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는 건 검찰·경찰의 진솔한 사과 한마디”
  • 대구=유지민 인턴기자 (.)
  • 승인 2015.08.19 15:47
  • 호수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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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여대생 성폭행 사망 사건’ 피해자 아버지의 17년 한숨

아버지는 구두를 디자인했다. 쉴 새 없이 일했다. ‘좀 놀아봤으면’ 싶었다. 밀려오는 주문에 잠과 싸워가며 일했다. 그래도 뿌듯했다. 구두 수작업에 일가견이 있었다. 아내와 함께 젊음을 믿고 열심히 일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졌다. 아버지의 솜씨도 밀물처럼 들어오는 중국산 저가 구두를 이겨낼 수 없었다.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아내는 반찬 솜씨가 좋았다. 재기해보자는 강한 의지가 모든 서민의 마음에 서려 있을 때다. 반찬 장사를 개시한 지 일주일이 된 날, 아버지의 삶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1998년 10월 대구, 한 여대생이 고속도로에서 23톤 트럭에 치여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간호학 공부를 하던 꿈 많은 큰딸 정은희양(당시 18세)이었다.

17년 전 대구에서 발생한 여대생 사망 사건의 피해자 아버지 정현조씨가 8월13일 시사저널 취재진에게 사건 자료들을 보이며 이야기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종결지었다. 정양의 아버지 정현조씨(68)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사고 현장 인근에서 딸의 속옷이 발견됐다. 가족과 지인들이 직접 찾아 경찰에 증거물로 제출했다. 속옷이 벗겨진 상태로 누워 있는 영안실의 딸도 확인한 터였다.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사망 당시 딸의 자세는 물론, 교통사고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깨끗한 혈흔에도 의구심이 들었다. 성추행 혹은 성폭행을 의심할 만한 단서들이었다. 정씨와 가족들은 사건이 단순한 교통사고로 위장된 것이 아닌지 계속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경찰은 유류품 수색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대생이 입을 만한 속옷이 아니다”며 유가족의 외침을 무시했다.

“채소나 운반하는 주제에” 모멸도

그로부터 17년 동안 정현조씨가 제출한 고소장과 탄원서는 100건이 넘었다. 정씨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현장 사진과 부검 감정서 등 관련 자료들은 확인해볼 수도 없었다. “당시 현장에 출동했을 때 찍은 컬러 사진을 보고 수사를 하자고 했더니 그때부터 사진조차도 없어졌다. 아직도 보지 못했다. ‘교통사고는 자료 보관이 7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대답만 들었다.” 정씨는 사건 발생 2년 후에도 사진 자료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때도 이미 자료는 삭제되고 없었다. 그는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며 분노했다. 검찰과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정씨에게 돌아오는 것은 ‘채소나 운반하는 주제에’ ‘상상력이 참 풍부하다’는 모멸뿐이었다.

정씨는 2002년부터 진실을 찾기 위해 홀로 뛰었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YMCA·천주교인권위원회 등을 찾기도 하고 유명한 변호사들에게 문의하기도 했다. “경찰·검찰 쪽에서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장사를 때려치우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직접 물으러 다녔다. 전국 방방곡곡을 수소문해서 변호사, 의사, 병원을 찾았다.”

2013년 마침내 정씨의 진실 찾기에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스리랑카인 K씨(48)가 피의자로 체포된 것이다. K씨는 1998년 10월17일 다른 스리랑카인 2명과 함께 정양을 성폭행하고, 정양의 책과 학생증 등을 빼앗은 혐의로 기소됐다. 정양은 범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직후 당시 대구 구마고속도로 가드레일을 넘다 23톤 트럭에 치여 숨진 것으로 추정됐다. K씨의 DNA는 2011년에 채취된 자료가 있었다. 당시 청소년에게 성매매를 권유한 혐의로 체포된 후 DNA 신원 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서 2013년, 사망한 정양의 속옷에서 발견된 정액과 K씨의 DNA가 일치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검찰이 재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K씨가 체포된 2013년 이후에도 정씨는 계속 딸의 한을 푸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경비원 일을 하면서도 늘 진실을 찾기 위해 헤맸다. 17년 전부터 주인이 없던 정양의 방은 아버지의 노력만큼 모인 서류뭉치들로 가득하다. “24시간 일하고 나면, 그다음 24시간은 쉰다. 그 쉬는 24시간 동안 나는 다시 여기에만 집중한다. 부검 의뢰서를 봐도 뭔지 모르니 병원마다 다니면서 알기 위해 노력하고, 탄원서를 쓰기 위해 컴퓨터도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정씨의 말에서 아버지의 애타는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희망도 잠시, 공소시효가 사건의 발목을 잡았다. 검찰은 K씨를 기소할 때 공소시효가 15년인 특수강도강간 혐의를 적용했다. 특수강간죄의 공소시효는 10년밖에 되지 않아 적용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1심법원에선 특수강도 혐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선고됐다. 지난 8월11일 항소심 역시 K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새로운 스리랑카인 증인 A씨를 법정에 세웠지만 강도 혐의에 대한 증거 불충분이라는 법원의 판단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씨는 경찰·검찰에 대한 분노를 털어놓았다. “사실 피의자에게 실형을 내리든 무죄를 내리든 판결엔 별 관심이 없다. 17년 전에도 말했지만, 경찰과 검찰은 처음부터 유가족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초동수사가 잘못됐다는 것이 오히려 면죄부로 작용하고 있는 꼴이다. 초기에 잘해놨으면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다. 사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온 그동안 내 인격과 인권을 묵살당했다. 딸을 죽인 범인보다 더 나쁜 사람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경찰과 검찰이다.”

