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기성용 클래스가 다르다
  • 서호정│축구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9.16 20:18
  • 호수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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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2차 예선에서 돋보인 기성용의 존재감

슈틸리케호가 22년간 끊어내지 못한 레바논 원정 잔혹사에 종지부를 찍은 그날, 가장 빛난 것은 주장 기성용이었다. 축구 국가대표팀은 9월8일 열린 레바논과의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G조 3차전에서 3-0의 완승을 거뒀다. 1993년 하석주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둔 이후 한국은 레바논 땅에서 승리한 적이 없었다. 2011년에는 1-2로 패하면서 조광래 당시 대표팀 감독이 경질되는 일도 벌어졌다. 레바논 원정을 앞두고 라오스를 8-0으로 대파한 후 슈틸리케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대표팀은 이전과 다르다. 우리는 역사를 바꿀 것이다.” 그리고 호언장담은 현실이 됐다.

부진의 역사를 끊고 과거와 다른 결과를 만든 결정적 차이는 한 선수 때문이다. 기성용이다. 지난 1월 아시안컵부터 대표팀의 주장이 된 기성용은 이날도 수준이 다른 경기력과 강한 책임감으로 팀을 이끌었다. 기성용의 예리한 패스에 레바논 수비는 연거푸 무너졌다. 선제골이 된 페널티킥 유도 장면, 권창훈의 세 번째 골 장면에서 모두 기성용의 패스가 빛났다. 기성용을 수비형 미드필더가 아닌 공격형 미드필더로 전진 배치한 슈틸리케 감독의 과감한 전략은 대성공을 거뒀다.

현재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스완지시티에서 주전으로 활약 중인 기성용은 박지성의 은퇴 이후 한국 축구가 찾던 월드클래스에 가장 근접한 선수다. 대표팀에서의 영향력과 리더십도 박지성에 버금간다. 불과 2년 전 기성용은 한국 축구사에 유례없는 논란을 낳으며 축구 인생 최대 위기에 몰린 선수였다.

2013년 6월은 기성용 인생에서 최고와 최악의 순간이 겹친 때다. 배우 한혜진과의 결혼에 성공하며 가정을 꾸렸지만 결혼식을 올린 지 일주일 만에 논란의 중심에 섰다.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계정에서 당시 최강희 대표팀 감독에 대해 강도 높은 비난을 뒷담화로 한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해당 계정은 극소수의 지인들하고만 공유했던 사실상의 비공개 계정이었지만, 해당 내용이 공개되면서 기성용은 코너에 몰렸다. 그 이전에도 공개된 계정을 통해 주체가 없는 대상에 대해 불만 섞인 글을 올리며 이목을 끌었던 기성용의 행동이 결국 최강희 감독을 향했던 것임이 밝혀진 것이다.

기성용을 바꾼 두 가지, 결혼과 주장 완장

브라질월드컵 최종예선까지 한시적으로 대표팀을 맡은 최강희 감독의 리더십 부재와 레임덕에 대한 지적도 있었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질타가 기성용을 향했다. 국민들은 대표팀에 대한 그의 마음가짐을 의심했다. 무엇보다 사제 관계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한국 사회에서 볼 때 그의 항명은 도덕적 재판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기성용은 해당 계정이 자신의 것임을 인정했고 공식적인 사과를 해야 했다. 대한축구협회는 징계 없이 엄중경고 처벌을 내렸지만, 최강희 감독에 이어 대표팀을 맡은 홍명보 감독은 기성용 발탁을 당분간 배제한다고 선언했다. 홍명보 감독은 2개월 후 영국으로 건너가 기성용과 직접 면담을 갖고 나서 10월 브라질과의 평가전을 앞두고 그를 다시 선발했다. 기성용은 소집에 앞서 미디어 앞에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기성용은 그 사건을 기점으로 자신의 SNS 계정을 모두 삭제했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가진 평가전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왼손으로 해 잠시 논란이 됐지만 “부상으로 인해 너무 긴장하다 보니 벌어진 실수”라며 즉각 사과하는 모습도 보였다. SNS 파문으로 한국 축구를 끌고 갈 선수에서 경솔한 문제아로 이미지가 추락한 기성용은 그라운드 위에서의 플레이로 대표팀에 대한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실패로 끝난 브라질월드컵이었지만 유일하게 제 몫을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속팀인 스완지시티와 선덜랜드(임대)에서도 연일 활약을 하며 은퇴를 앞두고 있던 박지성의 뒤를 이을 가장 확실한 재목으로 올라섰다. 홍명보 감독이 월드컵 실패 후 물러난 후 대표팀을 이끌게 된 슈틸리케 감독도 기성용을 주목했다. 세계 최정상 리그에서 주전으로 꾸준한 활약을 펼친 기성용은 한국 축구의 새 아이콘이자 대표팀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자료: 골닷컴 참고 ⓒ 연합뉴스

