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거리 외교 안 하면 우리는 굶어 죽는다”
  • 감명국 기자 (kham@sisapress.com)
  • 승인 2015.04.16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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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의 미·중 틈바구니 속 한반도 진단

역사학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조선 중기 한반도가 청나라의 말발굽에 초토화되고, 인조가 청 태종에게 엎드려 절하며 항복을 하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것은 외교 전략의 실패에 따른 것이라고 진단한다. ‘친명 사대주의자’들이 대의명분만을 앞세운 채 실리 외교를 펼쳐야 하는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를 내세워 ‘친명 노선’을 분명히 했다. 이는 결국 청의 무자비한 보복으로 이어졌다. 지금 동북아 정세를 둘러싸고 등거리 외교란 말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강(兩强)의 틈바구니에 끼인 우리의 처지에서 등거리 외교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김대중 정부 말기와 노무현 정부 초기에 걸쳐 통일부장관을 역임한 정세현 전 장관을 4월9일 만나 북핵을 둘러싼 한반도 상황을 진단해보았다.   

 

ⓒ 시사저널 우태윤
얼마 전 이란 핵문제가 타결됐다. 이제 남은 건 북한 핵문제인데, 미국 국무부는 이란과 북한의 핵은 엄연히 다르다고 발표했다.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핵 기술력에서 차이가 난다는 걸 밝힌 것이다. 이란은 아직 핵실험도 안 했고, 북한은 세 번이나 했고. 물론 이란과 북한 핵이 다르다는 데 나도 동의한다. 그런데 기술력의 차이가 아니라,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중요도에서 다르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즉 이란 핵은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다. 이란이 설령 핵을 가진다 한들 미국이 그것을 구실로 해서 중동 정치를 미국 주도로 끌고 갈 수 있는 역할을 하기 어렵다. 반면 북한의 핵은 미국이 동북아 정세를 주도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미국 입장에서 이란과 북한의 핵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북핵을 이용해서 미국이 동북아 정세를 주도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지금 중국이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오지 않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취임 후 그해 6월에 미국을 가서 오바마 대통령을 만났다. 거기서 시 주석은 미국을 깜짝 놀라게 하는 발언을 했다. “태평양은 미국과 중국이 나눠 써도 될 만큼 충분히 넓다”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얘기인가. 미국더러 태평양의 반을 내놓으라는 얘기다.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에서 중국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부쩍 많아졌다. 중국의 경제 발전 속도로 보건대 GDP(국내총생산) 총액 면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8년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도 중국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서 군사대국이 될 것이다, 동북아 지역의 맹주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미국이 지금부터 대비하지 않으면 결국 동북아 지역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판국에 2009년 당시 후진타오 주석은 공개적으로 중국의 외교 목표는 ‘중화 부흥’이라고 선언했다. 중국이 과거 아시아 주변 국가들을 거느리던 시절의 옛 영화를 되찾겠다는 뜻이다. 미국으로선 비상이 걸린 것이다. 미국이 어떤 명분으로 동북아 지역에 군사력을 더 강하게 해서 중국이 감히 미국을 넘보지 못하게 막느냐 하는 숙제가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돈이 없다. 해외 개입을 너무 많이 해서 국방비를 많이 쓴 탓이다. 앞으로 국방비에 관한 한 2013년부터 매년 500억 달러씩 10년 동안 감축을 해나가야 한다. 자력으로는 어려운 것이다. 북한 주변 국가들의 대(對)북핵 공포증을 유발해서 그들로 하여금 군사력을 강화하도록 하고, 미국이 그들과 군사동맹을 강화시켜 나가는 게 효과적이라고 보고 있다. 과거 중국의 외교술이었던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식으로 중국에 대한 견제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이 ‘한·미·일 3각 공동 체제’를 강조하는 것도 그런 차원인가.

지금 일본이 추진하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 방침과 자위대의 대외 출병 등을 미국이 인정하면서 아베 정권을 도와주고 있지 않나. 일본의 역사 왜곡 등 과거사 문제만 해도 셔먼 미국 국무부 차관의 발언이나 카터 국방장관의 발언이 같은 맥락이다. 한·일을 대중(對中) 견제의 전초기지로 삼으려 하는데, 그 (역사 왜곡) 문제로 너희들끼리 서로 싸우면 전선이 깨지니까, 이제 과거를 넘어서서 미래 지향적으로 좀 단결하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사드 배치 문제도 그런 맥락이다. 미국으로서는 북핵을 빌미로 중국까지 견제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 각도만 살짝 틀면 중국이니까. 그런데 북핵 문제가 해결되어버리면 미국의 동북아 지역에 대한 장악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은 내심 북핵 해결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미국은 6자회담이나 북미 대화 등 북핵 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큰 것 아닌가.

지난 2009년부터 미국은 북핵 정책을 ‘전략적 인내’로 바꿔버렸다. 1990년대 북핵 문제가 처음 터졌을 때 클린턴 정부는 협상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부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명명하면서 강한 압박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북한이 여기에 꺾이지 않고 오히려 핵실험을 강행하는 등 ‘벼랑 끝 전술’로 더 세게 받아치고 나오니까 부시 정부는 북핵 문제 해결에 의욕을 잃어버렸다. 이어서 집권한 오바마 정부는 협상도 안 되고 압박도 안 되니까, ‘전략적 인내’라는 논리로 사실상 방치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국 견제 수단으로 북핵 문제를 이용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미국의 의도가 숨어 있다.