정현조씨가 사건 현장인 대구 구마고속도로(현 중부내륙고속도로) 아래 굴다리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항상 나 홀로 국가와 싸운다는 생각 들어”

4남매가 3남매가 된 지도 17년째다. 공권력에 대항하는 외로운 싸움은 가족들을 지치게 했다. 정씨의 휴대전화에 있던 딸의 사진은 몇 년 전에 큰아들이 지웠다고 했다. ‘아버지 이러다간 더 힘들어지신다’며 사진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자식들이 ‘이제 그만하자. 우리도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애들 엄마는 남은 아들딸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걱정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남매지간으로서도 힘들겠지만, 나한테는 딸이다. 부모 입장에서의 마음은….” 정씨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정씨가 가족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17년 동안 자신만큼이나 아내도 애를 썼다면서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전국을 돌아다닐 때 집사람이 반찬가게를 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최근에는 집사람이 팔을 다쳐 수술을 했다. 회복 중이지만 (고생하는 걸 보면) 안쓰럽다.”

“가족이 힘들어해 그만두려는 생각 하기도”

어느새 혼기를 꽉 채운 남은 자식들에 대해서도 걱정이 앞선다. “큰아들이 벌써 마흔이다. 자식들이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할 때마다 마음이 더욱 가라앉는다. 내가 가장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데, 계속 (사건 관련 일을) 밀고 나가려니 마음이 괴롭다. 누가 (이런) 내 마음을 좀 알고 진정 어린 사과만이라도 해줬으면 정말 좋겠다.” 한숨과 함께 정씨의 말은 이어졌다. “‘하면 된다’가 우리 집 가훈이다. 죽은 은희가 이 말을 학교에서 듣고 가족들한테 해준 말이다.” 정씨가 17년간 싸울 수 있었던 것도 이 가훈에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정은희양 사망 사건은 영구미제 사건이 될 가능성이 커졌지만, 정씨가 끈질기게 요구하는 것은 따로 있다. 다름 아닌 수사 당국의 ‘진정한 사과’다.

정씨가 기억하고 있는 사과는 딱 한 번뿐이다. 2013년에 경찰서장과 형사과장, 경찰 대여섯 명으로부터 받았던 사과다. “그 외에 사과를 한 사람은 없다. 나는 이 사과 가지고는 (마음에) 안 찬다. 항소심 무죄 판결로 이 사건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초동수사가 부실했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도 수사 당국은 이에 대해 어떠한 대답도 내놓고 있지 않다. 오히려 경찰·검찰은 당시 병원 영안실 직원 등 애꿎은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변명을 할 게 아니라 진솔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정씨는 “가족이 너무나 힘들어하니까 나도 그만두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었다”고 말하면서도 억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검찰총장과 경찰청장이 언론에 나와 초동수사의 부실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사과한다면 마음이 다 풀어질 것 같다”고 했다.

검찰은 지난 13일 대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했다. 그러나 정씨는 여전히 검찰 수사에 대해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상고에 대해 어떠한 기대도 안 한다. 나의 요청이 지금까지 한 번도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 다만 재판이 엉터리로 진행되지는 않는지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1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정씨가 느꼈던 것은 외로움이다. “항상 ‘나 홀로 국가와 싸운다’는 생각이 든다. 오죽 답답했으면 검사 3000명과 나 혼자 공개된 장소에서 토론을 하자는 말까지 했을까.” 수년에 걸쳐 반전이 계속되고 있는 딸의 사망 사건에 대해 정씨는 “확실한 결과도 없고, 어떤 사과를 받지도 못했다. 딸에게 할 말도 없다”며 막막함을 토로했다. 작은 방에서 딸을 그리워하는 아버지가 취재진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전했다. “우리 딸한테 할 말이 있는기라. ‘은희야, 누가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더라. 니도 이제 용서를 받아주고, 이해하고, 좋은 데 가서 잘 살아라. 이제 가거라.’ 이런 말을 전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오랫동안 마를 시간이 없었을 아버지의 눈물이 또다시 흐르고 있다.

 

 

성폭행 입증됐으나 공소시효 지나 

지난 8월11일 대구고법 형사1부(재판장 이범균)는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기소된 스리랑카인 K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이 무죄를 선고했다. 항소심 역시 1심과 마찬가지로 특수강도·강간 혐의에서 강도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양의 속옷에서 DNA가 검출되면서 성폭행 혐의는 입증됐으나 특수강간죄 공소시효 10년이 넘어 처벌이 불가능하다. 재판부는 증인으로 나온 스리랑카인들의 진술 신빙성이 혐의를 입증할 만한 자료가 되기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2심에서 새롭게 등장한 스리랑카인 증인 A씨는 “K씨가 (정양의) 책을 빼앗고, 공범인 D씨가 학생증의 사진을 빼앗았다는 말을 들었다”며 “D씨가 사진을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증인이 16년 전에 들은 내용을 성폭행한 순서와 수법, 범인들이 소지품에 손을 댄 시점까지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억하는 점이 이해하기 어렵다”며 “D씨가 증인에게 보여줬다는 학생증 사진도 정양의 사진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했다. 또한 전문진술(傳聞陳述)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봤다. 증인들이 사건을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공범인 D씨에게서 전해들은 진술이라는 것이다.

검찰은 8월13일 대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했다. 검찰은 “법원판단을 존중하지만 결과에 승복하기 어려워 상고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항소심에서도 무죄가 내려짐에 따라 대법원에서 이번 사건을 파기환송하지 않는 이상 영구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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