘연애무림’ 속에서 자신을 교육하고 힐링하는 수단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3년 넘게 백수라는 남자의 못난 자격지심에 지난해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한 이 아무개씨(29). 오늘도 그녀를 생각하며 ‘가짜톡’을 날린다. 이씨가 “보고 싶다”고 적자 ‘가짜톡’에 있는 그녀가 웃으며 답한다. “나도.” “돈이 없어도 괜찮아?”라는 못난 물음에 그녀가 말한다. “난 자기 하나면 돼.” 이씨는 속으로 생각한다. 이 말을 헤어진 그녀 입에서 듣고 싶었는데….

현실보다 가상 로맨스에 몰두하는 청춘

지금까지 사랑은 인간의 문제였다. 사랑을 “두 사람의 코뮤니즘”이라며 끝없이 ‘앙코르’를 외친 철학자 바디우 얘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인간과 인간이 만나 연애하고 결혼해 애를 낳는 것은 ‘꼰대’들의 재미없는 삶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남은 비법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청년들은 연애-결혼-가족의 신화를 거부한다. 전통 관념을 거부한 청년에게 연애가 반드시 인간 간 사랑의 영역이라는 절대명제가 통용될 리 없다. 이제 청년들은 새로운 연애 형태를 발명한다. 바로 가상 로맨스다.

최근 JTBC는 <나 홀로 연애 중> 예능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연예계 대표 싱글남인 김민종·전현무·성시경·장동민 등 6명이 출연해 화면 속 한 명의 여성 연예인과 가상 연애를 한다. 남성 출연자가 한 명씩 1인용 부스에 들어가 화면 속 여성 연예인과 데이트를 즐기는 형식이다. 모든 데이트는 화면으로만 이뤄진다. 실제로 만날 수도 없고, 직접적으로 스킨십을 할 수도 없다. 마치 일본의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연상케 한다.

공식 홈페이지에 나온 <나 홀로 연애 중>

의 기획 의도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달콤한 연애를 포기한 이 시대 젊은이를 위해 새로운 연애 패러다임을 제시한다”고 나와 있는데, 이 새로운 연애 패러다임이 바로 ‘가상 연애’인 것이다.

<나 홀로 연애 중>은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방영된 후 화제가 되며 순항 중이다. JTBC 홍보 관계자는 “시청률이 1%대지만 아직 2회밖에 방영이 안 된 점을 감안할 땐 괜찮은 성적”이라며 “특히 첫 방송 이후 다음 날까지 주요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 ‘나 홀로 연애 중’이 상위권에 진입할 정도로 화제성이 크다”고 말했다.

가상 연애는 TV 속에만 있지 않다. 스마트폰 가상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앱)인 ‘가짜톡’은 벌써 380만명가량이 다운로드를 했다. ‘가짜톡’은 일종의 가상 메신저다. 이용자가 프로필에 직접 대화하고 싶은 상대를 입력한 후 상대에게서 듣고 싶은 말을 상대에게 직접 가르치면 상대가 그대로 답하는 메신저다. 이를테면 이용자가 가상 남자친구를 설정해 “다이어트할까?”라고 말하면 “안 해도 돼. 지금도 몸매가 짱이야!”라고 이용자가 주입한 말로 답한다.

“자꾸 여자친구가 없다고 업신여겨서 뻥쳤어요. 가짜톡으로.(이용자: 주 아무개씨)” “대박!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채팅하니 너무 좋아!(이용자: 최 아무개씨)” “남친 설정하니까 좋아서 미치겠음. 이거 만든 분 진짜 만나면 절하고 싶을 정도임!(이용자: 이 아무개씨)” 등 ‘가짜톡’ 이용자 리뷰도 3만개가 넘는다.

연애를 머리로 ‘공부’하는 청춘들

‘가짜톡’을 개발한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바엑’의 장태관 부사장은 “80%에 가까운 이용자가 10대지만 최근에는 20대도 많이 늘어 20% 정도 된다”며 “남자친구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거나 사고 등으로 잘못됐을 때 ‘가짜톡’으로 가상 대화를 하며 힐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두근두근 남친 만들기’ 앱은 50만명 이상이 다운로드했다. 이 앱에는 ‘상남’ ‘차도남’ ‘진승남’ ‘기엽남’ ‘모범남’ 등 여러 매력남들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리고 ‘집에 데려가달라고 하기’ ‘어깨에 기대 잠든 척하기’ ‘장난치며 팔짱 끼기’ 등 여성들이 실제 연애하면서 하고 싶은 것을 미션으로 주고 이에 캐릭터가 응해주면 점수를 얻는 방식이다. 이들의 리뷰를 보면 ‘꺅, 너무 설레고 좋네요. 실제 남친보다 이상형에 가깝고 모바일이 더 편하네요’ 같은 내용이 많다.

