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궁 ‘도발-협상-도발’은 반복된다
  • 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5.09.0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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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5 남북 합의’ 해빙 모드 ‘한순간’ 가능성···역대 정권 남북 관계 굴곡사가 증명

북한의 ‘지뢰 도발’로 촉발됐던 한반도 긴장 사태는 사건 발생 20일 만에 ‘남북 고위 당국자 접촉 공동보도문’에 합의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얼핏 해피엔딩으로 보인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새로운 남북 관계를 위한 물꼬가 트였다”라는 평가도 그런 연장선에서 나왔다. 여론도 우호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 있는 대응이 모처럼 점수를 받고 있다. 오히려 절대 지지층인 보수층에서 불만의 기색이 엿보인다. 북한에 좀 더 강경하게 나갔어야 했다는 이유에서다.

‘8·25 남북 합의’에 따라 앞으로 당국 회담을 위한 양측 간 접촉은 물론, 이산가족 상봉과 경제 협력, 문화 교류 확대 등을 위한 협의도 이뤄진다. 남북정상회담 성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쯤 되면 청와대 관계자의 언급처럼 새로운 남북 관계가 도래하는 듯한 착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해빙 분위기는 ‘한순간’일 가능성도 크다. 이는 역대 정권에서 반복되어온 남북 관계 역사가 증명한다. 이 패턴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을 합의한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가 발표된 이래 단 한 차례도 예외 없이 반복된 역사적 사실이다. 적화통일이라는 북한 노동당 강령이 굳건하고, 남북 교류가 본격화되면 체제 유지가 어렵다는 위기의식이 짙은 북한으로선 불가피한 전략·전술의 결과다. ‘도발-협상(실리 획득)-도발’ 사이클은 정확히 되풀이됐다.

북한은 도발과 협상을 반복하며 핵과 미사일 개발을 위한 시간벌기에 성공했다. 한·미 양국을 기만하면서 이른바 ‘강성대국’으로의 발판을 만든 것이다. 사진은 북한 핵의 본산인 영변 원자력연구소.© AP 연합·연합뉴스

노태우 정부 화해 무드 직후 ‘북핵 위기’ 닥쳐

“있는 그대로 말해보라우. 왜 이 모양이 됐는지를….” 북한 김일성 주석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당·정 간부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북한 철 생산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북한 공업의 상징 김책제철소가 철 생산을 중단해야 할 지경에 이른 1990년대 초의 비화다. 김일성의 추궁에 공업상(장관)은 석탄과 기름이 없어 전기 생산이 안 되고, 전기가 부족해 석탄 채굴이 안 되고, 수송도 여의찮고, 외화가 없어 기름을 제때 사오지 못한다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답변했다. 악순환의 결과라는 것이다.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1991년 소련마저 붕괴에 이를 즈음의 북한 산업은 최악이었다.

당시 한국은 노태우 정부 시절이었다. 북방 외교에 관한 한 상당한 평가를 받은 정권이다. 중국·러시아 등 공산권 대국과의 수교도 이때 이뤄졌다. 노태우 정부는 공산권 종주국들과의 관계 정상화 등 탄탄한 외교력을 바탕으로 상호 체제 인정과 불가침 약속 등을 내용으로 한 남북기본합의서 발표를 이끌어냈다. 그에 앞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이뤄졌고, 합의서 추진 때는 김달현 북한 정무원 총리가 김일성 주석의 구두친서를 들고 청와대를 방문하는 등 남북 화해 무드는 절정에 달했다. 주한미군이 보유한 핵 지뢰 등 전술핵 철수도 이어졌다.

그러나 이도 잠시였다. 기본합의서에 의거해 진행된 고위급 회담은 합의서 이행을 위한 3개 항의 부속합의서(1992년 9월, 8차 회담)까지 도출해냈으나, 다음 해 출범한 김영삼(YS) 정부 들어서는 ‘제2차 한국전쟁’설이 공공연히 나올 정도로 위기 상황이 연출됐다.

