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고향 별장은 버려져 있었다
  • 박혁진 기자 (phj@sisapress.com)
  • 승인 2015.08.27 10:34
  • 호수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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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부터 신 총괄회장 발길 끊어…조상 묘엔 잡초만 무성

3년.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의 고향 마을 사람들은 신 총괄회장이 자신의 고향을 찾지 않은 시점을 3년 전쯤으로 기억했다. 신 총괄회장의 고향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1922년에 태어난 신 총괄회장은 1944년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이곳에 살았다. 그가 살던 마을은 1969년 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됐다. 신 총괄회장은 댐 건설로 생긴 대암호 주변에 별장을 짓고, 생가를 복원했다. 그는 수몰되기 전까지 마을에 살았다가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을 불러모아 1년에 한 번 별장과 인근 공원에서 잔치를 열었다. 신 총괄회장은 잔치 때 말고도 한국에 올 때면 가끔 이곳에 들러 대암호에 배를 띄워놓고 휴가를 즐기곤 했다. 한때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영자 롯데장학복지재단 이사장 등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둔기마을의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의 별장 입구. ⓒ 시사저널 박은숙

신 총괄회장이 주최한 마을잔치는 매해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열렸다. 소를 한 마리 잡고, 노래방 기계도 설치해서 하루만큼은 마음껏 놀았다고 한다. 롯데 측에서 음료수 자동판매기를 설치해 참석자는 누구든 무료로 마셨다.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선물과 현금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한바탕 잔치가 끝나면 롯데 측은 여기에 관련된 소식을 담아 언론에 자료를 배포했다. ‘신격호 회장의 고향 사랑’. 기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고향에 대한 신 총괄회장의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제목을 달았다. 사람들이 이 기사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대부분 비슷했을 것이다. ‘일본에서 성공한 신격호 회장이 자신의 고향에 대한 애틋함은 간직하고 있구나.’

이번 두 아들 간 경영권 분쟁으로 과연 롯데가 어느 나라 기업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지만, 이 별장과 마을잔치는 ‘자연인 신격호’가 한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임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됐다. 뿐만 아니라 신 총괄회장은 한때 신동주 전 부회장, 신동빈 회장, 신영자 이사장 및 그 자녀들과 이곳에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등 이 별장과 마을을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신 총괄회장이 별장을 찾지 않은 것은 3년 전쯤부터다. 2~3년이 됐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3~4년이 됐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3년 전쯤부터 발길이 끊겼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때부터 별장도 방치됐다고 했다. 신 총괄회장이 주관해서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열린다는 마을잔치 역시 2년 전까지 열렸지만 신 총괄회장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그보다 오래됐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설명이다. 신 총괄회장이 불참하면서 예전과 같은 생동감은 사라졌다고 한다. 인근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신 총괄회장이 직접 잔치에 참가할 때만 해도 별장 진입도로가 주차장으로 변할 정도로 차량 행렬이 끝이 없었는데, 가장 최근에 열린 잔치는 그 규모가 확 줄었다는 것.

1998년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이 고향인 울산 둔기리에서 가족들과 찍은 사진. 왼쪽부터 시게미쓰 하쓰코, 신 총괄회장과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아들 정훈, 맏딸 신영자 롯데장학 복지재단 이사장,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 큰며느리 조은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장녀 규미, 둘째 며느리 시게미쓰 마나미, 신회장 아들 유열과 차녀 승은. ⓒ 뉴시스

3년 전부터 고향 발길 끊어져

최근 반년 동안 롯데그룹은 두 아들 간 경영권 분쟁으로 큰 홍역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창업주인 신 총괄회장은 과거의 카리스마를 잃어버린 채 두 아들에게 휘둘렸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과연 고향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8월21일 기자가 찾은 신 총괄회장의 별장은 방치됐다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을씨년스러웠다. 별장 정문에 붙어 있는 ‘개조심’이라는 푯말이 그런 느낌을 배가시켰다. KTX 울산역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위치한 둔기리는 마을이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몇 가구 살지 않는 시골이었다. 총 15가구 정도의 집과 신 총괄회장의 별장 및 생가, 둔기리 마을회관 등이 전부였다.

