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둥이’ 정서, 우리 뼛속까지 아직 남아 있다”
  • 김원식│국제문제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9.22 10:12
  • 호수 135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역설에도 흑인 비하 사건 잇달아…미국인 DNA에 박힌 흑인 차별의 본질

“미국은 인종차별을 아직 치유하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공공장소에서 ‘깜둥이(Nigger)’라고 말하는, 공손하지 못한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DNA에 남아 있는 한 부분이다.” 지난 6월21일 미국의 한 유명 코미디언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 말이다. 당시 모든 미국 언론은 현직 미국 대통령이 거의 금기가 되어 있는 깜둥이라는 뜻의 ‘니거(Nigger)’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흑인 인권단체가 9월2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실 앞에서 경찰의 인종차별 수사를 금지하는 법안의 통과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 AP 연합

얼굴색 검다는 이유로 가만히 앉아서 봉변

6월17일 흑인이 설립한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한 유명한 교회에서 백인 청년이 총기를 난사해 흑인 목사를 비롯해 9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한 데 따른 오바마 대통령의 반응이었다. 즉 오바마가 흑인 차별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 공개석상에서는 거의 금기시되어 있는 ‘깜둥이(Nigger)’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그 심각성을 알렸다고 미국 언론들은 분석한 것이다. 그다음 날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까지도 나서서 “오바마 대통령은 금기어 사용을 전혀 후회하지 않고 있으며, 여론의 반응에 대해서도 놀라워하지 않고 있다”고 못을 박았다.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을 선출하고, 자신이 ‘노예의 후손’이라고 강조한 흑인 여성이 법무장관에 취임한 미국, 그러나 아직도 흑인 차별의 문제가 남아 있기에 스스로 ‘깜둥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말자고 암묵적으로 무언의 약속을 한 미국이다. 한 예로 오바마의 깜둥이 발언이 있기 1년 전인 지난해 5월, 뉴햄프셔 주의 잘나가던 백인 경찰서장이 공식석상도 아닌 한 식당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오바마 대통령을 비난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깜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끝에 사임해야 했다. 그만큼 흑인 차별과 모욕을 상징하는 깜둥이라는 금기어를 그 자신 흑인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으니 그 파장은 당연했다.

하지만 오바마가 정말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흑인 차별과 비하가 “우리 뼛속(DNA)까지 아직 남아 있다”는 의미였을 것이란 분석이 많이 나온다. 오바마는 이날 인터뷰에서도 “그것은 인종주의가 여전히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공공연한 차별의 문제도 아니다. 200~300년 전에 일어난 일을 하루아침에 전혀 없던 일로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못 박았다. 그는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최초 흑인 대통령인 나의 존재로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는 어느 정도 개선됐지만, 노예제 유산은 여전히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면서 이 점을 분명히 했다. 한마디로 과거 노예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흑인 차별이 아직도 미국 국민, 특히 백인들의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얼굴색이 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가만히 앉아서 봉변을 당할 수 있다는 얘기다. 더구나 이러한 봉변은 백인이라는 불특정 다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공권력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지금 미국이 직면한 심각한 문제라고 오바마가 지적한 것이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만 보더라도 오바마의 현실 인식은 그대로 적중하고 있다. 9월13일, 뉴욕에 거주하는 한 흑인 여성은 뉴욕 경찰(NYPD)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지난해 9월, 그녀는 BMW 승용차를 운전하고 가던 중 뉴욕 경찰관의 교통단속에 걸렸다. 그녀는 단지 자신이 흑인 여성이고 그런 사람이 고가의 승용차를 모는 것을 의심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는 피해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흑인 여성이 아니었다면 이런 고통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소송의 골자였다. 물론 이는 흑인 여성의 일방적인 주장일 수도 있다. 이 소송에 관해 뉴욕 경찰도 해당 여성의 과거 전과 기록까지 공개하며 “당시 경찰이 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동안 도로 중앙에서 뛰는 등 이상 행동을 한 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적법한 절차에 의한 공권력 행사였다는 항변이다.

그런데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9월9일, 2013년에 은퇴한 미국의 유명한 흑인 테니스 선수인 제임스 블레이크는 이날 열리는 US오픈 테니스 대회를 보러 가기 위해 맨해튼 중심가의 한 호텔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6명의 경찰관이 달려들어 그를 땅바닥에 넘어뜨린 후 수갑을 채워 체포했다. 경찰은 신용카드 사기 사건 용의자로 오인해 체포했다고 밝혔지만, 15분 동안 수갑을 찬 채 체포된 블레이크는 자신이 왜 체포됐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이 사건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어 파문을 일으키자, 그다음 날 뉴욕 경찰국장과 뉴욕 시장은 블레이크에게 공식 사과하고 해당 경찰관들을 징계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하지만 그가 유명인이 아니었고 그냥 일반 흑인이었다면 이렇게 파문이 일고 시장까지 나서서 사과를 했겠느냐는 비아냥거림이 쏟아졌다. 이번 사건은 뉴욕에서, 아니 미국 전역에서 늘 흑인에게 일어나는 비일비재한 일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바마도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당했을 것”

지난해 8월9일, 미국 미주리 주 퍼거슨 지역에서 비무장 상태였던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18)이 두 손을 머리에 올린 채 저항 의사가 없음을 밝혔지만 경관에 의해 사살되고 말았다. ‘손들었다. 쏘지 마!’라는 구호와 함께 미국 전역으로 시위를 확산시킨 이른바 ‘퍼거슨 사태’는 사실 언제든지 드러날 수밖에 없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사건 이후 미국 법무부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2년과 2014년 사이 이 지역에서 교통 단속을 당한 사람 중 85%가 흑인이었으며, 이 중 90%에 해당하는 흑인 운전자에게 고지서가 발부됐다. 또한, 이 기간 중에 현지 경찰에 의해 체포된 사람들의 93%가 흑인이었다. 흑인 인구 비율(67%)이 높은 지역임을 감안하더라도, 이 기간에 사용된 공권력의 88%가 흑인에게 집중된 것은 명확했다. 이렇게 흑인에게 과도한 단속을 벌였지만, 오히려 흑인이 마약이나 불법무기 소지 등으로 적발당한 건수는 백인에 비해 26%나 적었다. 그러나 일단 기소된 흑인에 대한 공소가 기각된 확률은 전체에 비해 68%나 적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마디로 흑인 차별이 구조적으로 만연해 있었다는 것이다.

유명 테니스 선수 사건이 미국 언론에 집중적으로 보도되자, 일부 네티즌들은 “오바마도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저런 꼴을 여러 번 당했을 것”이라는 댓글을 달았고,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 오바마도 대통령만 아니라면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얼마든지 여러 번 체포됐을 것이라는 비아냥거림이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