슈틸리케호의 클래스 바꾸는 유일한 존재

기성용의 기량은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축구인인 아버지 기영옥 현 광주 FC 단장의 조기 교육을 받은 기성용은 초등학교 시절 차범근축구상을 받은 전국구 유망주였다. 당시 고교 축구계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기영옥 단장은 중학생 기성용을 호주로 유학 보냈다. 당시 브라질과 유럽으로 유학을 보내는 경우는 많았지만 호주 유학은 생소한 사례였다. 기영옥 단장은 “선수로 잘 성장하면 좋겠지만 그게 안될 경우 영어라도 잘해 밥벌이라도 하라는 차원에서 보냈다”고 말했다. 선수 시절 유망한 수비수로 각광을 받았지만 대성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아픔이 반영된 선택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호주 유학이 기성용의 성장을 도왔다. 이미 기본기는 잡힌 상황이었고, 좋은 잔디 위에서 규칙적인 운동량을 소화하며 꾸준한 기량 발전이 이뤄졌다. 당시 배운 영어는 후일 유럽에 진출하는 데 큰 무기가 됐다.

호주 유학 시절 처음 U-17 대표팀에 선발된 기성용은 185㎝를 넘는 큰 키(현재 프로필상 187㎝, 실제 189㎝)에 뛰어난 킥력과 넓은 시야를 지녀 각급 대표팀에 꾸준히 뽑혔다. 기성용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2007년부터다. 2006년 한국으로 돌아와 금호고를 졸업하고 FC 서울에 입단한 기성용은 터키 출신의 명장 세놀 귀네슈 감독의 신뢰 속에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동갑내기인 이청용과 함께 ‘쌍용’으로 불리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캐나다에서 열린 U-20월드컵에 출전해 브라질 등을 상대로 선전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후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했고, 19세이던 2008년 9월 요르단과의 평가전에 출전하며 A매치 데뷔를 했다. 10대 시절에 이미 기량을 인정받았고 불과 21세에 남아공월드컵에 나서 16강 진출에 크게 기여했다.

탄탄대로 같았던 기성용의 앞날에도 우려는 있었다. 신중하고 조용한 성격의 이청용과 달리 기성용은 늘 튀는 편이었다. 2011년 아시안컵에서 일본을 상대로 골을 넣고 원숭이 세리머니를 해 양국 팬들의 감정싸움을 불러왔고, 왕성한 SNS 활동은 늘 가십으로 이어졌다. 기성용을 걱정하는 이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고 평가했고 그게 2013년 파동으로 현실이 됐다.

20대 초반의 철없던 청년을 안정적이고 신중한 프로페셔널로 바꾼 계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결혼이다. 지상파의 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배우 한혜진과 결혼한 기성용은 이후 강한 책임감을 보였다. 여덟 살 연상의 아내였기에 초반에는 우려도 있었지만 오히려 성숙한 아내의 조언이 기성용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 대표팀 선배였던 차두리와 곽태휘는 “기성용이 결혼 후 바뀐 것 같다. 진중하고 사려 깊어졌다”고 말했다.