신 총괄회장의 별장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왕복 2차로 도로변에 위치해 있었다. 별장 주변은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한쪽은 대암호와 인접했다. 굳게 닫힌 철문과 담장 탓에 외부인의 출입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빽빽한 나무로 인해 안을 들여다보기조차 어려웠다. 별장 내부가 보이지 않기는 호수 반대편에서 망원렌즈로 봐도 마찬가지였다. 정문 옆에 관리동으로 추정되는 건물만 시야에 들어왔다. 관리동 쪽에서 인기척이 있었지만 사람이 외부로 나오지는 않았다.

별장 건너편에는 롯데에서 지은 1층짜리 둔기리 마을회관과 신 총괄회장의 생가 그리고 신 총괄회장 조상들의 묘와 사당 등이 있었다. 관리가 안 되기는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생가와 마을회관, 사당의 문은 모두 자물쇠로 잠겨 있었는데, 언제 자물쇠를 열었는지 추정하기 힘들 정도로 녹이 슬어 있었다. 신 총괄회장 조상 묘소는 잡초와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신 총괄회장이 이곳에 오지 않은 이후로 아들들은 물론이고 롯데 측에서도 이곳에 어떠한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은 아버지가 참석하지 않았던 2년 전 마을잔치에 참석한 것이 마지막이었고, 신 회장은 그 1년 전까지만 잔치에 참석했다. 별장 맞은편에 살고 있는 한 70대 남성은 “신 총괄회장이 오지 않은 이후로 두 아들이나 롯데 측에서도 오지 않았다”며 “마을잔치도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과거 신 총괄회장의 지인은 기자에게 신 총괄회장이 한국에 오면 가끔 별장에 내려가 대암호에서 배를 타기도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남성에게 관련 사실을 물었더니 “배가 4척 있었는데, 그것도 3년 전에 모두 없앤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둔기리 인근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신 총괄회장이 별장에 내려오지 않기 시작했던 3년 전부터 건강 이상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나마 가끔씩 와서 배를 타고 가던 신 총괄회장이 오지 않았고, 그가 좋아하던 배도 처분한 것이 건강 악화 때문이라는 얘기가 오래전에 나왔다는 것. 그래서인지 마을 사람들은 신 총괄회장의 별장이 방치된 것과 그의 건강이 나빠진 것을 동일시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 복원된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의 생가. ⓒ 시사저널 박은숙

아버지 건강 악화되자 아들들 발길 끊어

신격호 총괄회장이 그렇게 자기 고향에 애착을 가진 것으로 외부에 알려졌지만 정작 마을 사람들은 신 총괄회장과 롯데 측에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별장 인근에서 조그마한 마트를 운영하는 한 70대 후반의 할머니는 “이곳에서 수십 년 살면서 과자 봉지 하나 얻어먹은 것이 없다”며 “인근에 살고 있지만 과거 마을 주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을잔치에는 초대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이 많이 참석한 이유는 참석자들에게 선물과 함께 흰 봉투에 30만원씩 넣어줬기 때문”이라며 “그마저도 수몰 당시 마을에 살던 사람들에게만 주고, 현재 마을 사람들은 주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마을 주민 역시 “이름만 마을회관이지 지금도 땅이 롯데 소유로 되어 있고, 롯데 행사 아니면 사용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신 총괄회장과 롯데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어도, 둔기리 인근에 사는 주민들은 최근 불거진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은 관심 있게 지켜보는 분위기다. 80대 전후의 노인들이 뉴스에서 나오는 롯데 관련 소식을 대부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신격호 회장이 불쌍하다’ ‘아들들이 건강이 안 좋은 아버지를 자기 맘대로 한다’는 식으로 이번 사태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가 애착을 가졌던 이 별장에 자식들이 발길을 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앞서 만났던 70대 남성은 “지금 두 아들이 서로 아버지의 뜻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건강이 나빠진 이후에도 두 사람 중 한 사람만이라도 꾸준히 내려와서 별장에 머무르다 가거나 신경을 썼으면 사람들이 누가 더 아버지를 생각했는지 대번에 알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가 오지 않으니 자식들도 안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식들만 아니라 (신 총괄회장의) 동생들까지 누구 하나 (별장을) 돌보는 사람이 없다”며 아쉬워했다. 한때 세계 갑부 순위 9위까지 올랐던 재계 거물이 아끼던 고향 마을의 별장은 그의 노년만큼이나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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