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차라리 비워두자”는 소리 나올 판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04.2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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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총리 잔혹사’…권위 추락과 국정 동력 상실 우려

‘순수’ 임명직으로서 가장 높은 공직은 국무총리다. 행정 각부를 통할하는 권한은 헌법으로 보장돼 있다. 국가 공식 의전 서열은 5위지만 국가원수인 대통령 유고 시에는 승계 서열 1위다. 역대 총리 43명 중 2~3명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청와대 비서실의 통제나 받는 ‘대독 총리’ ‘의전 총리’였음에도 선망의 대상임은 분명하다.

또 그런 자리이기에 총리에 오르면 차기 대권 후보로 거명된다. 실제 총리를 역임한 후 대통령이 된 사람은 ‘어쩌다’ 된 제10대 최규하 대통령뿐임에도 그렇다. 때문에 총리 후보로 지명되기 전부터 견제가 집중되고 현직에 오르더라도 온갖 시비에 휘말리기 일쑤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부터 그랬다. 우리나라 최초의 총리 지명자인 이윤영 총리서리는 네 차례나 국회 인준이 거부돼 서리 4관왕에 ‘올랐다’. 이런 기막힌 경우와 달리 네 번째 총리로 지명된 이윤영씨의 국회 인준을 기다리는 동안  총리서리로 대기하던 백두진 재무부장관은 아예 총리 자리를 꿰찼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 시절 두 차례 국회의장에 이어 국무총리를 또 한 차례 역임했고, 박 대통령 말기엔 10대 국회의장을 지내는 등 ‘직업’이 총리고 국회의장이었다. 관운(官運)이란 단어가 실감 나는 두 사람의 대비되는 행로다.

상념에 잠긴 ‘식물 총리’.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의 3000만원 수수 의혹 등과 관련해 4월21일 사퇴 의사를 밝힌 이완구 국무총리가 서울 삼청동 공관 거실을 서성이고 있다. ⓒ 연합뉴스
광주민주화운동 즈음, 민간인에서 졸지에 총리서리가 되고 비록 16일간이지만 대통령 역할까지 맡았던 박충훈 대통령권한대행, ‘책임 총리’를 자임하다가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건방진 X”라는 욕설을 들으며 125일 만에 물러난 이회창 총리 등등 역대 대통령 시절마다 얽힌 총리 관련 사연들은 무진장이다. 역대 최단임 기록 보유자인 제6대 허정 총리 스토리는 파란만장 드라마다. 허정 외무부장관은 4·19 혁명이 일어나자 49일간 대통령권한대행과 내각 수반을 겸하고, 이어 64일간의 국무총리 기간 중 51일 동안은 대통령권한대행을 다시 겸한다. 장면 내각 총사퇴와 윤보선 대통령 하야가 뒤섞여 벌어진 일이다.

허정 총리의 64일 최단 기록은 정권이 무너지는 혁명적 상황에서 이뤄졌는데 그를 능가 혹은 버금가는 기록이 수립됐다. 제43대 이완구 총리에 의해서다. 그는 총리 취임 62일 만에 사의를 표명했고 박근혜 대통령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물러난 것과 진배없는 ‘식물 총리’ 상태로 10여 일을 지냈다. 외국을 순방 중인 대통령이 귀국한 후 정식 퇴임했으므로 공식 기록상으로는 허 총리에 밀리는 것이다. 이 총리는 ‘단임 부문’에서 1위 자리를 놓쳤더라도 중도하차 사유 등 ‘질적’인 측면까지를 감안하면 허 총리를 능가한다. 무엇보다 혁명적 상황이 아닌(‘성완종 리스트’ 파문을 혁명적 상황으로 파악하면 얘기는 다르나) 평시에 수립됐다는 시점과, 재임 중에 구체적 범죄 혐의가 검찰 수사 대상이 됐다는 사실 때문이다. 여기에 실제 구속·처벌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신기록 ‘다관왕’이 될 게 확실시된다.

정부의 얼굴인 총리를 포함한 정권 핵심 인물들이 줄줄이 검은돈 스캔들에 휘말린 현 정부는 가공할 난국에 빠져 있다. 사실 몇몇 핵심 인사의 돈은 대선 자금과 직결되는 것이고 자칫 정부의 정통성 시비까지 야기할 만한 것이라서, 혁명적 상황이라 이름 붙여도 손색은 없다. 차라리 ‘총리 자리를 없앴으면’ 하는 것이 박근혜 대통령의 심정일 게다. 총리 문제로 인해 박 대통령이 썩인 골머리가 얼마일까를 곱씹으면 이런 지적이 한갓 우스개일 수가 없다.

