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 제로’ 진보 정당, 길어지는 한숨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5.05.2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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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감 휩싸인 정의당·국민모임, 4자 연대 추진해 총선 대비 ‘생존 전략’

4·29 재보선 이후 진보 진영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선거 결과를 통해 확인된 민심은 냉랭했다. 정의당·국민모임 등 진보 정당들은 치밀한 선거 연대를 바탕으로 유의미한 득표를 거두는 데 실패했다. 각 당이 내세우는 노선 및 정책 등도 거의 어필하지 못했다. 이번 재보선 국면에서 진보의 존재감은 ‘제로’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대로라면 내년 총선에서 공멸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진보 진영 안팎에 팽배하다.

현재 각 진보 정당 내부에서는 지난 재보선에 대한 반성 및 총선 전략 논의가 한창이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각 당 지도부 및 당원들로부터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는 가운데 핵심 문제의식은 다음으로 모아진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총선 전까지 주요 정치세력 모두가 ‘진보’라는 깃발 아래 하나로 모여 국민에게 존재감을 주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서울 관악 을 보궐선거에서 낙선한 무소속 정동영 후보(왼쪽 두 번째)가 4월29일 김세균 국민모임 상임대표(왼쪽) 등과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 연합뉴스
4자 연대 ‘대중적 진보 정당’ 창당이 관건

진보 재편. 현재 진보 진영에 떨어진 절박한 과제다. 내년 4월에 치러질 20대 총선은 진보 진영에 새로운 정치 지형이 만들어지는 ‘정초(定礎) 선거’로 인식되고 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이 사상 최다인 13명을 원내에 진입시키는 ‘쾌거’를 이룬 이후, 진보 진영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됐다. 부정 경선 파문은 진보 진영 전반에 타격을 안기며 통진당 분열을 낳았다. 이석기 전 의원 등 통진당 주요 인사가 내란음모 혐의 등으로 붙잡히면서 공안 바람이 불었다. 지난해 12월에는 헌법재판소가 통진당 해산을 결정하는 유례없는 일까지 발생했다. 통진당은 2004년 첫 원내 진출 이후 진보 정치의 대중화를 이끌어온 민주노동당의 후신이다. 통진당 해산은 곧 10여 년 이상 구축해온 진보 정치의 인프라가 대폭 파괴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각종 논란과 잇따른 사건들은 유권자 상당수가 진보 정치로부터 등을 돌리는 요인이 됐다. 돌아선 국민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쇄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진보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 각 진보 정당의 공통된 생각이다. 결국 내년에 치러질 총선은 통진당 해산 이후의 ‘진보 재편’을 촉진하는 계기인 동시에, 이것이 국민들로부터 냉정하게 평가받는 자리인 셈이다. 이번 4·29 재보선이 진보 진영에 매우 중요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대 총선이 채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치러진 ‘총선 전초전’인 만큼 진보 재편, 나아가 야권 재편의 가능성까지 엿보며 유의미한 성과를 거둬야 하는 선거였다.

진보 진영에서는 나름의 전략적 행동이 있었다. 새로운 ‘진보’ 가치를 내걸고 각 세력이 연대해 국민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재보선 이후에는 선거 과정에서 거둔 성과를 주춧돌 삼아 ‘실질적 통합론’으로 나가자는 것이 범진보 진영의 로드맵이었다. 정의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진보 재편의 확대 및 강화가 이번 재보선의 가장 큰 목표였다. 이를 위해 다른 진보 정당과의 연대를 바탕으로 단일화 후보를 내는 등 선거 전술을 펴려 했다”고 말했다. 국민모임·노동당·노동정치연대 등과의 긴밀한 합의를 통해 각 지역구마다 단일 진보 후보를 내세워 ‘진보 표심’을 모으는 것이 핵심이었다.

특히 국민모임은 지난 1월 이후 창당 작업이 진행 중인 상황임에도 이번 재보선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눈길을 끌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모호한 중도 정체성으로는 야당다운 모습을 기대하기 힘들다. 정권 교체를 열망하는 국민에게 진보적 가치가 대안일 수 있음을, 감동으로 다가갈 수 있음을 이번 재보선 국면에서 알릴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 국민모임 측 입장이다. 이번 재보선에서 진보 연대를 이끌며 유의미한 성과를 내 위력적인 ‘대중적 진보 정당’ 건설의 초석을 놓고,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창당 작업에 나서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각 정당들이 공히 인정하듯 “결과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이번 재보선의 결과다. 야심 차게 추진된 4자 연대는 초반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갈등의 진원지는 야권 및 진보 성향 유권자가 많은, 4·29 재보선 최대 격전지 서울 관악 을 선거구였다. 그 중심에 새정치연합에서 탈당해 국민모임에 합류한 정동영 전 인재영입위원장이 있었다. 당초 정 전 위원장은 출마할 뜻이 없었으나, 국민모임의 인재 영입 작업이 번번이 좌절되자 결국 자신이 총대를 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국민모임 지도부의 한 인사는 “진보적 가치를 대변하는 유력 인사를 끌어들이려 노력했으나 생각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마땅한 인물이 없어 인재영입위원장인 정 전 고문이 직접 나서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정 전 위원장의 출마는 당 안팎에서 부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일단 국민모임 내에서부터 마찰이 발생했다. 학계와 문화예술계, 새정치연합 내 개혁 성향 인사 및 정동영계 등 다양한 인사들이 모인 국민모임이 화학적 결합을 이루지 못한 단면이 고스란히 노출됐다. 진보 정당 4자 연대에서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정 전 위원장이 진보 연대의 파트너로 과연 적합한가’라며 의문을 품는 목소리가 각 정당에서 표출됐다. 특히 정의당 내 국민참여당계 인사 다수에게는 노무현 정부 말기 쌓였던 정 전 위원장과의 앙금이 상당했다. 급기야 후보 단일화 논의가 진행되던 중 정 전 위원장이 독자적으로 후보 등록을 마치면서 4자 연대는 파행을 빚었다. 자진 사퇴, 개별 지지 선언 등으로 ‘불안전 단일화’가 이뤄지긴 했으나, 유권자들에게 진보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결국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들 내부의 한계와 분열상만을 노출한 채 선거가 마무리됐다.

