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 100년 만에 사라진다
  • 최정민│프랑스 통신원 (.)
  • 승인 2015.11.11 16:49
  • 호수 1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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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부, 야간 및 일요일 근무 추진…파리 대형 매장들 노사 협상 중

세계 1위의 관광대국 프랑스. 지난해 파리를 찾은 관광객만 4700만명에 이른다. 파리 지역 관광위원회의 발표다. 이웃 경쟁 도시인 영국 런던을 앞지른 것에 한껏 고무된 모습이었다. 이렇게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도시 파리, 그런 파리에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편의점이다.

24시간 문화에 익숙한 한국에서 건물에 하나꼴로 있는 편의점이 파리엔 단 하나도 없다. 대개의 프랑스 슈퍼마켓들은 오후 7시에서 오후 9시 사이에 문을 닫는다.

피리에서 정규 체인으로 가장 늦게까지 문을 여는 슈퍼마켓은 샹젤리제의 모노프리로 유일하게 24시까지 영업을 한다. 골목 곳곳에 아랍 상인들이 하는 작은 슈퍼마켓들이 있지만 구색만 갖춘 구멍가게 수준이다.

야간 근무 연장안을 놓고 노사 협상 중인 프랑스 파리의 프렝탕 백화점. ⓒ 연합뉴스

야간 영업뿐만이 아니다. 프랑스에선 일요일에 문을 여는 상점 역시 많지 않다. 파리의 경우, 관광객이 붐비는 샹젤리제 같은 시내 중심가에나 나가야 문을 연 몇몇 매장들을 볼 수 있다. 영미권이나 한국에선 자연스러운, 야간 및 일요일 영업을 두고 프랑스에선 아직까지 갑론을박이 계속된다. 야간과 휴일 근무를 줄기차게 주장해온 단체의 구호는 “예스 위크엔드!(Yes Week-end)”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대선 구호였던 “예스 위 캔!(Yes We Can)”을 패러디한 것이다.

프랑스 우파 “더 일하고 더 벌자”

프랑스가 야간 및 일요일 업무를 금지한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노동법 3132조의 ‘근로자의 휴식 보장’ 조항 때문이다. 이 조항은 ‘일주일에 6일 이상 일할 수 없으며’ ‘최소 24시간을 휴식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법이 만들어진 시기는 1906년이다. 당시 노동자 중 45%의 평균수명이 40대 미만이었다고 한다. 열악한 노동 환경이 이 법안을 만들게 된 배경이었던 것이다. 일요일이 휴일로 지정된 것은 프랑스가 가톨릭 문화권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중세 때부터 ‘주일’의 개념이 있었다. 1806년 그레고리력(曆)이 안착하고, 꼭 100년 만이었던 1906년 7월, ‘노동자의 휴식을 위한 법령’이 제정됐다. 일요일이 공식적인 휴일로 지정됐고, 야간 근무도 제한됐다. 지난 한국 대선에서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저녁이 있는 삶’을 프랑스에선 100년 전부터 보장해 놓았던 셈이다.

금기와도 같았던 휴일 근무와 야간 근무에 대한 이의제기가 시작된 것은 경제 위기를 겪으며 주당 35시간에 대한 개정 요구와 맞물리면서였다. 프랑스 우파의 “더 일하고 더 벌자”는 슬로건과 함께 추가 근무를 원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재계의 입장은 말할 것도 없다. 프랑스 지방관광 연합의 보고에 따르면, 2014년의 경우 문화의 수도 파리를 찾은 관광객들이 박물관과 미술관을 관람하는 데 쓴 돈은 전체 소비액의 7%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 관광객들의 소비 중 가장 많은 37%는 모두 쇼핑에서 이뤄진 지출이었다. 관광객들에게는 평균 2.99일의 체류 기간 동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 쇼핑이라고 한다. 일요일에 상점이 문을 닫아 돈 쓸 곳이 없다는 것이 파리를 찾는 중국 관광객들의 푸념이었다.