2월16일 이완구 총리에게 바통을 넘긴 박근혜 정부의 초대 총리 정홍원. 오른쪽은 2014년 5월 세월호 참사에 책임을 지고 사퇴 의사를 밝힌 정홍원 총리 후임으로 지명된 안대희 총리 후보자. 안 후보자가 전관예우 시비로 자진 사퇴하고 다음의 문창극 총리 후보자마저 자진 사퇴하면서 정 총리는 ‘도로 총리’가 됐다. ⓒ 연합뉴스
연속 낙마에 ‘식물 정부’ 우려도

정권 인수위 시절 이 정부 초대 총리로 지명한 김용준 후보자가 부동산 투기 의혹과 장남 병역 시비로 자진 사퇴한 이래 안대희·문창극 후보자도 각각 전관예우, 역사 인식 논란 속에 자진 사퇴했다. 김용준 후보의 낙마는 새 정부에 가장 중요한 첫 1년을 허송케 하고 권위를 여지없이 뭉개버리게 만든 인사 참사의 전주곡이었다. 총리 지명 당일부터 ‘무늬만 총리’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았던 정홍원 초대 총리는 존재감 없이 어물어물하다가 물러났다. 특히 취임 1년 2개월 만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가 후임 총리 후보자들이 줄줄이 사퇴하는 바람에 2개월 만에 ‘도로 총리’가 됐다. ‘총리 재개’ 8개월 동안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였고, 국정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총괄’했다. 부동산 투기, 병역 기피 의혹 등 ‘의혹 종합세트’ 시비와 언론 농단으로 비치는 실언에도 불구하고 현직 의원의 이점 덕에 국회 인사청문회 벽을 가까스로 넘은 이완구 총리의 초반 기세는 대단했다. 이 총리는 장·차관들의 ‘출석 군기’까지 잡는 등 요란을 떨었지만 두 달도 못 갔다. ‘성완종 리스트’로 치명상을 입었다.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한 총리가 같은 당내 전직 동료 의원이 쏜 ‘부패탄’에 급소를 맞은 것이다. 양파 껍질 벗기듯 잇따르는 의혹과 거짓 해명은 검은돈 의혹의 신빙성을 높이는 것은 물론 인성마저 의심케 만들었다. 까발려진 경망함만으로도 총리직 수행이 불가능하게 됐다. ‘위선 총리’ ‘식물 총리’에 이어 다른 어떤 별칭이 나올지 궁금하다.

‘낯을 가리다’ 보니 인력 풀이 좁고, 너무 따지고 고르다 되레 최악의 카드를 뽑는다는 비판을 듣는 대통령이다. 인선 패착의 원인이야 어찌 됐건 대통령은 ‘총리 노이로제’에 걸릴 법하다. 다음 총리를 구해야 하는 숙제를 안은 대통령이  ‘비워두는 게 허용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상상을 하고, 어찌어찌 총리를 ‘얻게 되면’ ‘일 안 해도 좋으니 사고나 치지 마시라’고 당부할 것이라는 농이 그럴싸하게 들릴 정도다. 총리 수난이 원체 심한 탓인지 ‘총리의 무덤’이니 ‘총리 잔혹사’니 하는 지적이 오히려 한가롭게 들린다.

어차피 총리의 역할이라는 게 한계가 있고, 따라서 총리가 없다고 국정 운영에 결정적 차질이 빚어지는 것은 아니다. 총리 부재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거기에서 파생되는 정부의 권위 추락이다. 단순한 모양새의 흠집이 아니라 국정 수행을 위한 동력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에 심각하다.

박 대통령이 빠른 시일 내에 훌륭한 총리감을 구하고, 그가 국회 청문회를 통과하더라도 조기에 국정 정상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성완종 리스트’가 초래한 쓰나미를 대충 추스르는 데도 최소 3개월은 소요된다. 여름휴가, 정기국회 그리고 2016년 총선으로 이어지는 정국 일정을 상정하면 끔찍하다. 벌써부터 ‘식물 정부’ 소리가 나도는 게 우연이 아니다. 때늦은 일대 사정을 통해 분위기를 일신하고 개혁 드라이브를 재가동한다는 ‘김기춘 각본’의 정국 운용 스케줄은 헝클어졌다. 그렇더라도 조속히 총리를 임명하고 전열을 재정비해야 한다. 국회 청문회를 최단 기한에 무난히 넘길 재목을 찾는 게 급선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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