기본합의서 발표 이후 북한은 극도의 체제 붕괴 위험에 시달렸다. 김일성 주석 아래서 전권을 쥔 아들 김정일은 남북 교류 지속이 자멸이라는 인식하에 기본합의서와는 정반대의 노선을 추구했다. 핵무기 개발만이 살길이라는 강경으로 선회한 것이다. 김달현 총리 등 실용파는 숙청됐다. 당시 북한의 핵 개발은 우라늄 정련 과정에서 나오는 옐로케이크 보유 수준 정도라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1990년에 이미 북한 최초 원자로가 위치한 영변과 영변 북방 20㎞ 지점의 태천에서 핵무기 제조를 위한 플루토늄 추출이 본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한국과 미국을 완전히 기만한 것이다.

1994년 미국은 북한의 핵 개발을 좌시할 수 없다며, 영변 핵시설에 대한 공중 정밀 폭격을 추진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반대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제1차 북핵 위기’를 넘겼다. 사진은 동해상에서 연합기동훈련 중인 미군 핵항공모함 존 스테니스 호(9만6000톤)와 한국 해군 이지스함 세종대왕함(7600톤) 등.© 연합뉴스

미국 ‘영변 폭격’ 계획 직후 남북정상회담 합의

북한은 플루토늄 생산량이 신고 내역과 다르고 핵폐기물처리장이 의심스럽다며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1993년 3월 핵비확산조약(NPT) 탈퇴를 선언한다. 이른바 ‘제1차 북핵 위기’다. 북한은 이후 미국과의 네 차례에 걸친 고위급 회담을 거쳐 NPT 탈퇴 선언 발효 하루 전인 그해 6월10일 탈퇴를 유보한다고 발표하긴 했으나, 공언한 핵 개발 포기 약속은 걷어찼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확인한 미국 클린턴 정부는 북핵 제거를 위한 군사작전 수립에 착수했다. 1994년 2월엔 클린턴 정부의 영변 핵시설 정밀 폭격 추진설이 언론에 등장했다.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에만 주목했던 한국의 YS 정부는 미국의 이런 움직임을 그저 북한에 대한 으름장 정도로 여겼다. 국방 관계자들은 미국의 ‘비상계획’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하지만 미국 지도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북한을 방치하면 그해 중반까지 5개의 핵무기 제조가 가능한 플루토늄이 생산되고, 불과 수년 내에 60개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핵물질을 보유하게 된다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 제재를 당연시했다. 이란·이라크 등 제3세계로의 핵확산을 부추겨 핵통제 불능 사태를 초래한다는 게 강공 논리였다. 5만명의 미군 희생자와 100만 시민 살상 등의 시뮬레이션도 미래의 더 큰 위험을 따지는 미국에는 안이한 주장에 지나지 않았다. 영변 원자로에 대한 초정밀 공중 폭격이 최종 대안으로 채택됐다. 하와이와 오키나와 주둔 핵항공모함과 전폭기의 일본 기지 주변으로의 전진 배치, 1개 군단급 육군과 해병대의 수송 계획 등과 함께 주한미군 가족들의 일본 이주 플랜이 구체화됐다.

미국은 북한의 전면 공격을 우려하는 YS 정부에 초정밀 공습과 동시에 북한의 전방 포대는 물론 화생방무기를 사용할 경우 북한 최고 지도부와 군사시설을 초토화시킬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북한의 1만3000문의 대포가 개전 1시간 만에 40만 발의 포탄을 투하한다면 100만명이 희생될 것이라는 시뮬레이션을 접한 한국 정부를 주저앉히지는 못했다. YS는 후일 주한 미국대사와 미군사령관에게 “단 한 명의 한국군도 작전에 동원하지 않겠다”고 했다면서 이런 자신의 강경한 반대가 제2의 한국전쟁을 막았노라고 자평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반대의 평가도 나오고 있다. ‘제1차 북핵 위기’ 당시 한국 정부와 지도자들의 시각은 당장의 민간인과 산업시설 피해 및 경제 후퇴에 대한 우려가 모든 것에 우선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벼랑 끝으로 몰아가면 한국은 굴복하게 마련이라는 확신을 북한에 심어줬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분단 한반도 상황을 추슬러야 하는 이후 한국 정부에 두고두고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으며, 반면 북한은 전가의 보도로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1991년 12월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합의문을 타결한 정원식 총리(오른쪽)와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가 악수를 교환하고 있다. © 연합뉴스

