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폭풍 새정치연합 덮치다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5.08.27 11:01
  • 호수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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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이어 수사·재판 받는 현역 의원 10여 명

“황교안이가 국무총리로 지명됐을 때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실제 현실로 닥치니 참 막막하네. 검찰이야 정치바람을 워낙 많이 타는 집단이니 그렇다 치고, 사법부까지 이렇게 나가다니. 더 큰 문제는, 앞으로도 줄줄이 남아 있는데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거죠.”

 한명숙 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8월20일 대법원에서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이 확정되면서 의원직을 잃은 직후 한 새정치연합 중진 의원을 만났다. 한 전 의원과 막역한 사이인 그는 “그런 뒷돈이나 받을 사람이 아니란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며 한참 동안 검찰과 법원을 성토했다. 대화 끝자락에 “박정희한테 고문당하고 옥살이한 것도 억울한데 그 딸한테 또 구속이 되다니”라며 말을 잇지 못하던 그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확정받은 한명숙 전 총리(오른쪽)가 8월20일 국회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후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한명숙 판결 등 악재에 새정치연합 뒤숭숭

새정치연합 내부가 서초동발(發) 악재로 뒤숭숭하다. 최근 간판급 중진 의원들이 잇따라 검찰의 수사선상에 오른 데 이어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당 대표까지 지낸 한 전 의원이 결국 유죄 확정 판결로 의원직을 잃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공안검사 출신인 황교안 국무총리 체제가 들어설 당시 우려했던 ‘공안정국’이 현실화하는 징후가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새정치연합은 한 전 의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갖는 정치적 상징성에 주목하고 있다. 현재 검찰 수사를 받거나 재판이 진행 중인 현역 의원만 10여 명에 달하는 상황에서, 대법원이 뇌물 공여자의 법정 진술보다 검찰 조사 당시의 진술에 더 무게를 뒀기 때문이다. 율사 출신 한 의원은 “이번 판결은 어렵게 제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공판중심주의 원칙’을 무너뜨렸다”며 “앞으로 재판 과정에서 ‘정치검찰’의 짜맞추기식 수사 결과가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 야당 의원들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실제 새정치연합에선 내년 총선을 목전에 두고 소속 의원들이 무더기로 검찰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어 그 자체로 시름이 깊다. 호남의 맹주를 자처하는 박지원 의원은 저축은행 금품 수수 등의 혐의로 지난 7월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 안팎에선 박 의원이 1심에선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던 터라 6월에 황 총리가 취임한 후 서초동 분위기가 바뀐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19대 국회 상반기 환경노동위원장을 지낸 신계륜 의원(4선)과 수도권 중진 신학용 의원(3선), 또 다른 중진 김재윤 의원(3선) 등 세 사람은 서울예술종합학교 교명 변경을 위한 입법 로비에 연루돼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 중 김 의원은 항소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분양대행업자로부터 3억원대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8월18일 구속된 박기춘 의원 역시 탈당하긴 했지만 사무총장과 원내대표를 지낸 3선 중진이다.

새정치연합이 특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대목은 문희상·김한길·권은희 의원 건이다. 검찰은 최근 문 의원이 2004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처남의 취업을 청탁한 혐의와 관련해 소환 방침을 밝혔고, 그에 앞서 부인 김 아무개씨도 조사하기로 했다. 김 의원은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안규백 전략홍보본부장은 “당 대표까지 지낸 중진 의원들에 대해 명확한 물증도 없는 상태에서 망신 주기 수사를 하는 것”이라며 “결국 야당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 위한 총선용 기획수사”라고 비판했다.

검찰이 최근 권 의원을 위증 혐의로 기소한 것을 두고는 서초동에서조차 다소 황당하다는 평이 나온다. 권 의원을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의 증인으로 채택했던 검찰이 뒤늦게 권 의원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고 나선 자기모순적인 행태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댓글 사건과 관련해 재판이 진행 중인 이종걸 원내대표와 강기정 의원 등 야당 강경파들이 좀 움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의 권 의원 기소가 야당을 향해 보낸 경고 메시지라는 얘기다.

대응책 부재에 “총선도 제대로 못 치를라”

당연히 새정치연합에선 검찰과 법원에 대한 성토가 터져 나오고 박근혜 정부의 ‘공안몰이’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올 초 당내 ‘야당탄압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가 원내 수장이 된 후에도 이를 유지하고 있는 이종걸 원내대표는 공식 회의석상에서 “야당탄압대책위를 확대해 ‘신공안탄압저지대책위원회’ 차원에서 총력 대응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답답해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박지원·박기춘·김한길 의원의 경우처럼 검찰 수사의 초점이 부정부패 의혹에 맞춰진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적지 않고, 문희상 의원의 경우 최근 딸 입사청탁 의혹이 불거져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윤후덕 의원과 마찬가지로 ‘의원 갑질’로 치부될 공산이 크다. 자칫 잘못했다간 역풍을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한명숙 전 의원 판결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는 높은 수위의 비판을 쏟아내고 있지만, 대법원 확정 판결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쳐지는 데 대한 부담이 적지 않다. 게다가 5년을 끌어온 재판이라 그 자체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상당한 만큼 이를 전면적으로 이슈화하기도 쉽지 않다. 권은희 의원 기소 건도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 1,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상황이라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여론이 엄존한다.

한마디로 새정치연합 입장에서 보면 “정말로 억울해 죽겠는데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는”(수도권 재선 의원) 형국이다. 박근혜 정부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의도적으로 공안 정국을 조성해 야당을 탄압하고 있다는 주장은 할 수 있지만, 이를 통해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함으로써 전체 판을 뒤집을 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검찰 수사만 해도 권력 핵심부와 가까운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기춘·허태열 전 비서실장,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 유정복 인천시장, 서병수 부산시장 등 친박계 실세들에겐 면죄부를 줬다. 야당 입장에선 ‘유권무죄 무권유죄’라는 한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마땅히 쓸 만한 ‘카드’가 없다. 율사 출신 한 핵심 당직자는 “검찰 수사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검찰 소환 불응 정도 외엔 마땅한 대응 방법이 안 보인다”며 “어쨌든 비리 관련 건이 한두 건이라도 있는 상황에서 장외투쟁을 포함한 집단행동을 할 수도 없는 일 아니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가운데 당내에선 벌써부터 총선 결과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한 수도권 중진 의원은 “야당 의원들이 검찰청사 포토라인 앞에 서는 모습 자체가 총선 국면에선 마이너스 요인일 수밖에 없다”면서 “계속 이렇게 무기력하게 대응했다가는 야당이 초토화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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