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쫓겨나기야… 막가파 작전 먹힐까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5.07.15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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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축 재정 거부하며 유로존 남겠다는 그리스 배짱에 EU 파열음

 

7월5일 그리스에서 ‘국제 채권단이 6월25일 제안한 구제금융 협상안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두고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이 투표에서 그리스 국민의 61.3%가 ‘아니요’를 선택해 그리스발 유로존 위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번 국민투표는 그리스의 향후 운명을 가름할 시금석으로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더구나 투표 결과가 유로화 사용 국가들인 유로존 전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 만큼 그리스는 물론이고 유럽, 심지어 미국의 정치인과 지식인들도 목소리를 냈다.

국민투표 전 이미 디폴트 상태 빠져

구제금융 협상안을 국민투표에 부친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반대표가 많이 나올수록 그리스가 협상에서 유리해진다”며 반대 투표를 독려했다. 지난 1월 실시된 총선에서 살인적인 긴축 재정을 막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당선된 그는 “투표에서 ‘예’가 더 많이 나오면 총리직을 사퇴하겠다”며 초강수를 두었다. 또한 “반대 투표 승리가 나올 경우 이틀 안에 협상안을 마련하겠다”고 장담했다. 반대 투표를 하면 그리스인들의 요구대로 ‘긴축 없는 구제금융’이 가능하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리스가 채권단의 긴축 재정 요구를 거부하면서 공은 다시 EU로 넘어간 가운데 주요 채권국인 독일과 프랑스 간에 미묘한 입장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사진은 7월6일 메르켈 독일 총리(오른쪽)가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긴급 회동 후 프랑스 대통령궁을 나서는 모습. ⓒ AP연합

반면 채권단인 장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이번 선거는 (협상안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이 유로화에 찬성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찬성표를 던지라”고 종용했다. 즉, 긴축 재정안 거부는 곧 그렉시트(Grexit·Greece와 exit의 합성어로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의미)나 다름없다는 협박이었다. 이에 대해 야니스 바루파키스 전 그리스 재무장관은 “채권단의 행태는 테러리즘이다”라고 날 선 반응을 보였다. 그는 또한 “브뤼셀(EU)과 트로이카 채권단(EU 집행위,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은 그리스 국민을 다시 능욕하기 위해 찬성 쪽이 이기기를 바라고 있다”면서 이 투표를 그리스 국민 대 채권단 간의 파워게임으로 몰아갔다.

융커 위원장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국민투표의 실효성과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지난 6월 내내 채권단과 그리스는 줄다리기 협상을 벌여왔다. 2차 구제금융 분할금 중 남아 있는 일부를 어떤 조건으로 빌려줄지에 대한 협상이었다. 채권단은 그리스가 강력한 구조조정과 긴축 재정을 실시한다는 조건하에 자금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빌려준 돈을 갚겠다는 신뢰를 보여달라는 얘기였다.

반면 그리스는 채권단이 요구한 부가가치세 인상과 연금 개혁안 등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섰다. 협상이 한창이던 6월15일에는 바루파키스가 독일 일간지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부채를 탕감하고 상환 기한을 연장해주면 추가 구제금융은 안 받아도 된다”고 말해 타협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지난 6월28일 협상이 최종 결렬되면서 190억 유로는 없던 얘기가 되고 말았다. 그리스는 이때 이미 채권단의 구제금융 협상안 수용을 거부한 것이다. 게다가 6월30일까지 국제통화기금(IMF)에 갚아야 할 15억 유로를 상환하지 못해 사실상 채무 불이행(디폴트) 상태에 이르렀다. 일주일 뒤에 국민투표를 한들 이미 떠나간 차에 손 흔들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치프라스 총리는 7월5일 투표를 강행했다. 무슨 속셈일까.

치프라스 총리 “유로화 거부한 것 아니다”

치프라스와 바루파키스는 투표 전부터 “(EU는) 그리스를 유로존에서 쫓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채권단인 EU 집행위 역시 “유로존은 임의로 탈퇴가 불가능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애초 유로존 가입 계약에는 탈퇴와 관련한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가 원하면 나머지 유로화 사용 국가들은 함께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이들이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가 어쩔 수 없이 유로존을 탈퇴하는 제3의 길도 있다. 이른바 그랙시던트(그렉시트와 ‘사고’를 뜻하는 accident의 합성어)다. 그랙시던트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현재 그리스는 몇 달째 유럽중앙은행(ECB)으로부터 긴급 유동성 지원(ELA)을 받아 경제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 인터넷 매체인 ‘슈피겔 온라인’에 따르면, 현재 그리스는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현금의 3분의 2 이상을 ELA로 충당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는 7월30일까지 35억 유로, 8월20일까지 32억 유로를 ECB에 갚아야 한다. ECB가 IMF처럼 그리스를 기다려준다는 보장은 없다. 설령 당장 부채 상환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긴급 유동성 지원을 중단하면 그리스는 유로화 현금이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어쩔 도리 없이 그리스가 자체적으로 화폐를 찍어내기 시작하면, 이는 자연스럽게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로 이어진다.