‘햇볕정책’ DJ 정부에서 연평해전 도발

미국의 영변 폭격 계획은 취소됐다. 한국 대통령의 반대가 주효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폭격 취소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쐐기를 박은 것은 확실하다. 폭격 계획에 따른 병력 이동이 이뤄지던 1994년 6월, 평양으로 날아간 카터는 김일성과 회동해 핵동결 약속을 받아냈다. 거기서 김 주석은 YS와의 남북정상회담 주선을 요청했고 상황은 급반전됐다. 청와대는 6월18일 북한의 남북정상회담 제의를 무조건 수락했고, 7월2일에는 ‘7·25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실무 절차가 마무리되는 등 화해 분위기가 한반도를 뒤덮었다.

하지만 잠시였다. 한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준비하던 김 주석이 급사했다.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된 것은 물론 전군 비상경계령과 김일성 조문 거부 공식화로 남북 관계는 꽁꽁 얼어붙었다. 2년 후인 1996년 6월, 한국 정부가 북한에 쌀 15만톤을 지원하면서 누그러지는 듯싶던 남북 관계는 3개월 후에 발생한 강릉 무장공비 잠수함 침투 사건으로 다시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어진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남한 망명(1997년 2월)과 서울에 거주하던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씨 살해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북 관계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YS는 10년 내에, 아니 그보다 더 빠를 수도 있는 시기에 통일이 이뤄질 수 있다는 낙관론을 거듭 천명했다. 이런 전망의 기저에는 북한의 경제 파탄이 자리한다. 1995년부터 5년 동안, 이른바 ‘고난의 행군’ 기간에 아사(餓死)한 북한 동포는 33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1차 북핵 위기 당시 연출된 아이러니는 당초 클린턴은 대북 포용 정책을, YS는 “핵을 가진 집단과는 대화할 수 없다”는 대북 강경론을 내세웠는데, 실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는 정반대 입장에 섰다는 점이다. 원만했던 클린턴과 YS 관계는 북핵 문제로 틀어졌고, 지도자 간의 불편한 관계는 YS 임기 말에 닥친 외환위기(IMF 사태) 때 미국의 신속한 도움을 받는 데도 장애가 됐다.

김대중(DJ) 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 관계는 해빙의 급물살을 탔다. 대북 포용 정책인 이른바 ‘햇볕정책’을 표방한 DJ 정부 등장은 김정일 정권에는 구세주였다. 미국의 철저한 보복 조치로 고립무원 상태에 빠진 북한으로선 당연했다. DJ 임기 첫해인 1998년 6월 금강산 관광이 합의되고, 사업자로 선정된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소떼를 몰고 북한으로 들어갔다. 햇볕정책은 금강산 관광 협상이 한창 진행되던 6월 한국 해역에서 작전 중이던 북한 잠수정이 어부의 그물에 걸려 나오고, 강화도(11월)와 여수(12월)에 간첩선이 출몰했어도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잠수정은 잠수정, 햇볕은 햇볕”이라고 했다.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선 어떤 희생도, 양보도 마다않겠다는 것이다.

이듬해 6월 북한 경비정이 연평해역을 침범해 양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군 유공자 7명을 특진시키는 것으로 어물쩍 넘겼다. 이 같은 DJ의 햇볕정책은 2000년 6월15일 남북정상회담으로 결실을 맺는다. DJ의 평양 방문과 역사적 정상회담으로 남북 관계는 순항하는 듯했지만, 그러나 역시 얼마 못 가 분위기가 돌변했다. 한국에서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2002년 6월, 북한은 제2차 연평해전을 도발했다. 한국 해군 참수리호를 격침시키고 국군 6명을 전사시켰다.