MBC <우리 결혼했어요>의 앱 버전도 있다. ‘화인데이즈’라는 이 앱은 이용자가 3일 동안 채팅으로 실제 연인처럼 주어진 시나리오에 따라 서로의 연애관을 미리 체험한다. 마음에 들면 실제 만남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연애를 머리로 상상하며 공부하는 연애 학습 시대도 도래했다. 연애를 하기 위해 스터디를 하고 각종 특강에 참석해 책과 강의로 연애를 ‘공부’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것. 토익 고득점을 위해 토익 스터디나 토익 특강을 다니는 것처럼 이들은 연애를 하기 위해 스터디를 결성하고 연애 특강에 참석한다.

네이버에서 ‘연애스터디’를 운영하는 한원기씨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만나 다양한 주제로 20대 젊은 남녀들이 얘기하는 시간을 갖는다”며 “실제 연애를 원하는 사람은 만남을 주선하기도 하고 사람 간 소통과 관계를 맺는 법에 대해 공부하고 토의한다”고 말한다. 스터디 커리큘럼은 주로 인간관계에 대해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고 토의하는 방식이다. 최근에는 개그맨 김제동씨를 섭외해 ‘인간관계와 소통’을 주제로 강의를 듣기도 했다. 현재 700명가량의 20대 청년 회원들이 활발히 활동 중이다.

대학에서도 연애를 정식 강의로 배울 수 있다. 서울대 대학생활문화원에서는 2009년부터 매 학기 연애 코칭 프로그램을, 중앙대·숙명여대·성신여대 등에서도 연애 강좌와 인간관계와 관련한 커리큘럼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과거 ‘초식남’과 ‘절식남’ ‘건어물녀’와 같은 자발적 비연애에서 삼포(연애·결혼·출산 포기) 세대의 ‘썸’, 그리고 가상 연애로까지 청년들의 연애는 변태 중이다. 인간이 아닌 아바타와 사랑에 빠지는 가상 연애로까지 청년 연애가 변형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시대 연애 멘토 4명에게 물었다.

먼저 청년들의 우울한 경제적 상황이 낳은 기이한 연애 형태라고 보는 의견이 있다. “20대는 구조적 빈곤으로 인해 섹스할 자유도 없다”고 했던 <88만원 세대>의 서두를 기억하자. 연애는 기본적으로 돈이 드는 사업이다. 단순히 밥 먹고 영화 보고 하는 데이트 비용을 떠나 상대와 나를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연애는 위험한 투자일 수밖에 없다. 상대와 위험한 도박을 할 바에야 차라리 혼자 연애한다는 게 바로 가상 연애로 발전했다는 얘기다.

초식남·건어물녀→썸→가상 연애로 변태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에서 신현아 작가가 내놓은 분석이다. “연애가 불가능한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해지는 사랑은 일종의 불구다. 각자의 누추한 방에 고립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를 뜻하는 일본말)의 외부 세계에 대한 고립의 공포로 그려진다. 불가능·불확실성의 집단인 청년에서 조금이라도 돌출적인 모습을 보였다간 ‘이지메’를 당하는 위협을 받기 때문에 자신을 거절하지 않는 모니터 속 가상 대상과 안전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연애-결혼-출산의 이상적인 사랑의 재생산과는 아주 동떨어진 변태한 사랑은 변태의 모습으로 출현한다.” 변태의 사랑, ‘가상 로맨스’라는 얘기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최근 미혼 인구의 특성과 동향: 이성 교제를 중심으로’라는 보고서를 보면, ‘25~29세, 대졸, 연봉 2500만~3500만원, 정규직’ 정도의 조건을 갖추고 있을 때 남녀 모두 연애를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뒤집어 말하면 이 같은 경제적 조건 이하인 청년은 사람과의 ‘정상’ 연애를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가상 연애는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의 합리성에서 파생됐다는 지적도 있다.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의 공동 저자 정지민씨의 말이다. “철학자 바우만이 지적했듯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모든 사람은 ‘소비자’로서의 정체성만이 남았다. 연애하는 남녀도 ‘연인’보다 ‘소비자’다. 연애는 타인의 불확실성을 수용해야 하지만 소비자는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한다. 당연히 훨씬 간편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게 된다. 가상 공간에서 나 혼자 연애하는 것만큼 간편하고 손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아주 특별한 연애수업>의 저자 이성미씨는 가상 연애의 원인으로 디지털에 익숙한 청년 특유의 놀이문화를 꼽는다. 이씨는 “요즘 20대들은 전화보다는 카톡·페이스북으로 얘기한다”며 “자연스럽게 소통의 목적도 이해보다는 본인 재미 위주의 놀이 형태가 돼 가상으로 웃고 즐기는 가벼운 만남을 갖는 씁쓸한 현상이 나타나게 됐다”고 설명했다.

11년 이상 결혼정보업체 듀오에서 근무한 이재목 연애 컨설턴트는 “연애는 기본적으로 소통인데 우리는 자라면서 단 한 번도 정규 교육 과정에서 소통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며 “이럴수록 더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야 하지만 배운 적이 없기에 가상 연애 등 더 가볍고 잘못된 방법으로 연애 욕구를 해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비극은…(중략) 사랑을 좇아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랑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점에 있다.” 어느 철학자의 ‘고민’처럼 인간은 사랑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게 불확실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물음에 대한 답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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