발스 총리, ‘일요일 상점 영업법’ 시행안 공포

이러한 상황을 재계는 물론 정부까지 인지하고 있었다. 마뉘엘 발스 총리는 의회 연설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특히 중국인들이 일요일에 런던으로 쇼핑하러 가는 것을 원하느냐”고 일갈하기도 했다. 파리 중심부 오페라가(街)에 위치한 대형 백화점의 경영진은 일요일 영업을 재개할 경우 1500개 정도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내다봤으며, 영업이익 면에서는 5%에서 8%까지 증가하리라고 기대했다.

논란을 거듭하던 일요일 근무와 야간 근무에 파란불이 켜진 것은 지난 2월이다. 마뉘엘 발스 총리는 ‘일요일 상점 영업법’ 시행안을 의회 투표 없이 공포했다. 하원에서의 부결 위험 부담을 의식해, 표결 없이 시행할 수 있는 특별법을 적용한 것이었다. 발스 총리의 시행령 제정으로 ‘휴일 근무 시행’의 첫발은 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곧바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노사 간에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지난 10월8일 샹젤리제의 향수 매장 ‘세포라’는 24시까지 야간 근무를 연장하는 안(案)에 대해 노조 투표를 실시했다. 96%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됐다. 노조원인 기욤 마프탕은 프랑스 일간 ‘르 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만족스러운 합의였다”고 평가하며 “숙원 사업이 이뤄졌다”고 기뻐했다. 노조원들이 투표에 부친 협상 조건은, 오후 9시 이후의 근무는 지원자에 한해 실시하며, 100%의 추가 수당을 지급해야 하고 아이를 돌보는 보모 수당으로 시간당 12유로(1만4904원, 2015년 11월6일 환율 1242원 기준)를 추가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오후 11시 이후 퇴근할 경우 택시비까지 지급된다.

현재 파리 중심의 대형 매장들은 한창 노사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파리 시내 오페라가의 갤러리 라파이예트 백화점과 프렝탕  백화점, 그리고 파리 남쪽의 봉 마르세와 BHV 등 주요 대형 매장들은 오는 11월24일 최종 담판을 할 예정이다. 프랑스 시사주간 ‘렉스프레스’는 지난 11월3일 최종 합의 직전의 원탁회의를 전제로, 추가 수당이 책정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현재 주요 관광 지역의 경우 1년 중 52번의 일요일을 모두 영업할  수 있다. 그럴 경우 다섯 번째 일요일까지는 100% 추가 수당을 지급하지만, 여섯 번째 일요일에서 열  다섯 번째 일요일까지는 80%, 그리고 그 이상은  50%만을 지급하는 방안을 협상 중이라고 한다.

렉스프레스에 따르면, 이러한 협상 방향에 대해  상징적인 두 백화점의 경영진들이 이견을 보이고 있다고 전한다. 갤러리 라파이예트의 경우 100% 전액 지불을 모든 일요일에 적용할 용의가 있다고 한 반면, 프렝탕 그룹의 경우 ‘소극적인 입장’ 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문제’인 만큼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발스 총리가 시행령이라는 ‘꼼수’까지 쓰면서 밀어붙이고 있지만, 따지기 좋아하는 프랑스인답게, 노사 간의 줄다리기가 한창인 것이다. 휴일 근무 시 육아 보모 수당에 대해서도 세포라의 경우처럼 단순히 12유로만을 추가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아동의 경우 그 대상 연령을 16세까지로 확대하는 방안을 아울러 협상 중이라고 한다.

역설적인 것은 프랑스 자국 내에서는 이러한 노동 환경의 보호가 철저하지만 해외에서 운영하는 현지 공장에선 이러한 혜택이 전혀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유럽 뉴스 채널인 ‘유로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방글라데시나 캄보디아의 프랑스 하청 업체의 경우 하루 평균 노동 시간이 15시간에 이르며 휴일 없이 7일을 근무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임금의 경우, 방글라데시는 월 최저임금인 60유로에도 못 미치는 50유로이며, 캄보디아의 경우 59유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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