측 간 갈등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의혹이 불거진 2002년 10월의 ‘제2차 북핵 위기’로 표출된다. 북한은 1995년 클린턴 정부와의 담판으로 경수로 건설 지원 등을 약속받았으나 뒷전에서는 핵과 미사일 개발(1998년 8월31일 대포동 미사일 발사)을 꾸준히 추진해왔고, 그 결과는 위기였다. 북한은 약속 파기를 이유로 중유 공급을 중단하자 핵시설 재가동과 NPT 탈퇴를 선언(2003년 1월10일)했다. 이후 북한은 북핵 문제 논의를 위한 남북한과 미·일·중·소 6개국이 참여하는 6자회담 무기한 중단과 핵무기 보유 선언(2005년 2월)을 한 후 이른바 ‘주체의 길’을 걷고 있다. 2006년 핵실험 성공을 비롯해 2009년과 2013년의 핵실험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북한과 대화가 통할 것 같던 노무현 정부였고, 실제 노 대통령은 DJ에 이어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두 번째로 평양을 방문해 남북정상회담을 가졌지만, 그게 전부다. 2007년 10월 ‘군사적 적대 관계를 종식시키고 긴장 완화와 평화 보장을 위해 긴밀히 협력한다’는 합의문은 말에 그쳤다. 2006년 핵 개발에 성공한 북한은 기고만장했고, 그런 북한을 6자회담 울타리에서 ‘관리’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2007년 영변 핵시설 가동 중단과 봉인 등을 내용으로 한 ‘2·13 합의’가 성립되고 북한에 대한 중유 공급이 시작되면서 일시 해빙이 이뤄진 적도 있기는 하다. 6월27일 세계 각국 언론인과 외교관 등이 참관한 가운데 벌인 영변 원자로 냉각탑 폭파 행사는 해빙의 하이라이트였다. 하지만 불과 2개월 후 북한은 테러지원국 해제 지연 등을 이유로 영변 핵시설 불능화 중단과 원상복구를 선언했다.

북, ‘핵보유국’ 행세하겠다는 자신감 바탕

노무현 정부의 뒤를 이은 이명박(MB) 정부는 남북 관계 개선에 관한 한 달리 어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MB 취임 첫해인 2008년 7월 발생한 북한군의 금강산 관광객 총격 피살 사건 때문이다. 치마를 입고 산책하는 여성을 향한 조준사격이 이뤄지면서 남북 관계는 그야말로 얼어붙었다. 사과는커녕 핵무기 개발로 체제 유지에 자신감을 얻은 북한은 아쉬울 게 없는 양 버텼다. 연이은 핵과 미사일 발사 시험 등 한국을 겁주는 데 치중했다. 2009년 4월, 6자회담 불참을 선언하면서 영변 핵시설 폐연료봉 재처리 작업을 공표한 북한은 5월25일 핵실험으로 긴장수위를 높였다. DJ 조문을 계기로 뭔가 반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끝내 반전은 없었다. 북한은 자체 우라늄 농축 성공 발표(9월)로 오히려 찬물을 끼얹었다. 11월10일의 대청도 교전과 다음 해인 2010년 3월26일의 천안함 폭파, 11월23일의 연평도 포격 사건 등이 이어졌다.

북한의 ‘도발-협상(실리 획득)-도발’ 공식의 기본은 여전하다. 서방 각국이 부인하든 무시하든 상관없이, ‘핵보유국’으로서 행세하겠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많은 한국인은 스스로를 ‘잘사는 형’으로 자임하며 어려운 ‘동생’을 다독여야 한다고 말한다. 대범하게 어루만지며 통 큰 양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시간은 우리 편’이기 때문에 걱정할 게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북한 지도부는 시간이 자기들 편이라고 확신한다. 지정학적으로 절대 유리하다는 것이다. 언제 닥칠지 모를 ‘단 한 번’으로 한반도의 주인이 된다는 식이다.

‘8·25 합의’로 모처럼 조성된 남북 화해 무드가 계속될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은 역대 정부에서 나타난 남북 관계의 굴곡에서 증명된다. 북한이 ‘머지않아’ 대화 무드를 깨고 다시 긴장 국면을 조성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북 관계는 항상 예측을 불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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