천호선 정의당 대표(오른쪽 두 번째)가 5월18일 국회에서 열린 상무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9~10월까지 통합 논의 진행될 것”

그래도 결론은 ‘통합’이다. 흩어진 진보 진영을 한데 묶어세우는 것이 유일한 살길이라는 데는 모든 진보 정치세력이 공감한다. 시사저널이 접촉한 각 진보 정당 관계자들은 “진보 통합을 통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도록 노력할 것” “당 지도부의 진보 통합 의지가 강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논의에 임할 것” 등 진보 통합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정의당·국민모임·노동당·노동정치연대 등 주요 진보 정당 및 세력들은 일주일에 1회 이상 ‘4자 정무협의회’를 갖고 통합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선거 패배 이후 정동영 전 위원장이 국민모임 지도부 일선에서 물러났고, 정동영계 인사 일부도 진보 진영을 떠난 만큼 통합 논의가 오히려 수월해진 상황이라는 말도 나온다.

2월2일 이정희 전 대표 등 옛 통진당 주요 인사들이 헌법재판소 앞에서 재심 청구 추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유일한 원내 정당인 정의당을 중심으로 현재 보유한 진보 정치의 자산을 사수하려는 노력도 진행 중이다. 경기 고양 덕양 갑 지역구 의원인 심상정 원내대표를 포함해 지난 2012년 총선 때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현직 의원들은 수도권을 집중적으로 공략할 계획이다. 김제남 의원은 서울 은평, 박원석 의원은 경기 수원, 정진후 의원은 경기 안양 등에 출마를 결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올 상반기 안에는 당내 주요 인사들이 각자 출마할 지역구를 확정하고 본격적인 표심 다지기에 돌입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이번 재보선에서 완주한 진보 후보들의 득표율이 3~6%대로 저조했기 때문이다. 현직 의원들이 총선에 나선다 할지라도 이들의 선거 경쟁력이 충분할지는 의문이다. 과연 새정치연합과의 야권 연대 등을 바탕으로 지역구 당선자를 배출할 수 있을지, 비례대표 의원 다수를 국회에 입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정당 득표를 확보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진보 진영 전반에 암울한 기운이 떠도는 이유다.

그럴수록 통합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된다. 거대 양당 중심의 정치 구조에서 ‘제3지대’를 갈망하는 국민의 지지를 모으지 못하면 진보의 재편, 나아가 생존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지난 2011년 통합진보당 창당 과정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한 인사는 “진보 진영이 주창했던 정책 다수가 현재 정치권의 대세가 돼 있다. 시대 흐름은 확실히 진보적 가치 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왜 진보 정치세력은 국민들로부터 외면받을까.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대안 세력으로서의 믿음을 주지 못한 것이 가장 크다”며 “진보 진영 전반이 이런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만큼 총선 전 통합의 데드라인이라 할 수 있는 9~10월까지 활발한 논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옛 통진당 세력 “지역 주민 목소리 들으며 고민 중” 


진보 재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변수가 옛 통합진보당 세력이다. 이들의 활동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 이정희 전 통진당 대표 등은 헌법재판소에 통진당 해산 및 소속 국회의원 5명의 의원직 상실 결정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다. 이번 4·29 재보선에서도 대응에 나섰다. 의원직을 상실한 김미희·이상규 전 의원이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이다. 이상규 전 의원은 중도 사퇴했으나, 김미희 전 의원은 완주해 8%대 득표율을 보였다.

현재 4자 연대를 추진 중인 진보 진영에서는 표면적으로 통진당과의 공조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해산 결정으로 이미 실체를 잃은 정치세력과 어떻게 연대가 가능하겠나”라는 것이다. 대대적인 공안 정국 이후 통진당을 향한 여론의 곱지 않은 시선 역시 부담스럽다. 하지만 옛 통진당 인사들이 각 지역에서 구축해온 정치적 자산 및 조직이 상당한 만큼 “옛 통진당 세력 전체가 연대 대상이 될 수는 없겠지만, 각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연대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한다.

옛 통진당의 한 전직 당직자는 “당이 해산돼 과거 함께했던 분들이 지금 어떤 활동을 하는지 면밀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각자 지역에서 활동하는 분들의 경우 지역 주민의 목소리를 듣고 의견을 묻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또 “총선 및 대선 등 굵직한 정치 일정이 있는 만큼 어떻게 대응할지 고심 중이긴 하나, 현 정부가 유사 정당 형태의 재건 움직임까지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만큼 과거 통진당 수준의 정당 복원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진보 세력 전반이 좀 더 큰 정당의 틀을 꾸려야 한다. 그 안에서 (옛 통진당 세력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다각도로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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