반대 투표가 가져다준 승리감도 그랙시던트에 대한 불안감까지 몰아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다음 날인 7월6일 ECB가 “긴급원조 기금 상한선을 올려달라”는 치프라스 정부의 요청을 거절하고 심지어 “7월20일 예정대로 부채를 갚지 못할 경우 기금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해 압박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치프라스 총리는 뱃심 좋게 여유를 부리고 있지만 결국은 채권단과 합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개표 직후부터 “우리는 채권단의 협의안을 거부한 것이지 유로화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며 한층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깜짝 사퇴도 있었다. 그동안 도발적인 언행으로 협상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어온 바루파키스 재무장관이 돌연 물러난 것이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이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비난할 정도로 채권단을 괴롭혀온 바루파키스는 7월5일 밤 트위터에 “더는 장관 아님!(No Minister more!)”이라는 글을 올리고 블로그에 사퇴문을 발표했다.

7월7일 열린 유럽연합 정상회의에 참석한 메르켈 독일 총리,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맨 왼쪽) ⓒ AP연합

독일 편들던 프랑스, 입장 변화 주목

치프라스 정부의 협상 전략 변화는 신임 재무장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바루파키스의 후임으로 결정된 유클리드 차칼로토스 신임 장관은 소박한 정장 재킷에 어깨에는 면으로 된 에코백을 걸친 차림이다. 티셔츠에 가죽 재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바루파키스에 비해 수월한 협상 상대라는 인상을 준다. 게다가 차칼로토스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고 영국에서 자란 친유럽파로 알려져 있다. 협상을 매끄럽게 이끌어가겠다는 치프라스의 의지가 엿보이는 인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독일과 채권 국가들도 못 이기는 척 다시 협상 테이블에 나섰다. 개표 다음 날인 7월6일 저녁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긴급 회동한 후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하다. 그리스는 성장률을 높일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오라”며 협상 재개를 알렸다.

한편 그동안 말없이 독일의 편을 들어준 프랑스는 입장 변화를 보여 주목을 받았다. 엠마뉴엘 발스 프랑스 총리는 7월7일 협상 재개를 앞두고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도록 무엇이든 하겠다”며 “우리(프랑스)로서는 채무 탕감과 부채 구조조정도 터부(금지 사항)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채무 불이행으로 인해 그렉시트가 일어날 경우 프랑스는 680억 유로(약 850조원)의 손해를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렉시트는 다른 유로화 사용 국가도 연쇄적으로 금융 위기로 빠뜨리게 할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채무 탕감으로 당장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더 큰 혼란을 막자는 쪽으로 방향을 굳힌 것이다.

반면 대다수 유로존 국가들은 “그리스에 대한 ‘국민투표 할인혜택’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7월7일 유로그룹 회의(유로화 사용 국가 재무장관 협의체) 직후 “유럽연합 계약을 읽어봤다면 채무 탕감이 계약에 위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며 기존 입장을 고수할 방침임을 시사했다. 이미 긴축 재정을 받아들인 국가들도 날 선 반응을 보였다. 그리스 국민투표 전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는 “이탈리아인은 그리스인에게 연금을 주기 위해 자기 연금을 감축시킨 것이 아니다” “치프라스가 규칙을 어겨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 역시 스페인의 사례를 들면서 “게임의 규칙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2008년 경제 위기 당시 국가 부도 직전에 이르렀다가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해 회생한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도 투표 이후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타비 로이바스 에스토니아 총리는 트위터에서 “우리도 모두 그리스에 계속 돈을 빌려줄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자. 그러고 나서 그리스인들이 요구하는 대로 국민의 말을 따르자”는 메시지를 내보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7일 유로그룹 회의와 EU 긴급 정상회의가 열렸다. 메르켈에 이어 융커 집행위원장도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달라”며 공을 그리스 쪽으로 넘겼다. 그러나 차칼로토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빈손으로 회의장에 나타났다. 요구 사항은 많으면서 정작 완결된 문서 형태로 정리해오지 않은 것이다.

지난 6월 유로그룹 회의에서 계속 “그리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된 문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불만이 나왔음에도 전혀 개선이 없었던 것이다. 2주 안에 어떻게든 현금을 확보하지 않으면 국가 부도가 확실해지는 상황을 고려하면 놀라울 정도로 무책임한 태도다. 융커 집행위원장은 “그렉시트에 대비한 세부적인 시나리오를 이미 마련해두었다”고 밝혔다.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지만 극적인 긴장을 조성하는 화법에 대해서는 어느새 합의가 이뤄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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