반대로 중국 입장에서 보면, 그런 미국 의도를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나서서 북핵을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그래서 미국의 이른바 ‘중국 역할론’ 내지 ‘중국 책임론’이 나오는 것이다.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보고, 북핵은 중국의 국익에도 손해가 되니까, 북한을 압박하든 달래든 어쨌든 중국이 나서서 북핵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리다. 하지만 북한이 핵을 카드로 삼아 달성하려는 목표는 미국과의 수교다. 미국과 국교 수립 관계가 되면, 북한이 먼저 미국을 치지 않는 이상 미국도 북한을 먼저 칠 수는 없다. 그런데 미·북 수교 문제를 중국이 어떻게 책임지나. 또 하나의 카드는 대북 경제 제재를 풀고 경제 지원을 받겠다는 것인데, 이 부분도 역시 지분을 제일 많이 갖고 있는 미국이 나서야 가능하지, 중국은 발언권이 별로 없다. 즉 북한은 미국과 대화하고 싶어 하는데, 미국은 자신은 나서지 않고 중국더러 대신 역할과 책임을 다하라는 식이다. 또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 미국이 오판하는 부분도 있다. 미국은, 북한이 중국 말이라면 무조건 다 듣는 줄 아는 모양인데, 절대 그렇지 않다. 과거부터 거대 공산국가인 중국과 소련(러시아) 틈바구니에서 하도 시달려온 탓에 그들의 협박·공갈에 휘둘리지 않고 나름대로 생존하는 법을 북한은 터득했다. 큰 나라라고 해서 그렇게 크게 겁을 안 낸다. 어차피 못살기 때문에 경제 제재도 큰 효과를 못 본다.

그래서일까. 지금 북·중 관계는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상황인 듯하다.

물론 예전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 과연 북한을 내칠 수 있을까. 중국 입장에서 보면, 북한이 애물단지이면서도 미·중 관계에서 미국을 대신 쥐고 흔들 수 있는 역할을 해준다. 중국으로서도 북한이 필요한 부분이 분명 있는 셈이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인 듯하다. 미·중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잘 펼쳐야 한다는 주문도 있다.

그렇다. 등거리 외교를 안 하면 죽는다. 미국을 향한 ‘안보 외교’도 중요하고, 중국을 향한 ‘경제 외교’도 중요하다. 과거처럼 미국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굶어 죽는다. 하루아침에 중국이 우리를 무역 적자 국가로 만들 수 있다. 그만큼 중국의 힘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졌고, 이를 인정해야 한다. 만약 한국이 사드 배치 등으로 중국을 불편하게 만들면, 그들은 당장 경제적으로 보복할 것이다. DJ(김대중) 정부 때 농민들의 반발 여론을 의식해서 중국의 마늘 수입을 막은 적이 있다. 그러자 중국이 바로 우리의 휴대전화 수입을 막는 보복에 나섰다. 그래서 결국 우리 정부가 손을 들었다. 중국은 그런 식으로 보복하는 나라다. 자국의 이익 앞에서는 봐주는 게 없다. 우리 경제가 1992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더 크게 성장한 것 아니냐. 그래서 DJ 정부 때부터 대중국 무역 흑자를 냈다. 한국전쟁 이후 안보를 위해 미국에만 의존하던 관성으로 ‘안보 우선주의’만을 내세워선 곤란하다. 상황이 달라졌다. 1998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16년 동안 중국 경제에 의존해온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미국에도 ‘너밖에 없다’, 중국에도 ‘너밖에 없다’ 하는 식의 등거리 외교밖에 방법이 없다. 그러기 위해선 대통령이 외교의 귀재가 되어야 한다. 임기응변도 강해야 한다.

그렇잖아도 지금 사드 배치 문제로 국내 여론이 양쪽으로 갈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런 말을 한다.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 사드를 배치해주겠다고 하는데 왜 반대하느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미국은 지금 사드 배치 비용을 부담할 능력이 없다. 한국 국방 예산으로 사서 (배치) 하라는 거다. 사드 한 세트에 2조원, 그러니까 약 20억 달러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미국은 매년 국방비를 500억 달러씩 깎아나가야 할 판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이런 논리로 우리에게 불쾌감을 표출할 수 있다. 우리 중국한테 물건 팔아 번 돈으로 미국의 사드를 사서 우리 턱밑에 들이밀겠다는 것이냐고.   

일각에서는 한·미 관계의 특수성으로 볼 때 결국 사드 배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하는 전망도 나온다.

그게 문제다. 미국이 작심하고 밀어붙이면 우리로서도 도리가 없다는 식의 패배주의는 곤란하다. 지금 상황을 보면, 여당 내에서 ‘친박계’와 ‘비박계’가 찬반으로 나뉘어 싸우는 양상이다. 그런데 친박이 반대하는 것을 보면, 다행히 청와대가 반대하는 듯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대통령의 결정이 중요하다. 거기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향후 북한은 어떤 전략으로 나올 것으로 보는가.

지금의 어수선한 틈새에서 핵 능력을 더 강화하려 할 것이다. 향후 협상에 대비해 몸값을 높여놓자는 전략인 것이다.

올해가 남북정상회담 적기라는 지적이 있다.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남북정상회담이든 장관급 회담이든 빨리 남북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지금 북한이 가장 예민해하는 게 전단 살포 문제니까, 그 부분을 해결해줘야 한다. 남북 관계를 풀어나가는 데 정상회담이 가장 효율적이다. 북한을 우리가 끌어안는 식으로 가야 한다. 그러면서 북측에 대고 ‘6자회담 열 테니까 나와라. 미국도 비록 소극적이긴 하지만 명분상 안 나올 순 없을 거다. 미국이 나오면 그때 북측이 합리적으로 협상해서 수교도 받아내고 경제 지원도 받아내고 해야 할 것 아니냐’ 하는 식으로 설득해야 한다. 지금의 복잡한 동북아 정세를 대한민국이 주도해서 끌고 나가야 한다. 끌려 다녀선 절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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