다음은 주장 완장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기성용을 주장으로 임명한 최초의 감독이다. 그는 기량, 나이, 리더십, 소통 능력을 관찰한 후 아시안컵을 앞두고 기성용에게 주장 완장을 맡겼다. 기성용의 주장 임명을 두고 과거의 행동들로 인해 자격이 없다는 지적도 일었다. 하지만 아시안컵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런 인식을 180도 바꿔놓았다. 섬세한 배려와 수평적인 리더십을 발휘했고, 영어를 이용해 슈틸리케 감독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다. 그라운드 위에서는 가장 돋보이는 경기력으로 한국을 결승까지 이끌었다. 수직적인 지시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로 선수들의 마음을 사고, 그라운드 위에서 의지가 되는 플레이로 동료들을 이끄는 방식은 과거 박지성의 방식과 흡사하다. 슈틸리케 감독은 그런 기성용에게 호평을 보내며 대회 후에도 주장 완장을 계속 기성용에게 맡기고 있다.

기량적인 면에서 기성용의 영향력은 대표팀 내에서 절대적이다. 한때 그를 앞선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청용·구자철 같은 또래 선수나 공격의 중심인 후배 손흥민도 미치지 못한다. 아시안컵에서 기성용은 대표팀이 치른 6경기에 모두 선발 출전한 3명(기성용·김진수·박주호) 중 1명이었고, 김진수(540분) 다음으로 많은 539분을 소화했다. 한국이 결승전에서 호주에 아쉽게 패하며 우승을 놓쳤지만, 우승을 했더라면 대회 MVP가 확실했던 선수였다. 슈틸리케 감독이 추구하는 점유율과 패스 중심의 축구철학이 확립되면서 기성용의 가치는 더욱 상승했다. 볼 소유와 패스 전개, 경기 조율, 강력한 슈팅력, 수준급의 수비 등 미드필더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갖춘 기성용을 중심으로 대표팀의 시스템을 꾸리는 게 슈틸리케 감독의 운영 방안이다. 일명 ‘기성용 시프트’다. 기성용의 위치에 따라 대표팀의 플레이 스타일과 성향까지 통째로 바뀌는 것이다.

손흥민의 아시아 최고 이적료 기록 경신할 수도

이번에 있었던 월드컵 2차 예선 2연전에서 ‘기성용 시프트’는 단연 빛났다. 슈틸리케 감독 부임 후 대표팀에서 주로 3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됐던 기성용은 이번에는 2선으로 이동해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섰다. 한국을 상대로 한 아시아 팀들이 극단적인 수비 전략으로 나서는 상황에서 승리하려면 공격력 강화가 필요했다. 슈틸리케 감독이 내놓은 해결 방안은 기성용의 전진 배치였다. FC 서울, 셀틱, 스완지시티에서 팀의 요구에 따라 뛰어난 공격 가담과 득점력을 자랑했던 기성용은 대표팀에서 봉인해둔 공격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기성용의 여유 있는 경기 운영과 정교한 침투 패스는 석현준, 손흥민, 구자철, 권창훈, 이재성에게 연결돼 골을 만들어냈다. 특히 새롭게 부상한 1994년생 미드필더 권창훈은 기성용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슈틸리케 감독은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기성용을 공격형 미드필더로 올리는 전술을 계속 사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제 만 26세인 기성용은 현 시점에서 월드클래스에 가장 근접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수년째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스완지시티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이미 프리미어리그 상위권 팀들의 영입 리스트에 올라 있다. 실제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널, 리버풀, 토트넘 등이 지난 2년간 기성용을 영입 대상으로 검토했고 타진했다. 특히 박지성과 작별한 뒤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가가와 신지를 영입했다가 실패를 맛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기성용을 주목하고 있다. 2012년 여름에 셀틱으로부터 이적료 약 600만 파운드(약 105억원)에 기성용을 영입했던 스완지시티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최소 1500만 파운드(약 275억원) 이상의 이적료를 책정해 놓았다. 최근 토트넘으로 이적한 손흥민이 그랬던 것처럼 3배 가까이 몸값이 상승한 상태다. 올 시즌에도 변함없는 활약을 펼친다면 중앙 미드필더 보강이 시급한 빅클럽의 러브콜을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후배 손흥민이 세운 아시아 선수 역대 최고 이적료(약 400억원) 기록을 깰 수 있는 유일한 선수가 현재로선 기성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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