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내면의 공포가 더 공포스럽다
  • 허남웅| 영화평론가 (.)
  • 승인 2015.11.05 16:45
  • 호수 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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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검은 사제들>과 <더 기프트>가 증명하는 두려움의 근원

공포영화는 여름철에 봐야 제맛이라지만, 이 공식은 깨진 지 오래다. 이제 공포영화는 사시사철 가리지 않고 극장에서 개봉한다. 그만큼 이 사회에 공포가 만연해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도 굳이 공포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는? 공포영화가 우리 내면에 검은 잉크처럼 퍼진 공포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지금 소개할 영화 <검은 사제들>과 <더 기프트>가 그렇다.

<검은 사제들>은 김윤석과 강동원의 캐스팅으로 제작 단계에서부터 대중의 화제를 모았다. 실은 제작되기 훨씬 전부터 충무로 관계자들이 영화화하고 싶어 하던 작품이었다. <검은 사제들>은 이 영화를 연출한 장재현 감독이 지난해 단편으로 만들었던 <12번째 보조사제>가 원작이다.

피붙이를 잃어본 비극의 기억은 최 부제(강동원)에게 내면 속 공포로 작동한다. ⓒ CJ 엔터테인먼트

<검은 사제들>, 악이 창궐하는 한국 사회 반영

이야기의 줄기는 이렇다. 김 신부(김윤석)는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영신(박소담)의 몸에 똬리를 튼 악마를 내쫓으려 퇴마의식을 계획한다. 이를 위해서는 보조사제가 필요한데, 그래서 선택된 인물이 최 부제(강동원)다. 하지만 악마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김 신부와 최 부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신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퇴마의식이 처음인 최 부제의 약한 마음을 공략해 그 힘을 더 키워만 간다.

<검은 사제들>은 악마가 어떻게 여고생인 영신의 몸을 숙주로 삼았는지, 그 과정에 새로운 사연을 더했다. 어린 소녀의 몸에 든 악마를 퇴치하는 엑소시즘의 소재 덕에 <검은 사제들>은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엑소시스트>(1973년)를 연상시킨다. 맞는 말이긴 한데, <엑소시스트>의 자장(磁場) 안에서 <검은 사제들>을 이해하려 들면 놓치는 것이 생긴다.

<검은 사제들>은 <엑소시스트>와는 발현한 토양이 다르다. <엑소시스트>는 이유 없이 악령이 든 소녀와 신부의 대결이 중심에 놓였다. 반면 장재현 감독은 <검은 사제들>을 구상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패스트푸드점 창가 너머, 어두운 곳에 신부님 한 분이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순간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그 신부님의 모습에서 시작한 이야기다.”

신부님은 왜 그렇게 초조했을까? 악마 때문일 터다. 악은 몰상식과 비도덕과 비정상이 판을 치는 혼란한 틈에 기생하면서 위력을 키워가기 마련이다. <검은 사제들>에서 최 부제에 앞서 김 신부를 도왔던 보조사제는 10명이 넘었다. 단편을 단서로 삼는다면 최 부제는 아마 ‘12번째 보조사제’일 것이다. <검은 사제들>은 최 부제가 어린 시절 여동생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트라우마에 주목한다. 최 부제의 여동생을 죽음으로 몬 건 검은 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가해자의 정체가 아니다. 피붙이를 잃어본 비극의 기억이다. 영신이 여고생이라는 설정도 그냥 나온 건 아닐 테다.

지금 한국 사회는 여고생과 같은 청춘을 볼모로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욕심을 채워가는 방식으로 병들어 있다. 한국의 청춘은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에 내몰리고, 입시지옥을 간신히 통과하면 대학 등록금 고민, 취업 전쟁에 내몰려 영혼과 육신이 피폐해진다. 국가와 어른이 개인과 학생을 전혀 돌보지 않는 한국 사회는 악이 창궐하기 좋은 환경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악마로부터 영신을 구하기 위한 김 신부와 최 부제의 활동은 천주교의 이미지를 깎아낸다며 내부에서 인정받지 못한 채 개인적인 차원에서 은밀히 진행된다. 리더는 사라지고 시스템은 침몰하는 상태에서 무명의 개인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청춘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광경은 익숙하다.

의 한 장면 ⓒ 메가박스㈜플러스엠

<더 기프트>, 미국인의 내면에 도사린 공포

<더 기프트>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2014년)에서 모세를 유배 보내고 이집트 왕국의 왕위에 오른 람세스를 연기했던 조엘 에저튼이 연출했다. 그에 더해 각본까지 직접 썼는데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다. 사이먼(제이슨 베이트먼)과 로빈(레베카 홀) 부부는 안정적인 삶을 위해 교외로 이사를 온다. 이들 부부는 새 집에 들일 가구를 사러 나갔다가 우연히 사이먼의 고등학교 동창인 고든(조엘 에저튼이 직접 연기했다)을 만난다.

분위기를 밝게 가져갈 법도 한데 영화는 어떠한 수식 없이 오랜만의 만남을 건조하고 차갑게 응시한다. 손을 갖다 대기라도 하면 깨질 것 같은 유리처럼 사이먼과 고든의 관계를 가져가는 것이다. 이 부분이 <더 기프트>가 공포를 자아내는 핵심이다. 만나서 반가웠다며 고든이 매일같이 몰래 사이먼의 집에 선물을 가져다줄 때면 정체불명의 긴장감이 주위를 압도한다.

아름다운 포장지에 싸여 있지만 그걸 푸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사이먼과 로빈 부부에게 고든의 선물은 무방비 상태에 노출된 것만 같은 불안감을 일으킨다. 그와 같은 부부의 심리 상태를 외형화한 것이 바로 사이먼과 로빈의 새 집이다. 근사한 디자인이 눈을 사로잡지만, 속이 훤히 비치는 유리로 사면이 둘러싸인 집은 금방이라도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그런 의도다. 사이먼과 로빈은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인다. 누구나 꿈꾸는 중산층의 삶이 어딘가 금이 가 물이 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미국 중산층이 가진 몰락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해가 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미국이 금융위기를 통해 국가적 위기를 겪은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다.

조엘 에저튼은 <더 기프트>의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과거를 공유한 두 사람이 현재에서 충돌해, 둘 다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얻는 이야기다. 영화는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고든은 사이먼과 로빈 부부를 압박해 비밀이라는 ‘선물 상자’를 강제로 풀게 하는 가위 역할을 했지만, 그가 이들 커플을 괴롭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고든은 사이먼과 로빈을 괴롭히는 가해자이면서 과거 사이먼에게 고통을 당한 피해자로서의 정체성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과 경험은 현재를 괴롭히는 방아쇠로 작동한다. 이를 극복할 때 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터인데, 공포영화는 바로 그 점에서 내가 처한 불안의 좌표를 파악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공포영화를 그저 여름철에 땀이나 식혀주는 작품으로 치부했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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